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술에 깃든 에피소드
2. 가을 들녘
3. 버려진 액자
4. 청자씨

 

술에 깃든 에피소드

 

술이 좋긴 좋은가 보다. 7월의 태양이 한창 광기를 부리는 한낮, 지상 전체 생물체들이 자작나무 타는 겻불내를 훅훅 토하고 있다. 이 폭염속에서 낮술을 얼마나 들이켰는지 신호등을 건너는 사람들 틈 사이로 티셔츠를 젖무덤까지 치켜 올린 저 나그네들을 보는 내 눈이 다 따갑다. 만삭의 산모처럼 비지배를 볼록 내밀고 어깨동무를 하고 비틀대는 모습이 누가 봐도 가관이 아니다. 취기에 달구어진 얼굴에 뙤약볕까지 더해져 지지벌게서 지향 없이 떠드는 모습이 정말로 기가 차다. 사내들이 하 벌린 입에서 풍겨져 나오는 술 내음이 어찌나 진동을 하는지 내 몸도 알콜이 퍼지는 듯 나른해 난다. 그러고 보면 나도 저 나그네들 못지 않게 크고 작은 술에 깃든 에피소드들이 조롱박처럼 올망졸망 달려있다.

내 기억 속에는 술 하면 아버지를 떠올리게 된다. 아버지는 술을 마셨다 하면 폭음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듯했다. 술을 좋아하는 아버지를 위해 엄마는 늘 술통에 술을 채워 놓고 아랫목 가장자리에는 언제나 기포가 퐁퐁 솟아올라 시큼한 냄새가 방안을 가득 채우는 탁주 단지가 놓여 있었다. 술 좋아하는 사람 치고 나쁜 사람 없다고 술 향기처럼 우리 집에는 인품도 그만큼 돈독했다. 그때 우리 마을에는 홀로 사는 돼지치기 할머니가 계셨다. 허리가 곱사등처럼 굽은 할머니를 우리는 꼬부랑 할머니라고 불렀다. 할머니는 돼지풀을 뜯고 올 때면 꼭 우리 집에 들리셨다. 땀투성이가 된 할머니가 정주문에 들어서기 바쁘게 엄마는 탁주를 휘휘 저어서 한 사발 가득 담아 드렸다. 할머니는 단숨에 탁주 한 사발 쭉 마시고는 성이 차지 않아 버릇처럼 안주는 필요 없으니 소주 한 모금 더 따라주면 안되겠나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특히 주말이면 우리 집에는 늘 술상이 벌어지고 엄마는 술을 마시면 인사불성이 되는 아버지 땜에 괴로움을 당하면서도 매번 술 안주를 알뜰히 차려 아버지의 체면을 살려주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생활이 어려웠던 그 시절 세월의 소용돌이에 찌든 삶에 술 한잔의 향수가 얼마나 감미로웠는지 알 것 같다.

내가 처음 술을 접했던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을 참을 수 없다. 이성에 실 눈을 뜨고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쿵쾅이는 가슴을 헤집고 질풍노도 하던 18세의 어느 날이었다. 아버지의 술을 몰래 훔쳐서 동네 빈집을 찾아 또래 남여 친구들이 혼합해서 김치 조각에 그 독한 소주를 거들을 내고 말았으니 말이다. 어쩌면 그때 그 술에 무슨 불이 달렸는지 목이 타 들어 가고 다리 맥이 풀려서 한 구들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꼬꾸라져 신음들을 했다. 우리는 그날 선생이셨던 우리 아버지에게 혼방을 먹고 말았다. 물론 나에게는 밤에 바깥 출입 금지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그때는 풋사랑이 한창 알밤처럼 탁, , 튀어지는 때 인지라 저녁이면 짙은 화장을 하고 입술을 빨갛게 바르고 친구들이 오구작작 모여 있는 게 그렇게도 가슴이 설레고 좋았는지 모른다. 아버지가 나를 감시할수록 울 바자 밖에서 나에게 암시를 보내는 휘파람 소리에 애간장이 타서 안달이였다. 아마도 그때 그 시절에 우리들 만이 가질 수 있었던 청춘의 낭만이었지 싶다.

