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에 무궁화에 물을 주며
 

9월은 일본 열도에 태풍이 많이 부는 계절이다. 그 여파로 간밤에 내리던 비가 아침에 일어나니 아직도 그대로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빗줄기를 거슬러 하늘을 쳐다보니  희뿌연 비구름이 장막 같이 무겁게 덮여있는데 그렇지 않아도 저혈압이라서 기압이 낮은 날씨이면 답답해 나는 내 가슴이 그 무게에 눌려 숨이 막히는 것 같다. 그래서 눈을 돌려 내려다 보니 베란다 아래 작은 화원에는 푸른 나무와 잔디가 빗물에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하늘이야 무슨 색깔이든 마음껏 물을 먹을 수 있다고 쭉쭉 발돋움 하며 설레고 있다.

다시 우리 집 무궁화를 보니 물주기 당번인 남편이 엊저녁에 깜빡하고 물을 주지 않아서 흙이 바싹바싹 말라있다. 
“오늘은 내가 물을 줄까? 물 마시니 좋지?”

그렇게 노란 바케스에 담긴 물을 아낌없이 쏟아주니 잠깐 사이에 시들하던 잎이 어느새 파랗게 살아난다. 

밖에서는 비가 주륵주륵 내리는데 우리 집 무궁화는 베란다의 화분 안에 살아서 하늘이 주는 빗물을 마시지 못한다. 아무리 목이 말라 쳐다 봐도 바람에 튕겨온 빗방울 몇 개만 잎에 떨어질 뿐 마른 목을 축일 수는 없다. 그래서 오늘도 내가 조로록 부어 주는 물로 마른 목을 달래고 있다. 

다섯 종류의 무궁화가 한 화분에 자라고 있어서 물도 아침 저녁으로 많이 많이 주어야 하지만 대신 다섯 가지 모양에 다섯 가지 새깔의 꽃이 어우러져 펴있어서 특별하고 경이로운 아름다움을 만들어 낸다. 오늘도 하얀색 빨간색 자주색 보라색 연분홍색의 무궁화가 활짝 피어 있어 바라보는 내 눈이 즐겁다.

자연이 주는 혜택을 마음껏 받을 수가 없어서 주는 것 만큼만 받아 마셔야 하는 배란다의 무궁화, 그래도 능력껏 활짝 피어서는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화분 속의 무궁화를 바라보니 이국땅에 사는 우리 모습 같아서 애틋하고 정이 간다.

만주 땅에 정착한  이주민 2세로 마을 사람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치고 총을 들고 일제와 싸웠던 아버지는 하얀 백단심, 러시아 고려인 2세로 태어나 부대를 따라 국경을 건너온 아버지를 기우奇遇로 만나 가정을 이루고 우리를 낳은 어머니는 빨간 무궁화, 그리고 일본 회사에서도 뛰어난 기술과 재능으로 일본 사람들을 초월한 멋진 엔지니어인 남편은 자주색 무궁화, 박사가 되어 국립나고야대학교에서 일하는 예쁜 딸 운이는 연분홍 무궁화, 일본땅에서 한글을 가르치고 열심히 글을 쓰는 나는 보라색 무궁화, 그렇게 나무에게 이름을 정해주며 빗바람에 떨어진 나뭇잎들을 거둬낸다.
되고 싶어서 이주민이 된 우리가 아니지만 정작 이주민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 되고 보니 쉬운 것이  하나도 없다.

남편이 아무리 재능이 있어도 일본 사람들로부터 차별을 받을 수밖에 없고 그래서 승진할 때에도, 매일 하는 일이 에어컨 관리이고 사장님에게 회사원들의 동향이나 보고하는 무능한 일본인에게 밀려야 했고 기계이론도 제대로 이해 못한 주제에 감 놓아라 배 놓아라 트집 잡는 일본인 기술자 때문에 목청을 높이며 싸워야 했다. 그래도 남편은 연구에 성공하여 과학기술 특허를 두 개나 따냈고 지금도 회사에서 큰 소리를 치며 일하고 있다.

