새로운 도전을 앞세운 변신은 언제나 무죄이다

글 한영남 시인

아래 글은 중국 <도라지>문학지 2023년 6월 호에 현춘산 작가를 쓴 한영남 시인의 인물 르포다. 저명한 소설가 현춘산 선생님은 오늘(3월 28일) 중국 광주에서 향년 74세로 세상을 떴다. 본지는 고인을 추모하기 위해 이 글을 싣는다. (중국 조선말 표기법을 그대로 두었음.)<편집자 주> 

고 현춘산 소설가 

[동북아신문=한영남 시인] 인간은 태여나는 순간 세상에 도전장을 던지게 된다. 이 복잡하고 어지럽고 권모술수로 가득찬 세상에 태여난다는 자체가 벌써 어지간히 위험천만한 일이면서도 그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큰 도전장이라 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세상에는 도전자들이 있어 새롭게 발전하고 더욱 아름다워지는 것이다. 도전자가 없다면 누가 감히 저 게를 먹어볼 궁리를 했을 것이며 도전자가 없다면 누가 저 가시투성이 두리언을 맛볼 궁리를 했겠는가. 도전자가 없다면 누가 나팔바지를 만들어 입을 궁리를 했을 것이며 도전자가 없다면 새로운 발명창조가 어디에서 나올 수 있었을 것인가. 그런 의미에서 세상은 바로 이와 같은 도전자들에 의해 오늘에까지 발전해왔다고 단언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작가는 끊임없이 지난 날의 스스로를 부정하면서 자신에 대한 파괴를 통해 새로운 탈변을 꿈 꾸게 된다. 한국에서 요즘 가장 핫한 소설가 김영하도 그래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제1회 <문학동네> 신인작가상 수상작)라는 글을 쓴 것이 아니겠는가.

작가 현춘산선생 역시 감히 인생에 도전하고 문학에 도전하는 전위적 사고방식을 가진 문학가이다. 그의 인생려정이나 문학행보를 살펴보면 그러한 도전정신은 더욱 빛을 발하고 있음을 한눈에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망팔(望八 – 여든을 바라본다는 뜻으로 71세를 가리침)도 훨씬 넘은 그의 도전이 지금 이 시각에도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이다.

소년에서 청년으로

1950년 7월 12일 현춘산은 흑룡강성 수화현 태평향 북성촌의 어느 한 농가에서 태여났다.

그의 집은 가난하기 짝이 없었다. 말 그대로 서발 막대 휘둘러도 거치는 것이 없을 정도였다. 전에 성분을 획분하던 시기가 있었는데 지주, 부농, 중농, 빈농, 고농으로 나누었었다. 말하자면 현춘산은 고농의 집에서 태여난 셈이였다.
그래서 그는 어려서부터 굶주림의 쓰라림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14살 나던 해에 그는 아버지를 여의면서 가정형편은 더욱 어려워졌다. 생활고로 그는 초중을 1학년밖에 다니지 못하고 중퇴해야만 했으며 16세 어린 나이에 생산대 로동에 참가해야 했다. 그때는 볼만한 문학작품들도 변변히 없었기에 그는 그 어려운 로동을 하고나서도 짬짬이 시간을 짜내여 철학과 력사를 공부했다.

아는 것이 힘이라 했던가. 같은 젊은 또래들 속에서도 누구보다 책을 많이 읽고 사색하기를 좋아하는 그는 단연 낭중지추(囊中之錐)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리하여 그는 열아홉살부터 생산대 공청단 간부로 발탁되여 포만된 열정과 정열을 불태우며 자기의 리상을 실현하기 위해 모든 것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어떻게 해서라도 락후한 고향을 변신시키고 싶었다. 그러나 생각대로 되여주지 않는 것이 세상사라 했던가. 그는 교통사고를 당해 오른쪽 팔에 심각한 부상을 입으면서 체력로동에 참가할 수 없게 되였다.