갓 결혼을 하고 3.8 부녀절을 처음으로 맞이하던 날, 마을에서 소, 돼지를 잡아서 또래별로 나누어 주었다. 그 시절에는 지금처럼 술 종류별로 사용되는 술잔도 없었다. 그냥 투박한 사발에 소주를 부어서 한복을 알록달록 입고 부모님들의 포위망에서 해방한 20대의 자유를 만끽하며 부어라 마셔라 마음껏 외쳤다. 음악 반주가 없어도 주방의 국자, 주걱, 바가지, 초롱이며, 마구 손에 들고 우리의 오락을 불 살랐다. 흥이 고도로 올라 주체를 할 수 없어 큰 또래들을 찾아가서 술을 얻어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고 돌아오는 길에 술이 취해서 새내기 새댁이란 굴레망을 이탈하고 길바닥에 자빠져 치마자락을 마구 날렸던 추억들도 있다. 어른들이 늘 입에 담던 머리통에 피도 안 마른 것이라는 말처럼 미스에서 선 하나를 넘어 갓 어른으로 탈바꿈하는 길에는 채 여물지도 않은 머리통에 많은 세상 시련들을 뜨이기 위해 머리 뚜껑을 돌처럼 단단히 굳혀야 한다는 걸 그때는 왜 몰랐는지?

가난에 말라가던 30대 초반에는 생활에 떠밀려 품속의 딸을 떼어놓고 국경을 넘어 한국행을 택하게 될 줄이야. 식당에서 홀서빙을 하며 손님들이 따라주는 소맥 한 잔 쪽 소리 나게 마시고 나서 찔러주는 돈 깍지가 딸의 공주치마로 보였고 사탕 과자로 보였다. 고된 식당일에 하루의 정력을 다 소모하고 딱히 몸을 편히 뉘일자리도 없이 내 전부의 살림살이를 쑤셔 넣은 오렌지색 쓰레기 봉투를 어깨에 둘러메고 불이 깜박이는 길거리의 포장 마차에 들리던 그 날, 순대 내장에 소주잔을 비우고 있는 나에게 따끈한 오뎅 국물을 연신 퍼주는 경상도 아줌마에게 불법체류의 서러움도, 고향에 두고 온 딸의 짙은 그리움도 개의치 않고 타령 가닥을 풀어 놓았다. “아이고나 세상에 어미 된 그 마음 오죽하겠나 퍽퍽 울어라 마. 이 밤중에 바람에도 날라갈 몸을 해 같고 어디 갈기고. 행여라도 길가서 불량배를 만나면 큰일 난다. 우리집에 마침 2층 방 하나 있은 게 보증금 생각 말고 오늘부터 그 방서 편하게 살면 된다 아이가아지매의 말에 나는 친정 엄마라도 만난 듯 눈물 콧물 쥐어짜며 오랜만에 펑펑 속시원히 울었다. 그날부터 나는 누군가의 든든한 뒷심을 받으며 한국생활에 적응해 갔다.

한국에서 30대를 흘려 놓고 고향에서 40대를 풀어 놓을 때가 아마도 내 인생의 최악의 전환기를 맞은 때였을 것이다. 쓰나미가 쓸고 간 모래더미 진흙창 길에 여자가 아닌 모성만이 삶을 간간히 연명하고 있는 내가 있었다. 짙은 푸르름을 연출할 풋풋한 나이에 마음은 가뭄에 갈라진 강바닥 같고 얼굴은 건조대에 메 달린 담배 잎처럼 떡잎이 져 있었다. 그때 나의 삶에 혼술이 살며시 등장했다. 삼라만상이 깊이 잠든 캄캄한 밤, 작은 내 몸을 누르고 있는 말 만한 사춘기 큰딸의 육중한 다리를 겨우 옮겨 놓고 젖가슴에 파고드는 막내딸의 고사리 손을 떼어놓고 살금살금 애인과 키스를 하듯 주방에서 술잔을 감빨아 댔다. 괘씸한 달빛이 옛날 구구다리 실마리들까지 끌고 와 나이트 클럽의 네온불처럼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몽글몽글 취기가 오르면 감정기복을 억제 할길 없어 울고 웃고 정신줄 마저 흘려버린 채 술 광기를 부렸다. 그때 큰딸의 부축을 받아 침대에 나무 몽둥이 마냥 쿵 하고 자빠지는 나의 귀가에엄마, 우리는 어쩌라고 이르는 거야? 엄마 나 내일 시험이란 말이야 으내 옷을 마구 벗기며 흐느끼는 큰딸의 경악소리에 섞여 꼬맹이 막내딸이언니 엄마가 마귀같이 무서워 이…”하며 달달 떨면서 엄마가 아닌 언니를 부르며 울어대는 애처로운 소리가 내 정각을 찌르고 있었다. 그날부터 술로 힘든 삶을 도피하려는 망상에서 종지부를 찍고 더도 말고 덜도 아닌 딱 알 량 빤’ (二两半 ) 이란 호칭을 달갑게 받아들였다.