중학교 때 딸애는 공부성적도 내신성적도 자기보다 낮은 일본애에게 추천입시 자격을 빼앗겨야 했다. 하지만 눈물을 닦고 열심히 공부하여 정시에서 높은 성적을 따냄으로써  자기 힘으로 일류 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하지만 딸애 자리를 빼앗았던 일본애는 추천입시에도 떨어져서 일반 고등학교에 갔다. 그때부터 딸애는 자신의 능력을 믿게 되었고 씩씩하게 자기 인생을 만들어 가게 되었다.

갑자기 일본 땅에서 무직업자가 되고 보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고등학교 선생님으로 신문사의 기자로 당당한 사회의 주역으로 살아가던 내가 한 순간에 엑스트라가 되어버리었다.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는 막막한 현실에서 나는 ‘나’를 잃을 뻔 하기도 하였다.

시간당 보수를 받으며 손톱이 쪼개질 정도로 자동차시트를 만들어야 했을 때, 초 스피드로 달리는 마선으로 끊임없이 자동차시트를 박아내면서 나는 ‘나’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머리 터지게 고민하였다. 그래도 가족을 위해서 아픈 마음을 다독이며 열심히 살았더니 나에게도 길이 열려 외국어학원에서 한글을 가르치게 되었고 국제학술회의에도 다니게 되었고 책도 낼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나’의 고민에 빠져 허덕일 때 나의 마음은 닫혀 있었다. 내가 ‘나’를 찾고 마음을 여니 보이지 않던 주위 풍경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일본 땅에서도 수많은 동포들이 열심히 멋지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올해 초에 처음으로 일본 연변대학학우회 신년회에 가보니 일본 중국을 이웃집 같이 왔다 갔다 하면서 멋진 건물들을 지어내는 건축가도 있었고 IT회사 언어학원 물류회사를 경영하는 경영자들도 있었고 가수, 화가 같은 예술인도 있었고 대학교에서 일본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님들도 있었다. 마음을 여니 그제사 다양한 직업을 갖고 이러저런 일터에서 열심히들 살고 있는 조선족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몇몇 학자들의 연구모임으로 시작된 조선족연구회가 이제는 나라에서 인정하는 조선족연구학회로 발전하여 일본에서 박사공부를 하는 조선족학생들에게 논문발표를 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주었고 학술지도 꾸려서 학자들의 연구성과를 정리하여 재일조선족발전의 역사가 기록으로 남을 수 있게 되었다.

재일조선족이라는, 역사에 없었던 우리의 이름이 재일 조선인 재일한인과 함께 재일동포의 범주에 들게 되었고 재외동포 연구에서 제외할 수 없는 거대한 커뮤니티가 형성되었다. 이제는 운동회를 열어서 몇 천 명이 모여서 즐거운 경기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 사회는 성장하였다.

이번에 조선족연구학회와 문화경제교류협회 주최로 처음으로 「자화상을 그리다:나의 일본생활 이야기」란 테마로 글짓기 공모를 하였다. 산 설고 물 설고 낯 선 이국땅에 혈혈단신으로 떨어져 말도 모르면서 아르바이트부터 시작하다나니 일본인들로부터 억울하게 괄시도 받았지만 악착스레 공부하여 석사 박사가 된 유학생들, 이제는 모두들 당당히 자기 일을 가지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모습들이 진실하게 그려져 있었다. 생생한 그들의 인생담이 바로 재일조선족의 30년 역사이다.

이주민족인 우리에게 주어진 자리는 많지 않다. 우리가 받을 수 있는 혜택도 별로 없다. 그래도 우리는 열심히 살아가며 우리의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다.

10월에 학술회의로 도쿄에 가는데 우리 ‘엄씨 가문 모임’에서 환영회를 열어준다고 한다. 일본에서도 뭉쳐 사는 우리 가문의 사람들, 사진에서만 보던 얼굴들을 만나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두근두근 마음이 설렌다.

올해 여름에는 혹서가 심해서 무궁화에 벌레도 끼었고 꽃도 여느해보다 많이 피지 못했었다. 그런데 몇 번 약을 치고 더위도 물러가니 무궁화가 다시 부지런히 꽃을 피우고 있다. 6월부터 피기 시작해서 10월까지 꾸준히 꽃을 피우는 무궁화, 해충의 침입에도 불태우는 무더위에도 꿋꿋이 살아 남은 무궁화는 이제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면 또다시 잎이 자라고 꽃을 피울 것이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빗물도 마음껏 먹을 수 없고 비좁은 화분에서 비비닥거리며 자라지만 우리집 베란다의 오색 무궁화는 오늘도 빗방울을 이슬처럼 머금고 촉촉히 눈빛으로 나를 보며 웃는다. 