그 때는 로동이 한 사람의 호불호를 가늠하는 유일한 자대였다. 게다가 끓는 피가 사품치는데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징벌이였다. 다행히 조직에서는 촌소학교의 민반교원으로 그를 써주었다.

소학교 교사에서 중학교 교사로

진정한 공산당원은 나사못처럼 어디에 박히든 거기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깡그리 인민을 위해 복무하는 사업에 바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육체로동을 하지 못한다면 두뇌와 입 그리고 성한 팔로 아이들한테 세상리치와 사람됨됨이를 깨우쳐주리라!
그러나 막상 번뜩이던 삽날을 휘두르던 그가 가느다란 교편을 들고 똘망똘망한 눈동자들을 마주하고 지식을 전수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였다. 가방끈이 짜른 그는 지식의 중요성을 더욱 깊이 깨달았고 자신의 쓰라린 <교훈>으로 아이들한테 공부의 중요성을 깨우쳐주었다. 그리고 그는 합격된 인민교사가 되기 위해 밤낮이 따로 없이 공부를 했다. 모르면 사전한테 묻고 그래도 모르면 선배선생님들한테 허심히 물으며 앎에 이르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짬짬이 자투리시간을 리용하여 글을 쓰기 시작했다. 시와 소설과 수필과 동화와 평론들이 신문이나 잡지에 실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학생들한테 더욱 잘 가르치기 위한 자기점검 정도로 생각했지 작가의 꿈은 꾸어본 적도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그는 열심히 교수연구를 진행했고 연변대학 통신학부에 입학하여 지식면을 더욱 넓혀나갔다.

그리하여 그는 민반교원에서 정식교원으로 편제를 가지게 되였고 소학교 교원에서 중학교 교원으로 <승진>하게 되였다.

중학교에서 그는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다. 수업을 잘하지 애들이 잘 따라주지 게다가 글까지 발표하는 <작가>였으니깐. 그는 중학교 교연조 조장을 거쳐 교도주임으로 임명되였다.

그렇게 되자 업무가 초부하로 되여 그의 과외시간을 모조리 잘라먹어버렸다. 그리하여 그는 그토록 사랑하던 창작도 멀리하게 되였다. 교편생활을 하던 20여년 간 그는 거의 작품을 발표하지 못했다.

교원에서 환자로

1994년 그는 흥화향 문화소 소장으로 임명되였다. 그러나 그는 향과 촌의 간부들이 돈을 내지 않고 영화나 공연을 관람하는 <특수화>를 참을 수 없었다. 그는 문화소 소장이 되자 단호하게 이 불량한 기풍을 두절시켜버렸다. 그러자 촌의 간부들이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어느 한번은 시에서 령도가 시찰을 왔다가 향에서 조직한 공연을 관람하게 되였다. 그런데 공연시간이 다 되였는데도 령도들은 오지 않았다. 시간은 사정없이 흘러갔다. 공연구경을 왔던 백성들은 여기저기에서 불평을 늘여놓기 시작했다. 두시간이 지났다. 그는 문화국 국장의 결사적인 반대도 무릅쓰고 공연을 시작한다고 선포했다. 관중석에서 박수가 터져나왔다. 문화국 국장은 그를 째려보았다. 어디 두고보자는 투였다.

결국 그 사건을 계기로 그는 다시 중학교에 돌아가 교편생활을 해야 했다.

1996년 꺾은 90인 그는 관심병이라는 팔자에도 없는 병으로 북경에 가서 치료를 받게 되였다. 그는 사랑하는 아이들과 동료선생님들과 정든 교정을 떠나게 되였다. 그렇게 교단을 떠난 그는 다시는 교단에 서지 못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병에 대한 상식이 전무했던 그는 자신의 병이 어느 정도 위중한지를 몰랐던 것이다.
고향을 떠나기 전 할빈에 있는 흑룡강신문사에 가서 은사인 한춘시인을 만났다. 한춘선생은 그의 손을 잡고 북경에 가서 병치료를 하면서도 꼭 글을 놓지 말 것을 당부하면서 그한테 <숙제>를 내주었다. 북경의 곳곳을 소개하는 계렬수필을 쓰라고.
그는 오래동안 방치해두었던 붓을 다시 꺼내들었다. 눌리운 용수철은 더욱 세차게 튕겨오르고 다져진 화산은 더욱 맹렬하게 폭발하는 법이다. 그는 자기가 환자라는 것마저 잊고 <미친듯이> 창작열정을 불태우고 시작했다. 그의 손에서 50여편의 수필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수필들은 당시 조선말 신문과 잡지들에 발표되면서 현춘산의 작가적 자리매김을 확실하게 해주게 되였다.