알 량 빤이라면 두 냥 반이라 중국말로 해석하면 조금은 부족하다는 뜻으로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알 량 빤이 맞이하는 50대는 말 그대로 하늘의 뜻을 알 수 있는 지천명에 녹아들기도 했다. 돌아보면 정말 아슬아슬하게 넘고 달리던 내 뒤한길도 이젠 반은 안개속으로 사라져 버린 듯하다. 인생사 모두가 다 거기에서 거기라고 누구인들 세상을 사는 동안 힘들고 지친 날들을 견디고 상처받으면서 삶을 익혀가지 않았겠는 가. 그 옛날 돼지치기 할머니와 우리 아버지의 삶이나 강산이 몇 갑절 변한 현제의 저 취중 나그네들의 삶이나 모두가 살아가기 위한 몸부림 일 지도 모른다. 때로는 좀 서글퍼 질 때도 있지만 지나친 자존보다는 기세 당당한 현대 인파들 속에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조금 모자라게 사는 지금이 너무 좋다. 삭막하고 복잡한 세월에 칠뜨기 푼수 아낙네면 좀 어때. 질퍽한 흙 길도 긍정적으로 기꺼이 박차고 나갈 수 있는 것은 바로 술 안 마시고도 취한 척, 알고도 모르는 척, 알딸딸한 이 알 량 빤인생이 뒷받침해 주는 덕분이라고 믿는다.

갑자기 띠 링위쳇에 새 친구 추가가 들어왔다. 요즘은 위쳇으로 사업 홍보나 물건을 파는 업체들이 너무 많은 형세라 추가신청 수락을 망설이기도 한다. 그런데 오늘 새 친구 추가는 나로 하여금 조금은 당황하기도 했다. “알 량 빤, 나 좀 수락 하소서라는 호출이었다. ‘~, 이게 누구이지하는 의문에 나는 그분의 프로필사진을 확대해봤다. 얼굴이 좀 투박하고 권투 선수처럼 생긴 중년 나그네가 혼자서 양꼬치를 구우면서 소주를 들이켜고 있는 사진이었다. 닉네임도 무슨 늑대로 되여 있었다. 그러고 보면 알 량 빤이란 별명이 나를 동반한지도 수년이 흐른 것처럼 이 늑대라는 나그네도 초면에 나에게 인사말 한마디 없이 알 량 빤이란 별명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담는 걸 보면 어딘가 모르게 야릇한 생각이 갈마들며 느끼한 늑대라는 남자를 수락했다. ‘알 량 빤에 익숙한 내 인생에 늑대면 어떻고 사자면 어떻겠는가? 갑자기 날아오는 공도 요리조리 슬쩍 피하는 요령이 있으니 인생을 주물러 볼 만도 하는 게 아닌가?

그러고 보면 술이 내 인생과 함께 반 꼭지는 잘 돌았지만 정작 술에 대해서 술 문화에 대해서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 그냥 그때 그때 기분에 따라 마시는 술 일 따름이고 다른 사람 앞에서 취해서는 안된다는 자의식 때문에 마음의 탕개를 풀어놓고 마실 수 없다 보니 정확히 내 주량이 얼마인지 모르고 딱 알 량 빤에서 마무리하지 않았나 싶다. 워낙 체질적으로 탄산 음료는 딸꾹질 때문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도 있겠지만 소주가 안성 맞춤 할 때의 그 알딸딸한 기분이야말로 환상 그 이상의 감미로움을 준다.

혈기 왕성하던 사춘기 별빛 추억에서, 여린 몸이 어른으로 굳혀야 했던 그 버거웠던 날들도, 통통 튀는 공처럼 부질없는 생각들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불혹도 잘 다스려, 세상이 아무리 넓고 사람들이 아무리 천 척 만 척이라 해도 내가 가야 할 길은 요 모양 요 지경이라는 걸 알 수 있는 보송보송한 지천명에 이르기까지, 술은 내 몸에서 알 량 빤의 농도로 내 삶을 감흥으로 젖게 한다. 햇빛에 취했나, 삶에 취했나, 아니면 저 나그네들의 취중에 흠뻑 젖은 것인지, 여하튼 내 몸은 붕 들떠 구름층을 걷는 기분이다. 알 량 빤의 주기처럼 알딸딸하게 기분 좋은 날이다.