비 내리는 아침에 내 마음에도 꽃이 핀다.

《문화시대》, 2018-05 발표 

 

정안사 바위 위의 소나무
 
 

 기후(岐阜県)에 있는 정안사(正眼寺)에 가면 본당 마당에 있는 소나무 두 그루를 볼 수 있다. 한 그루는 바위 위에, 한 그루는 땅 위에, 바위 위의 소나무는 작고 가지도 앙상하나 땅 위의 소나무는 키도 크고 가지도 풍성하다.

10년 전 어느 날, 바람에 날려온 소나무 씨 하나가 바위 위에 떨어졌는데 마침 비가 왔고, 비가 개니 바위 위가 따뜻하여 지고, 거기에 바람 따라 흙먼지가 날아와서 씨앗을 덮어줘서, 씨앗은 싹이 트고 자라기 시작했다.

물을 주는 사람도 흙을 덮어주는 사람도 없어서, 씨앗은 목이 마르면 비를 기다리고 추우면 해를 기다리고 배고프면 흙먼지를 날라 다가 줄 바람을 기다리며 그렇게 인내하며 살아냈다.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한 해가 가고 두 해가 가고 그렇게 세월이 흐르는 동안 소나무는 능력 것 살아남았다.

주지승인 야마카와 소겐(山川宗玄)은 이 소나무에게서 두 가지를 배울 수 있다고 했다.
    첫째, 전심전령(全身全霊) 즉 몸과 마음 다 바쳐 자기 능력을 다해서 노력하면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
    둘째, 현성수용(現成受容) 즉 아무리 힘든 현실이라도 현재 이루어진 환경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어찌 보면 이주민족인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다.

백 년 전, 우리 선조는 나라를 잃고 바람에 날려가는 소나무 씨같이 척박한 만주 땅에 떨어졌지만 그래도 밭을 일구고 씨앗을 뿌리고 야학을 꾸리고 아이들을 교육하며 끝까지 살아남았다. 한 사람 두 사람, 한 가족 두 가족이 모여서 마을이 되고 수많은 마을이 모여서 시市를 이루고 조선족자치주까지 세웠다. 야학이 소학교 중학교가 되고 이제는 종합대학으로 발전했다. 그렇게 조선족은 당당하게 중화인민공화국이란 대가정의 일원一員이 되었다.

어쩌다 보니 세월이 바뀌며 그들은 또 한 번 바람에 날려 한국으로 일본으로 세계 각국으로 또 그렇게 날려갔다. 하지만 그곳 역시 비옥한 토양이 아니라 메마른 바위 위였다. 그곳 역시 그들이 살아남기에는 너무나도 가혹한 환경이었다.

몇 년 전에 『도라지 』잡지사 시상식에 갔다가 소설가 구호준 씨의 이야기를 들었다. 중국에 있을 때는 돈이 없어도 유망한 청년소설가로 촉망받았던 그가 한국에 가니 그저 무직자가 되었다. 그래도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해서 오리고기 구이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집이 없어서 컨테이너박스에서 먹고 자면서 일했다고 한다. 원래는 짐을 수납하도록 만들어진 컨테이너박스인지라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덥고, 그래도 악착같이 일하며 소설창작도 했다. 그 이야기를 듣는데 비 오는 날 차갑게 철 지붕 위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 마음이 시리고 찡해 났다. 그런 환경 속에서도 붓을 놓지 않는 작가의 글은 어떤 글일까? 그 이야기에 감명받아 그의 소설들을 다시 찾아 읽었는데 그의 소설에는 조선족의 역사와 현실이 아주 잘 그려져 있었다.