드디여 1999년 12월 그는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를 통해 <고향련정>이라는 수필집을 출간하게 되였다.

그는 비록 벌써 1976년에 <연변녀성> 수필공모에서 수상하면서 문단데뷔를 했으나 상기 수필집의 출간을 자신의 정식 문단데뷔라고 겸손하게 말하군 한다. 그것이 그의 나이 반백, 50세 무렵이였다.

환자에서 작가로

작가는 작품으로 말하는 법이다.
고향에서 생산대 공청단사업을 하면서 또래들의 선줄군이 되여 격앙된 어투로 집체일에 동원을 하기도 했고 학생들 앞에서 문학에 대해 력사에 대해 열변을 토하기도 했던 그는 입을 닫고 필을 들어 세상과 대화하기 시작했다.

그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2002년 그는 민족출판사를 통해 <주고받는 마음>이라는 수필집을 출간하였고 2012년에는 연변인민출판사를 통해 <오늘밤은 달이 밝아라>라는 개인작품집을 출간하였다. 그리고 그는 2005년부터 흑룡강신문에 <호란강반의 비가>라는 장편소설을 련재했고 그 장편소설은 그해 흑룡강신문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선정되였다. 흑룡강신문 신춘문예작이였으나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에서는 그 장편소설이 이런저런 문제점이 있다고 출판을 거부했다. 그는 연변인민출판사를 찾아갔다. 거기에서 작품에 대한 충분한 긍정을 받은 그는 날듯이 기뻤다. 작가가 작가로서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얼마나 감개무량한 일인가.

그뒤 연변인민출판사에서는 장편소설 <호란강반의 비가>를 단행본으로 출간해주었다. 그의 창작생애에서 첫 장편소설이 단행본으로 출간되는 순간이였다.
공든 탑은 무너지지 않는 법이다. 그의 성실한 창작태도와 꾸준한 글쓰기는 풍성한

열매를 맺었다. 그는 선후로 흑룡강신문 신춘문예상, 흑룡강성소수민족문학상, 한국 해외문학상, 송화강잡지 수필문학상 등 굵직굵직한 문학상들을 싹쓸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연변작가협회 회원, 흑룡강성작가협회 회원, 중국소수민족작가학회 회원으로 되였다.

그러나 성적 앞에서 그는 추호도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초심을 잊지 않고 겸손하고 신근하게 자신의 글농사를 짓고 있다.

작가에서 학자로

최근 10년 사이 그는 중단편소설 창작에 열을 올리면서 이미 30여부의 소설을 탈고했다. 그중 10여부의 소설들은 전부 중국고대사를 소재로 한 력사소설로서 중국조선족 문단의 한 공백을 메워주었다. 이와 같은 작품들은 연변문학, 장백산, 도라지, 송화강 등 잡지들에 실리면서 독자들과 대면하게 되였고 독자들의 반향도 아주 좋았다. 력사소설은 력사적 사실에도 부합되면서도 작가의 허구가 허용되는 작품이다. 실존했던 력사인물을 소개식이 아닌 소설로서의 인물형상창조를 해낸다는 것은 일반 소설보다 갑절 어려운 작업이다. 가령 조조라는 인물로 력사소설을 쓴다고 할 때 조조의 인물형상을 두드러지게 부각해야 하지만 기본 력사사실을 떠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력사소설의 한계이면서 작가에 대한 고험이기도 했다.