 


 

가을 들녘

 

입추가 지난 바람이 옷깃을 스민다. 계절은 입동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가을이 깊어 갈수록 청정 떠있는 하늘에 그리움이 잔뜩 담긴 엽서한장 띄워 보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조락의 단풍잎 하나가 내 머리위에 살폿이 내려 앉더니 이내 발끝에 닿으면서 무엇인가를 속삭이고 있다. 가을은 사계절 중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라고 하지만 술렁이며 부는 바람은 채우지 못한 어떤 욕망 같은 것들이 불쑥불쑥 고개를 들며 마음을 한없이 공허함으로 몰고 가기도 한다. 이 생각 저 생각에 사로잡혀 걷고 있는 나는 하나의 실 풍경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매일 퇴근길에 만나게 되는 아름다운 풍경, 고향집 온돌방 인양 약국 앞 시멘트 계단 층계에 동네 어머님들이 모여 앉아 삶의 애환들을 꺼내 구술에 한 올 한 올 꿰는 모습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세상에서 가장 성스러운 저 모습에 빠져 들 때면 나는 한 여자로 태어나 딸들의 엄마로 살아 갈수 있다는 게 정말 행복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자나 깨나 자식걱정 주고 또 주어도 내어 줄 것만 남는 위대한 모정, 누른 떡잎처럼 수심이 자글자글한 주름진 얼굴로 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르게 새어 나오는 목소리. 나를 보면 유치원생들이 선생님 앞에서 서로 앞다투어 말을 걸어오듯이 목청을 높이고 있다.

돌이켜보면 어머님들과 나와의 인연도 강산이 변한다는 10년 세월 하고도 반 바퀴가 더 돌아가고 있다. 자영업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고 조출한 가게였지만 내가 미용실을 오픈하든 날 어머님들이 오셔서 내 손을 잡아 주시며 그렇게 반가워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히 떠오른다. 하고싶은 머리 스타일을 우리말로 전할 수 있어 너무 좋다던 어머님들, 그때부터 우리 미용실은 어머님들이 오며 가며 들려 담소를 나누는 만남의 장이기도 했다.

이란댁, 탕원댁, 목릉댁, 7층댁, 가방 끈, 노랑머리, 담배쟁이, 그 외에도 나는 많고 많은 호칭들을 익혀가면서 위대한 모성의 세계로 자유로이 여행을 하게 되였다. 내가 어릴 적 마을에서 할머니들이 절라도댁, 평안도 댁, 경상도 댁, 함경도 댁 하며 부르던 호칭을 나의 미용에서 다시 듣게 될 줄이야, 거기에 나에게 개업 첫날부터 어머님들이 불러주던 파마쟁이 라는 호칭까지 모두가 그렇게 정다울 수가 없었다.

내가 처음 미용실을 할 때만 해도 어머님들은 참 곱고 젊었다. 봄이면 아들 딸이 보낸 화사한 의상을 입고 가게에 들리어 머리를 곱게 다듬고 삼삼오오 모여 꽃구경도 가고 문구나 탁구를 치러 가기도 하고 부채춤을 추러 다니기도 하셨다. 또한 이 집 저 집 다니며 마작이나 화투놀이를 하고 떡을 빚어 추렴을 하기도 하며 정말로 노년을 즐겁게 보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년 뒤에는 스마트폰이 유행되자 멀리 있는 자식들의 얼굴을 보려고 버스를 타고 조선족 문화관까지 가서 무료로 스마트폰 사용법을 배우러 다니기까지 하던 멋진 우리 어머님들이다.

한국생활 8년만에 할빈이란 도시에 발을 들여 놓았을 때는 모든 것이 낯설고 두렵기만 했다. 40대의 풋풋한 나이에 세 살 밖에 안된 병아리 같은 작은딸을 데리고 한창 사춘기를 겪는 큰딸의 반항에 맞서며 일을 한다는 건 정말 몸도 마음도 지치어만 갔다. 그때 내게 제일 위로가 되었던 건 어머님들의 살뜰한 관심과 보살핌이었다. 더 나은 삶을 위해 기꺼이 손군들을 맡아 보면서 멀리 해외로 연해도시로 자식들을 등 떠밀어 보내신 우리 어머님들, 그 자식들 그리운 마음을 내게 쏟아 붙는다는 걸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봄이면 파란 봄 나물을 캐어 깨끗이 장만까지 해서 가져오시고 추석이면 송편을 김장철이면 빨갛게 갓 옷을 입힌 김장들을 동짓날이면 팥죽에 동치미까지, 나는 정말 어머님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집에 인터넷이 잘 안 되어도 수도 꼭지가 고장나거나 키를 잃어버려도 심지어 물세, 전기세 미납 딱지가 날아와도 은행에서 자식들이 부쳐온 돈을 찾을 때도 나에게 먼저 물어보아야 시름을 놓던 우리 어머님들, 파마머리 곱게 하고 거울 앞에서 소녀처럼 웃음짓던 어머님들, 때가 되어 국수 한 그릇이라도 끓여드리면 그렇게 행복해하던 우리 어머님들, 가끔씩 어버이 날이면 단골 어머님들을 불러 식당에서 음식 대접을 하면 맥주 한 잔씩 드시고 아리랑을 가락높이 부르던 귀여운 우리 어머님들이였다.