특히 그의 중편소설 「내 마음의 영각소리」는 아버지 나 아들, 조선족 3세대가 고향마을의 쇠퇴와 이향(離鄕) 과정에서 겪는 갈등 고민을 담담하게 그렸는데 그 애틋하고도 아픈 감정이 내 마음에 응어리를 남겼다. 그 응어리를 풀고 싶은 갈망이 「내 마음의 영각소리」와 재일조선인작가 현월(玄月)의 『그늘의 집』(『蔭の棲みか』)을 비교하는 논문을 쓰는 데에까지 이르게 하였던 것 같다. 그렇게 쓴 논문을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하였는데 논문집에도 수록되어 조선족문학연구자료로 남았다. 농촌의 조선족 공동체가 해체되는 과정을 잘 그린 가치 있는 소설이었다.

우리 막내 시동생 부부도 한국에서 일하고 있다. 지금은 건축공사장에서 현장 팀 리더로 일하는 시동생이지만 언젠가 그런 이야기를 했다. 한여름 날 벽돌을 지고 아찔하게 높은 발판을 올라가는데 신발 안이 꿀쩍 꿀쩍할 정도로 땀이 차고, 눈이 아려 뜨기 어려울 정도로 땀이 흘러서 너무너무 힘겨웠었다고. 

동서는 그런 이야기를 했다. 제일 힘든 것은 비 오는 날 우산도 비옷도 없이 머리 위에 음식 쟁반을 이고 배달하는 일이었다고. 빗물이 그대로 주르륵주르륵 옷깃을 따라 목 안에 흘러 드는데 그것이 힘든 것보다 무서움이 더 컸다 한다. 1분이라도 시간을 절약하려고 자동차가 달리는 큰길을 그냥 그대로 건너야 하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비명횡사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 소리를 듣는데 위험을 무릅쓰고 무거운 쟁반을 이고 빗길을 달리는 동서의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듯, 생생한 이야기에 내 가슴이 다 서늘해 났다. 예쁘장하고 말소리도 잔잔하고 천상 여자인 동서에게 그렇게 당찬 모습이 있을 줄이야 …….

지금보다 나은 내일에 대한 희망이, 자식에게만은 빈곤을 물려주고 싶지 않은 그 갈망이 그들에게 힘든 현실을 인내해 나아가는 힘을 주었을 것이다.

그 희망과 갈망이 있어서 악착같이 일해 돈을 벌 수 있었고 그렇게 번 돈으로 중국에 노후를 보낼 집을 사 놓았고 아들을 대학원 공부까지 시켰다. 지금 조카는 한국무역회사에서 일하고 있고 결혼하여 귀여운 아들딸까지 나아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 

재한 조선족 1세가 공사장에서 식당에서 피땀으로 삶의 기반을 닦았다면 2세는 그 기반을 딛고 공부하여 얻은 지식을 무기로 중국에서 한국에서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다. 

처음에는 개개인으로 혼자서 일하던 그들이 이제는 커뮤니티를 이루었고 대림동이란 조선족타운을 이뤄냈다. 옛날에 연길이 ‘작은 서울’이라 불렸다면 대림동은 ‘작은 연길’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그곳은 변하였다. 바다를 사이 둔 서울 땅인데 고향 맛 냄새가 코끝에 스며들고 고향 말소리가 구수하게 귓전에 울린다.

재일조선족도 마찬가지이다. 그들 역시 바위 위의 소나무같이 주어진 환경이 풍요롭지 못하였다. 

우리 조카들은 친정 조카 시집 조카 할 것 없이 거의 모두가 일본에 와서 유학하였다. 생활비도 학비도 없이 빈 주먹으로 유학 온 그들은 모두 아르바이트 하면서 공부를 하였다.

우리 언니네 아들도 첫1년은 내가 학비를 내줬지만, 그 다음의 4년 동안은 낮에 공부하고 밤에는 새벽 2시까지 이자카야(식당)에서 일하면서 대학을 졸업했다. 주방에서 사발을 씻고 채소를 다듬고 후에는 간단한 요리까지 하면서 손이 불어터질 정도로 일하다가 학교 기숙사에 돌아가면 씻지도 못하고 쓰러져 자야 할 정도로 힘든 하루하루를 견뎌내야 했다. 