그러나 도전을 즐기고 문학에로의 고행에 기꺼이 한몸을 불사하는 현춘산작가는 그런 것쯤 꿈에 네뚜리로 여기는 사람이다. 그에게 있어 도전은 즐거운 일이며 결코 난공불락이여서 그 앞에서 고개 숙이거나 에돌아가야 할 존재는 아니였다.

중국고전을 읽고 거기에서 력사인물을 선정하고 그 인물을 주인공으로 력사소설을 쓴다는 것은 결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현춘산작가는 그 어려운 작업을 해냈고 성공했던 것이다.

장백산 잡지의 위챗판에 실린 그의 력사소설 <멱라강의 넋>은 고요하던 조선족문단에 작지 않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리고 뭐니뭐니 해도 그의 성과를 말할 때 토템시연구를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토템시라는 제기법이 조선족문단에 처음 나온 것은 지난 세기 90년대였다. 그때 장춘에서 길림신문사 사장 겸 장백산잡지사 사장으로 있던 남영전시인은 자신이 알심들여 연구하고 시화시킨 토템시 42수를 들고 문단에 강력한 충격을 주었다. 사람들은 중구난방으로 떠들어댔고 남영전의 토템시는 일약 문단의 핫이슈로 부상했다.
그러나 일부 보수인사들의 반대에 부딪쳐 토템시는 조선족문단에서 더 큰 발전을 하기 어려웠다.

세상 만사만물을 다 그 존재가치가 있는 법이다. 조선족문단이 인정해주지 않는다고 그 존재가 가치없는 것으로 될 리는 없는 것이다. 하물며 흑룡강의 한춘시인, 연변의 최룡관시인, 최삼룡평론가, 장춘의 박문희시인, 대련의 김파시인 등이 적극 나서서 토템시를 위한 목소리를 높이고 있음에랴.

그리고 중국 주류문단에서는 어느덧 토템시 붐이 일기 시작했다. 중국의 권위적인 문학평론가들과 시인들이 나서서 토템시의 존재와 가치를 충분히 긍정해주었고 학자들은 토템시연구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중국에서는 당대 최고의 시인, 평론가, 학자들이 모여 토템시 세미나를 수차 조직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족문단의 반응은 랭랭했다. 이때 현춘산작가가 나섰다. 그는 자기의 글을 제쳐놓고 토템시연구에 달라붙었다. 그는 직접 남영전시인을 찾아가 그의 리론을 경청했고 남시인한테서 해당 자료들을 빌려 구독했다.

그리고 그는 토템시 관련 책들을 광범하게 섭렵하기 시작했다. 그는 한국에서 출판된 <삼국유사 사전>을 몽땅 복사를 했으며 지인을 통해 <환단고기>라는 책을 구해 읽었다. 그는 왜 한 민족한테 토템이 여럿이 될 수 있으며 그런 토템들은 한 민족의 흥망성쇄 내지 발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깊이 파고들었다.

일찍 어려서부터 닥치는대로 읽었던 력사, 철학 관련 지식들이 드디여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드디여 그의 리론들이 각 신문 잡지에서 볕을 보기 시작했다. 그가 쓴 남영전 토템시의 해설과 연구 및 평론들은 토템시를 백안시하던 조선족문단에 신선한 바람을 몰아왔고 마침내 길림신문에서는 시인, 작가, 학자들이 토템시 관련 자신들의 주장 내지 견해를 피력하게 되였다. 이는 조선족시단에서 토템시의 위상을 수립하는데 결정적인 행보로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맨 선두에는 현춘산작가가 씩씩하게 걸어가고 있다.