내가 사는 동네는 할빈시 조선족 제1중학교부근이라 아이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방방곳곳에서 모여온 조선족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곳 이기도 하다. 보통 젊은 사람들은 연해도시로 해외로 돈벌이를 나가고 나이 드신 분들이 남아서 손군들을 거두고 있는 집이 대부분이다. 민들레 홀씨처럼 어디에서 뿌리를 내리든 하나가 되는 위대한 우리 민족, 서로 베풀고 나누기를 좋아하는 아름다운 우리의 문화, 나는 미용실에 오는 어머님들을 보면서 정말 감동으로 하루를 시작해서 감회로 마무리하는 하루를 보낸 듯하다. 아마도 우리 어머님들과의 소통이 내게는 더 없는 인생 공부였는지도 모른다.

몇 해전부터 파마약에 심한 알러지 반응이 일면서 부득이 미용실을 더 한다는 건 무리였다. 미용실을 접으며 나는 한국에서 직접 수입한 헤어 로션이며 염색약들을 어머님들께 다 나누어 주었다. 이사하던 날 혹시 어머님들이 오셔서 짐을 나르느라 힘을 뺄 가봐 나는 아예 이른 새벽에 이삿짐 차를 불러 짐을 다 옮겼다. 샷 다운된 미용실 앞에서 마음이 너무 허전해서 앉았다가 온다던 우리 어머님들의 우묵한 그 눈빛을 보면서 마음이 짠했다. 어머님들의 손에 휴지, 세제, 식용유에 과일까지 들고 오신 걸 보는 순간 정말 감격에 목이 메었다.

자식들 땀 흘려 벌어주는 돈을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채소 이삭을 캐러 다니는 어머님들, 아픈 허리 다리에 쑥 뜸질이나 고약을 태질하면서도 병원가기조차 주저하는 우리 어머님들, 내게는 이렇게 제일 비싸고 질 좋은 것만 사 오시고 젊은 사람이 애 잘 키우고 열심히 살아 고맙다고 내 등까지 다독여 주시던 어머님들의 고운 그 마음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특히 이란 댁은 저의 미용실을 오픈하던 날 첫 손님이다. 파란 의상에 연분홍 스카프를 두르고 베이지색 모자까지 쓰고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들어오던 어머님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산뜻한 감을 주었다. 한번은 길에서 1원자리 무청을 사드린 적이 있다. 우리의 대화를 알아듣지 못하는 장사군이 우리를 번갈아 보더니 딸인가고 묻는 것 이였다. 그때 어머님은 서툰 한족말로 양 맞소. 내 양 딸이요. 우리 딸이 대단히 좋소하며 두 엄지까지 흔들어 주기까지 하였다. 그 이후로 이란 어머님과 나는 1원이 맺어준 인연이라 할까 자연히 가까워지게 되였다. 매일 가게에 들리면 바닥의 머리기를 쓸어주고 파마 수건을 세탁기에 돌리고 통원차에서 내리는 아이를 마중해주고 때로는 저녁밥까지 앉혀 놓기도 하는 이란 댁은 엄마의 사랑이 고픈 나에게 친정 엄마와 같은 고마운 존재이기도 한 분이다.