그러다가 한번은 얘가 한 달 아르바이트비 14만 엔을 잃어버리었다. 그 돈이 없으면 그 다음 달을 살아갈 수 없고 학비를 모을 수 없는데 이모에게 손 내밀기 미안하다고 나에게는 말도 안 하고 친구들에게서 조금씩 빌려 가며 겨우 그 한 달을 버티었다고 한다. 몇 달 후에 그 사실을 알고 전화를 했는데 “괜찮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하면서 웃어넘기는 것이었다. 지금도 그 생각하면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모른다. 말도 못 하고 외롭고 힘들었을 그 애를 생각하면 짠해서 마음 한쪽이 저릿하여 진다. 

그런 그 애가 지금은 상해에 있는 일본상사에서 일하면서 멋진 단독주택을 사고 예쁜 아내와 아들이랑 남부럽지 않게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고 있다. 몇 년 전에 내가 이사한다고 했더니 금방 백만 엔이라는 거금을 부쳐왔는데 덕분에 이사를 잘 할 수 있었다.

시누이네 둘째 아들도 일본에서 대학원을 다녔는데 갑자기 장학금이 끊어지는 바람에 생활비가 문제가 되었다. 낮이고 밤이고 실험실에서 실험하고 연구를 하지 않으면 논문을 쓸 수 없기에 주말 외에는 아르바이트 할 시간이 없었다. 아무리 식비를 절약한다 해도 집세에 생활비에, 아르바이트비 외에도 4만 엔은 더 있어야 한 달을 살 수 있는데 주말밖에 시간이 없으니 어떻게 해도 생활비가 모자랐다. 졸업은 해야 하고 돈은 없고 더는 방법이 없어 궁지에 빠지게 된 그 애는 할 수 없이 우리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원래도 다른 사람에게 신세 지는 것을 싫어하는 그 애가 우리에게 전화할 지경이면 그의 처지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제일 힘들던 1년을 그렇게 공부를 계속하였기에, 아르바이트와 공부에 지쳐 코피를 쏟으면서도 공부를 계속했기에, 졸업 후 영국계 회사에서 엔지니어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정직한 그 애가 그렇게 말리는데도 일한 지 1년 만에 우리가 원조했던 금액을 초월해서 부쳐왔을 때 고생 끝에 낙이라고 감개무량 해하던 일이 어제 일 같다. 지금은 1, 2층으로 된 단독주택에서 토끼 같은 아들 둘을 낳고 아내까지 네 식구가 재미있게 잘살고 있다.

우리 조카들을 보면 다 그렇게 힘들게 공부해서 지금은 대학교 교수, 의사, 건축가, 회사원으로 열심히들 살고 있다. 그들 모두가 자기 능력 것 몸과 마음 다해서 열심히 노력했기에 지금의 오늘이 있는 것이다. 고진감래苦盡甘來란 말의 참뜻을 그 애들을 보면서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재일본조선족들 중에는 우수한 사람들이 많다. 그들 모두가 혈혈단신 빈주먹으로 일본 땅에 와서, 도착한 이튿날부터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지만, 원망 대신 암울한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를 악물고 버티었기에 지금은 자기의 보금자리를 만들고 잘 살 수 있게 되었다.

부모들의 원조를 받으면서 별 고생 없이 공부한 일본 학생들에 비하면 그들의 유학 생활이 힘들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어려운 시련을 겪었기에 그들은 더 단단하게 더 씩씩하게 성장할 수 있었다. 

그들의 노력으로 이제는 ‘재일본조선족’ 이라는 개념이 일본 사회에 정착하게 되었고 재일본조선족 커뮤니티가 일본 사회와 경제의 무시할 수 없는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비옥한 땅에서 자란 나무는 쉽게 무성하게 자랄 수 있지만 바위 위에서도 자라는 나무처럼 단단하지 못하다. 바위 위에서 자란 나무는 생명력이 강해서 그 어떤 시련도 겪어낼 수 있는 것이다.

한 줌의 흙 속에서, 한 홉의 빗물을 마시면서도 꿋꿋이 자라나는 바위 위의 소나무, 그 소나무를 보면서 뿌듯함을 느낀다.