작가에서 <사장님>으로

현춘산선생의 안해는 최옥선이라고 한다. 그들은 줄곧 금슬이 좋아서 남들의 부러움을 받고 있으며 슬하에 아들 하나 딸 둘을 두고 있다. 그리고 그의 두 딸 역시 모두 작가이다. 큰 딸 현동화는 현재 한국에 있으면서 글농사를 열심히 짓고 있고 둘째 딸 현청화는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이름난 작가이다. 그녀는 이미 청년작가상을 비롯한 중국 조선족들의 거의 모든 문학상을 싹쓸이한 <수상전문호>이다. 현청화의 문학재주에 찬탄을 보내는 사람들은 그의 아버지가 그 유명한 <호란강반의 비가>를 쓴 현춘산작가라는 것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현춘산은 조용히 미소만 지을 뿐이다. 자식 잘 둔 부모 인끔 오른다고 했던가. 가끔씩 술 한 잔 들어가면 터져나오는 그의 너털웃음이야말로 그런 그의 심정을 너무 잘 보여주는 것이리라.

그는 현숙한 안해와 의논해서 벌써 3회나 흑룡강신문 <녀성수필>, <학생기자> 등 응모활동에 협찬을 해주었고 3명 조선족 작가들이 생활난으로 작품집을 출간하지 못하는 사정을 헤아려 선뜻 성금을 쾌척해주기도 했다. 그리고 생활이 어려운데 쓰라고 준 돈 역시 만만치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사장님>이라고 부를 때도 있다. 그러나 그는 사장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일반인들보다 더 어렵게 지내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들 내외는 출장을 떠나면 꼭 제일 싼 려관에 들었고 빵이나 국수 따위로 끼니를 에우기가 일쑤이다. 그들은 종래로 택시를 타지 않는다. 퇴직금을 받아서 생활하는 작가한테 돈이 있으면 얼마나 있으랴. 그것은 실로 현춘산 내외가 아껴먹고 아껴쓰면서 절약한 손톱 끝에서 나온 피와 땀의 결정체이리라.

그러나 다른 사람의 어려운 사정을 잘 아는 현춘산선생은 안해를 설득해서 그들한테 선뜻 사재를 털어주군 한다. 그리고는 또 절약하고 절약하는 것이다.

내막을 아는 사람들은 그를 바보라고 한다. 그러나 그는 그저 웃을 뿐이였다. 그의 가슴 속에는 돈보다 값진 문학이 있었던 것이다. 문학보다 소중한 금싸래기 같은 인간이 있었던 것이다.

여백에

필자는 2004년 흑룡강신문 편집기자 시절에 신문사를 방문한 현춘산작가를 처음 만나 인사를 틀게 되였다. 술을 즐기는 우리는 첫 만남에 대뜸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되였고 그것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우리는 술과 문학을 가운데 두고 17년이라는 나이차를 거뜬히 뛰여넘어 밤이 새도록 문학에 대해 인생에 대해 두런거리군 한다.

어느 한번 현춘산선생이 새로 마련한 필자의 새집에 오게 되였다. 고향행을 하는 도중 들린 것이였다.

어쩌다 오랜만에 만난 필자는 저으기 흥분해서 현선생을 모시고 식당으로 갔다. 그러자 현선생은 갑자기 화를 벌컥 내더니 이미 주문한 것은 할 수 없다면서 포장해달라고 해서는 그것을 가지고 쥉쥉 혼자서 우리 집으로 향하는 것이였다. 어안이 벙벙해난 필자는 그 뒤를 다르는 수밖에 없었다.

집에 와서 술상을 다시 차려서야 의문이 풀렸다.
없는 사정을 서로 잘 아는 사이에 무슨 겉치례를 해가며 비싼 돈 팔아 식당놀이를 하느냐는 것이였다. 그리고 이미 주문한 것이여서 식당에서 그대로 먹어도 되지만 한번 단단히 인상을 남겨 다시는 절대 이와 같은 <불상사>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포장해서 집으로 왔다는 것이였다.

그날 밤이 새도록 술을 마시며 필자는 현춘산작가의 높은 인격과 깊은 마음을 다시 들여다보게 되였다.

아아, 이런 사람이라면 형님으로 모신게 참 잘한 일이구나!

춘산 작가는 오늘도 토템시 연구의 길에서 알토란 같은 정성과 심혈을 쏟아붓고 있다. 근들이술 한잔으로 목을 추기고 <홍탑산>표 담배를 꼬나물고서…


<도라지>(2023년 제6기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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