미용실을 접고 가사도우미로 남의 집에서 일을 하는 나는 가끔 뭔가 모르게 가슴이 답답하고 울적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이곳에 언제나 나를 반겨주는 어머님들이 있어 축 처져 있던 몸도 마음도 새털처럼 가벼워 지군 한다. 그렇게 내게 힘을 실어주던 어머님들이 오늘은 가을 바람에 마음들이 이리저리 흩날리고 있나 보다. 이제 곧 겨울 방학이면 한국에 있는 자식들 보러 간다며 빨간 고추 타래를 창살에 주렁주렁 메어 달고 고추 떡에 여러가지 채소 말랭이에 절임들을 한다면서 분주히 돌아 치던 어머님들이었다. 그러던 어머님들은 자식들이 있는 한국에서 코로나가 말썽을 피워 걱정들을 하고 있다. 정말이지 코로나가 언제 어디서 나타나 바이러스를 감염 시킬지 모르는 공포와 불안 땜에 누구라도 마음이 편치 않은 노릇이다. 애들 마냥 우리 아들이 한국에 새 집을 샀다오” “우리 딸이 중국 식당을 한다네” “우리 손주가 이번에 증손주를 보았소” “우리 손녀가 중국말 가르치는 선생이오자랑거리가 춤사위를 보여주던 우리 어머님들이 오늘은 수심에 찬 얼굴로 햇살에 자글자글 골이 페이기까지 한다. 나는 차마 무슨 말로 어머님들을 위로했으면 좋을지 합당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그냥 얼굴을 찡그리고 말았다.

요즘은 정책이 좋아 더이상 이산의 아픔에서 허덕이지 않고 한국을 자유로이 오갈 수 있어 너무 좋다.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 이별 앞에서 늘 눈물 바다였던 공항에서도 웃음이 가득 찬 얼굴로 상봉과 배웅의 즐거운 장이 되였다. 나도 큰딸이 결혼하고 할머니가 되고부터 방학하기 바쁘게 작은 딸과 함께 한국으로 외손녀 보러 가군 했다. 이번 겨울 방학엔 갈수 있는 가망이 보이지 않아 안타깝기만 하다. 큰딸도 부쩍 엄마가 보고싶다고 한다. 동영상으로 한창 말을 배우는 외손녀가 채인이 할머니가 보고싶어요. 우리 할머니가 최고라고 엄지를 척 내밀때면 너무 안고 싶어 눈물이 찔끔 나기도 한다.

얼마전부터 막혔던 뱃길 하늘길이 서서히 열리긴 하지만 비자 수속이 엄청 복잡한데다 하늘을 찌르는 항공권에 호텔격리 자부담에 경제적인 손실도 만만치 않다. 그보다 혹시나 바이러스에 감염될까 하는 의구심이 우리의 발길을 더 잡는 건 아닌가 싶다.

살같이 흘러간 세월속에서 찬 스리, 비바람에 밀려가면서도 진정 원숙함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우리 어머님들, 강한 것이 어머니라면 약한 것이 여자가 아닌가 싶다. 15년이란 세월동안 쭉 지켜온 이 꽃밭속에 듬성듬성 비어 있는 꽃의 흔적들이 내 마음을 저민다.

혼자서 손녀를 공부시키느라 성격마저 과격해 버렸던 욕쟁이 어머님도, 한국 떠난 남편의 행방을 몰라 어린 자식 넷을 줄레줄레 데리고 삶에 지치다 못해 귀까지 절벽이 된 귀 먹구댁도, 마흔이 넘은 아들이 수시로 말썽을 피우고 착오를 범해 뒷수습만 하다 돌아가신 통화 댁도 그 밖에도 몇몇 어머님들이 한줌의 꽃씨가 되여 어디인가 훨훨 날아가버렸다.

내 평생에 제일 잘한 것 중의 하나라면 말기 암 환자인 설안댁의 파마를 해준 것이다. 워낙 겁이 많은 나는 밤잠을 설칠만큼 두려웠던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나는 아침 일찍 토종닭까지 삶아 들고 파마 기구들을 챙겨 설안댁을 찾아 갔다. 동생분과 아들 내외가 출근하고 나는 환자분이랑 둘만 남았다. “어떻게 해 드릴가요하는 나의 말에 그는 파마쟁이 나 머리 최고로 곱게 해줘. 봄이라 이제 꽃들도 필 텐데 머리 이쁘게 하고 꽃 구경가게, 무엇하고 살았는지 여태 꽃구경 한번 제대로 못하고 살았네. 으흐흐하며 울음조차 겨우 새어 나오던 어머님, 앉은 자세도 한쪽으로 자꾸 기울어지고 있는 어머님을 방석으로 고정시켜 파마를 말아 놓고 나는 닭곰을 조금 찢어서 드렸다. 한 모금 넘기는 둥 마는 둥 하던 어머님이 파마쟁이는 이담에 복받을 거야. 지금은 힘들어도 마음이 착해서 딸들이 앞으로 꼭 잘 될 것이니 하나도 걱정할 것 없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던 어머님, 워낙 깔끔한 성향의 어머님이라 나는 헤어 젤로 머리를 고정시키고 눈썹까지 깔끔하게 정리해 주었다. 그날 문을 나서는 나에게 애 먹거리 사주라고 돈 백 원을 던져주며 내가 안 받을 가봐 문을 닫아버리던 어머님, 지금은 저 하늘의 한송이 구름 꽃이 되시었다.