연변문학 2019년 6호 발표 

 

예陰翳와 빛
 


  “아름다움은 물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물체와 물체가 만들어내는 음예陰翳가 그리는 명암에 있다고 생각한다”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郎)의 수필집 『음예예찬(陰翳禮讚)』(1933)에 나오는 말이다. 이 책은 빛과 그림자의 관점으로부터 일본의 미학을 말한 작품으로서 해외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가 음예陰翳의 미美로 그려낸 측간예찬厠間禮讃은 아름다운 수필적묘사의 정석이라 할 만하다.
“몸채로부터 떨어져 푸른 잎의 냄새나 이끼 냄새가 나는 것 같은 정원의 나무그늘 아래에 지어져 있어, 복도를 지나가야 하지만, 그 어둑어둑한 광선 속에 웅크리고 앉아서 장지障子에 반사되어 비쳐 드는 희미한 빛을 받으면서 명상에 잠기거나 또는 창 밖 정원의 경치를 바라보는 기분은 형언할 수 없는 것이다.”

“특히 관동의 측간에는, 밑바닥에 좁고 긴 쓰레기를 쓸어 내는 창문이 붙어 있어서 처마끝이나 나뭇잎으로부터 떨어지는 물방울이 석등롱石燈籠지붕을 씻어주고 징검돌의 이끼를 적셔주며 흙에 스며들어가는 고즈넉한 소리를 한층 더 가까이 들을 수 있다.”
『음예예찬(陰翳禮讚)』(1933)에서

밀폐되고 환한 현대식 화장실과는 달리 자연과 이어져 하나의 풍경이 된 재래식 측간의 모습이다. 화장실을 이렇듯 시적으로 묘사한 사람은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郎)말고는 없을 것이다. 과연 문화훈장을 받은 문호 다운 필치이다. 그가 측간을 이렇게 묘사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의 전통미는 창호지를 통해서 비쳐 드는 희미한 광선이나, 어둠 속에서 가물거리는 촛불이 만들어내는 으스름한 음영 속에서만 신비하고 은은한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즉 어둠을 배경으로 으스름한 빛이 만들어내는 미美야 말로 일본전통예술의 진미眞美라고 본 것이다. 

확실히 일본 전통가구나 칠기漆器의 아름다움은 어둡고 희미한 불빛 아래에 놓여 졌을 때만이 진정으로 발휘되는 것이다. 따라서 다양한 어둠의 깊이를 가진 일본의 전통가옥 역시 그런 전통미학의 결실이라 볼 수 있다.

일본에 와서 첫 5년은 지은지 50년도 넘은 낡은 일본가옥에서 살았다. 큰 다다미방을 후스마襖(미닫이)로 여닫게 하고 남쪽 벽 전체는 나무 창살에 칸유리가 박힌 문으로 되었는데 처마가 길게 뻗어 나와서 대낮에도 햇볕이 잘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여름에도 늘 그늘이 있어서 에어컨을 안 켜도 집이 별로 안 더웠다. 

콘크리트 아파트 생활에 습관된 나인 지라 여러모로 불편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좋은 점도 있었던 것 같다. 저녁 녘이 되어 어둑어둑 땅거미가 지고 으스름한 석양빛이 새어 들어오면 후스마襖에 그려진 은빛 구름이 은은히 빛나기 시작한다. 낮에 볼 때는 무슨 그림인지 모호해서 눈에 뜨이지 않았는데 딱 그렇게 어둠 속에 불그스름한 석양빛이 비스듬히 비쳐 들어올 때에만 은빛 구름이 환영같이 떠올랐다. 

그때는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잘 느끼지 못했는데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참 운치韻致가 있는 정경이었다.