손군들이 대학시험을 치고도 코로나가 길을 막아 자식들이 못 오는 날이면 어디로 가야 할지 밤잠조차 설친다는 어머님들, 요즘은 한 하늘아래 같은 우주공간에 살면서도 마음대로 오 갈수 없는 안타까운 사연들이 우리 주변에도 비일 비제이다.

한치 앞도 감안할 수 없는 이 칠흑의 날들을 나이 먹고 기운 빠져 마음이 한없이 비어 있는 어머님들은 얼마나 두렵고 불안 할까 싶다. 이팔청춘 꽃다운 나이에 한 남자의 아내로 아이들의 엄마로 한 생을 살아온 우리 어머님들, 지금은 저 가로수 가지 끝에서 조락의 잎새처럼 가벼운 웃음을 짓고 있다.

부모님 모시고 자식들 키우면서 밭 갈고 농사 지으며 오순도순 살아간다면 더이상 행복할 나위가 없겠지만 초 고속으로 발전하는 경제시대에 그냥 고정적인 삶에만 머물러 있을 수도 없다. 젊은 세대들은 더 넓은 세계로 도전하는 것도 하나의 삶의 방식이 아닐 가 싶다. 혹시라도 이별이 영원한 아픔으로 남는다 해도 자식들은 자신의 삶을 영위하지 않을 수 없다. 뼛속 깊은 그리움과 뼛속 깊은 고독을 감내하면서도 자식들의 앞날이 창창 하기만을 기원하는 건 이 세상 모든 어머님들의 다 같은 마음일 것이다.

이웃 사촌이란 말이 있다. 저 멀리서 달래 어머님이 콩나물 댁과 새 각시 댁의 부축에 한쪽으로 쏠리는 몸을 지탱하며 꽃을 찾아오는 벌 나비인양 한들한들 이쪽으로 오고 있다. ~ 저 아름다운 풍경, 멀리 있는 자식들 걱정 들려고 서로 다독이고 서로 부축하며 우리 민족의 선량한 미풍을 이어가는 우리 동네 어머님들이야 말로 가을 들녘에 피어나는 국화꽃이 아닐 가 싶다. 우리 어머님들 이별은 잠시일 것입니다. 평화로운 세상은 우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습니다. 자식 들과의 뜨거운 상봉의 그날을 위해 다 함께 차차차 부르며 만수무강 하시기 바랍니다.

 


 

버려진 액자

 

 

비가 내린다. 뿌옇게 가려진 하늘에서 봄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따끈한 커피한잔 들고 창가로 다가섰다. 닫혀진 창문 사이로 비에 젖은 대지의 구수한 흙 내음이 내 폐부를 스치고 탐탁한 집안의 구석구석을 헤집고 들어왔다. 저 멀리 마주 보이는 산자락엔 연두빛 파란 풀들의 고갯짓이 단비에 젖어 앙증스레 가물거리는 것만 같았다.

 

이런 날은 밥을 먹고도 왠지 속이 비어 있는 느낌이 든다. 입은 궁금한데 딱히 먹을 게 떠오르지 않았다. 갑자기 어려서 엄마가 해주던 부침개가 먹고 싶어 졌다. 장바구니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겨울을 지나 내리는 봄비여서 그런지 우산 속으로 스치는 빗줄기가 내 볼에 닿을 때마다 차갑게 느껴진다.

 

몸을 움츠리고 걷고 있던 나는 쓰레기 수거함 옆에 대자로 세워진 큰 액자에 눈이 갔다. 화려한 벚꽃을 배경으로 마주선 남자와 여자, 용광로처럼 달아오른 두 눈빛은 사랑이 톡톡 튕겨 나오는 것만 같았다. 흰 셔츠에 나비넥타이를 메고 정장을 받혀 입은 신랑의 두 팔이 하얀 드레스를 길게 드리운 신부의 날씬한 허리를 감싸 안고 있었다. 자석처럼 꼭 껴안은 밀착된 두 몸뚱이 사이로 바람마저 세어들 틈 없이 사랑에 퐁당 빠진 듯 행복감이 묻어 있었다. 이렇게 애틋한 한 쌍의 원앙이 어떠한 피치 못할 사연이 있어 흔한 비닐 하나 씌워지지 않은 채 사람들이 오가는 길목 쓰레기장에 버려진 것일까?