햇빛이 환한 낮에는 잘 보이지 않던 구름이 어둠 속에 비쳐 드는 희미한 빛 속에서 아름답게 살아나던 그 정경을 돌이켜 음미해보니 세상사도 그렇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홀연히 든다. 내 세상이 어둠에 쌓였을 때, 내 마음이 어둠 속에 침잠(沈潛)할 때 누군가 나에게 해주는 따뜻한 말 한마디, 나에게 주는 작은 도움은 하나의 빛이 되어 그 사람의 마음에 희망이란 ‘은빛 구름’을 띄어 주며 삶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내가 소학교를 다니던 때는 동란의 연대年代였다. 아버지는 반란파들에게 구금되고 그 때문에 나는 남들이 다 드는 ‘홍소병’에도 들어갈 수 없어서 학급에서도 고립되었다. 세상사람들이 다 나를 외면하던 그때 딱 한 번 나에게 기회를 주자고 나선 아이가 있었다. 5학년 때였는데 상급생들과 무슨 “마음나누기 활동” 같은 것을 하게 되어 우리 학급에서 여학생 2명 남학생 2명을 선발選拔하게 되었다. 여태껏 모든 공식적인 활동에 참여할 수 없었던 나는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 무심히 듣고 있었는데 갑자기 한 남학생이 손을 들더니 “엄정자를 추천합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뜻밖의 건의에 다들 당황했는지 침묵하는데 당시 반장이었던 그 애가 나는 공부도 잘하고 그러니 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득해서 결국 통과되고 말았다. 

올림픽대회에 나가는 것처럼 거창한 일도 아니고 단지 학교 일상 중의 한 모임에 참가하는 작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상의 권리조차 주어지지 않아서, 세상 어디를 둘러보아도 어둠일 뿐이어서, 어쩌면 영영 어둠 속에 갇힐지 모른다는 절망에 빠져 있던 나에게 그 애의 한마디는 희망을 주는 작은 빛이었다. 무심히 지나치는 사람들의 흐름 속에서 혼자 멈춰 서서 내 앞에 촛불을 켜준 아이, 세상을 거스르는 그 아이의 용기와 따뜻한 마음에 나는 처음으로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결국 한달 후에 우리 집이 3년 만에 풀려난 아버지를 따라서 시골에 내려가는 바람에 딱 한 번 밖에 그 모임에 참석하지 못했지만 그것은 나의 소학교시절의 가장 행복한 경험이었다. 

그후 그 애와 만난 적이 없어서 지금껏 감사했다는 인사 한마디 못했지만 가끔은 하얀 적삼에 군청색 윗옷을 입었던 그 애 모습이 기억의 저편에서 구름같이 떠오른다.

일본에서 첫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날, 물이 뚝뚝 떨어지는 기계 아래에서 막막하여 하는 나에게 “다이죠부데쓰카?(大丈夫ですか-괜찮아요?)”하고 말을 건넨 사람이 있다. 일본인 공장장이었는데 처음으로 일하는 내가 걱정되어 물어온 것이었다. 낯선 곳, 낯선 일에 마음이 극도로 약해져서 외롭게 흔들리는 순간에 들려온 걱정이 담긴 말 한마디, 그 한마디가 얼어 들던 내 마음을 그토록 따뜻하게 해줄 줄이야. 평상시라면 무심히 말하고 무심히 들릴 그 한마디 말이 그날만은 따뜻한 불빛같이 내 마음에 스며들었다. 그 한마디 말이 있어서 그날 나는 끝까지 일할 수 있었고 그 후에도 일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때 공장장은 이미 암에 걸려 치료 중이었고 그날도 병원에 갔다 오는 길에 잠깐 들른 것이었는데 어딘가 위태로운 내 모습을 보고 말을 건넨 것이었다. 그후 반년도 안 돼서 세상을 뜨고 말았지만 그가 나에게 건넨 그 한마디는 나의 마음속에 깊이 남아 지금도 가끔 머리 속에 울릴 때가 있다. 사람은 떠났지만 말은 남아 여전히 나를 위로해준다.

요즘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전세계가 팬데믹의 암흑기에 빠졌다. 도쿄는 물론 일본 전국에 긴급사태선언이 내리면서 많은 사람들이 밀폐된 공간에 갇혀 정상생활을 할 수 없게 되었다. SF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마스크가 없이는 밖에 나가지도 못하는 세상이 현실이 되었다. 세계 강국이라 자랑하던 미국에서도 제1차, 제2차, 제3차 세계대전을 다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오염된 세상에서 사람들은 질식을 느끼면서도 그래도 출구를 찾아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작년에 마스크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면서 약국에서도 마트에서도 마스크가 사라졌다.  1회용 마스크마저 씻어서 쓰지 않으면 안 되던 어느 날, 숙제 검사를 하는 내 앞에 천으로 된 하얀 마스크 한 장 놓고 가는 학생이 있었다. 쳐다보니 입만 방긋하며 “쓰세요.”하고는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평소 같으면 별것이 아닐 마스크 한 장, 하지만 마스크가 부족하던 그때 나에게는 그 마스크가 설중송탄雪中松炭이었다. 마스크도 휴지도 사라져버린 이상한 세상에서 마스크 한 장이라도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학생들은 어둠 속의 작은 촛불이었다. 마음속에 켜진 그 아른거리는 불빛 위로 익숙함에 여상如常해진 학생들의 얼굴이 새삼스레 예쁘게 아름답게 떠올랐다.

마스크가 일상이 되고 수업 중에도 마스크를 벗을 수 없어서 예쁜 화장이 가려지자 학생들은 화장을 그만두고 마스크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어느 날부터 마스크를 쓴 학생들의 얼굴이 봄꽃처럼 다채로운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연분홍색, 연두색, 노란색 …, 무늬도 체크무늬, 꽃무늬, 기하학도형 …, 그렇게 마스크가 패션이 되고 교실이 꽃밭이 되면서 다시 학생들의 얼굴이 밝아지었다.

오늘 감동적인 동영상 하나를 보았다. 이제 태어난 지 2달밖에 안 되는, 태생적으로 청각장애를 가진 아기가 보청기의 도움으로 난생처음 엄마의 소리를 듣는 모습을 담은 동영상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엄마의 소리를 들으며 자란 여느 아기들과 달리 줄곧 암흑 같은 무성無聲의 세계에서 살아오던 아기, 적막하던 아기의 세상에 난생 처음으로 들려오는 “사랑해!”하며 불러주는 엄마의 소리는 아기의 어둡던 세상을 뚫고 들어오는 하얀 빛이었고 적막을 깨는 종소리였을 것이다. 아직 빛이나 소리에 둔감한 때인 2달짜리 아기가 감동에 못 이겨 울먹이며 커다란 두 눈에 맑은 이슬을 맺는 그 모습은 햇빛 찬연한 하늘을 나는 천사의 그림보다도 아름다워서 나의 눈에도 저도 모르게 감동의 눈물이 맺혔다.

물론 탐미주의적 경향을 가졌던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郎)는 밝은 것만 추구하는 서양문화를 부정하고 은은한 음예陰翳의 미美를 가진 일본의 전통미를 찬양하기 위해서 『음예예찬(陰翳禮讚)』을 썼다. 하지만 인생이라는 다른 시각으로 음예陰翳의 미美를 본다면 우리는 그것이 가지는 또다른 아름다움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이 어둠과 빛으로 만들어지는 만큼 어둠은 우리의 삶에서 피할 수 없는 존재이며 그래서 때로는 인생이 어둠에 잠식되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 나무 창살 사이로 비쳐 드는 희미한 빛이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郎)에게 측간厠間의 미美를 느끼게 해준 것처럼 나의 어두운 세상에 누군가 작은 촛불을 켜준다면 음예陰翳속에서 세상은 또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줄 것이다. 가물가물 흔들리는 촛불에 비쳐 거뭇거뭇 칠기漆器의 아름다움이 살아나고 후스마襖의 은빛 구름이 은은히 떠오르는 것처럼.
“빛이 약하면 약한 대로 오히려 그 어둠에 침잠沈潛하여 그 안에서 자기 나름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음예陰翳의 미美를 안다면 우리는 힘든 삶에서도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어둠속에 비쳐 드는 작은 불빛, 그 불빛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이 인생의 희망이 될 수도 있다.

《장백산》, 2021-03 발표 

엄정자 프로필

연변대학 조문학부 졸업. 길림시조선족중학교 교원, 길림신문사 기자 역임, 현재 일본 ECC외국어학원에 재직 중. (사)재일본조선족작가협회 회장, 동북아신문 일본지사 대표, 연변작가협회 이사, 일본조선학회 회원. 수필집 『금 밖에 나가기』, 평론집 『조선민족의 디아스포라와 새로운 엑소더스』. 제9회 『도라지』 문학상 수필부문 대상, 제10호 『동포문학』 평론 대상, 제40회『연변문학』 평론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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