 

사랑이란 참 미묘한 밀당의 관계가 아닐까 싶다. 이 액자 속의 신혼 부부도 웨딩 촬영을 하는 순간만큼은 얼마나 설레고 격동 되었을까? 서로에 대한 믿음과 신뢰, 앞으로의 희망으로 가슴은 얼마나 쿵쿵 뛰고 벅차 올랐는지 모른다. 가족과 친지들의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으며 결혼식장에 들어갈 때는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결혼 생활에 어떤 피치 못할 사연이 있어 그 예쁜 추억들마저 짐처럼 무거웠을까? 그처럼 행복했던 순간들을 한 장의 종이 값보다도 못하게 기억 속으로부터 지우고 싶은 웨딩 사진이였나 보다.

 

결혼 생활은 두 사람이 서로 하나가 되어 사랑하고 보듬으며 상대방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면서 맞추어 가는 것이라고 본다. 각자 다른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이 만나 함께 생활한다는 게 참 쉬운 일은 아니다. 가정이란 울안에서 한 가족을 만들어 가는 것은 어렵고 긴 여정이다. 현실에 직면하다 보면 결혼 전 낭만으로 부풀던 사랑은 점차 식어가고 허탈함이 샘물처럼 새어 들기도 하는 것이 결혼생활이 아닐까 싶다.

 

기승을 부리던 겨울 바람도 숨이 턱 막히던 미세먼지도 내리는 봄비 속에 조용히 몸을 감추었건만 액자의 두 사람이 바라보는 눈빛 속에는 알 수 없는 애절함과 간절함만이 무언가를 말하는 듯 하다.

 

뽀얀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하더니 난데없이 천둥소리가 요란하다. 빗줄기가 점점 세차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는 액자의 화사한 꽃잎들을 후려치고 여인의 볼을 타고 눈물처럼 굵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늘도 이 액자 속의 뜨거운 사랑이 안타까워 흐느껴 우나 보다. 내 마음에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늘 봄비 내리는 날 부침개에 막걸리 한잔으로 이 허탈한 마음을 달래 보련다.

 

 


 

청자씨

 

금년에 80고령의 우리 고모 청자씨. 60이 청춘이라면 우리 고모에게는 늘 시들지 않는 자부심과 신심으로 세월과 달리기를 한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스마트폰으로 건강정보, 드라마, 연예오락프로, 생활상식까지 다 들여다보며 노년의 삶을 윤택나게 조명해가는 우리 고모님. 자신이 좋아하는 영상이나 글, 지인들의 모멘트 하나에도 꼭 댓글을 알뜰히 적어주는 우리 고모야말로 빠른 시세에 세련된 청자씨가 아닐 까 싶습니다.

숙아, 이렇게 하면 간편하면서도 피부에 탄력을 준다고 하니 너도 한번 해봐, 이렇게 건강차를 만들어 마시면 심혈관에 좋다고 하네, 숙아 이 가수가 노래도 잘 하고 인물도 훤해서 참 귀엽다. 숙아 이런 식으로 요리 한번 해봐라, 숙아 요즘 핸드폰에서 이런 수법으로 사기치는 집단이 있다고 하니 조심해라.” 숙아~숙아 하면서 눈꽃이 날려도, 나무에 앉은 까치를 보아도, 곱게 물든 단풍잎을 보아도 내게 보내주는 우리 고모 청자씨. 빠른 세월에도 과감한 열정과 호기심을 쏟아붓는 우리 고모님을 누가 80세 노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침에 눈을 뜨면 고모님이 보내오는 깜찍한 이모티콘이 나를 웃게 하고 삶의 현장에서 지치고 힘든 세포들이 시들어 갈때마다 어김없이 고모님이 빵빵 울려주는 노래소리가, 인터넷을 샅샅이 훑어보며 세상 돌아가는 소식들에 설명까지 적어서 보내오는 고모님의 정성이, ‘숙아 ~숙아하며 하루에도 몇 번이고 다정하게 불러주는 그 애정 어린 목소리가 내게는 더 없는 활력과 행복을 불어준다.

물 떠나 살 수 없듯이 고모는 태를 묻은 고향, 부모님의 영혼이 있고, 하늘같은 남편을 갑작스레 떠나 보낸 곳, 49세 젊은 나이에 머리 굵직한 세 아들의 장래를 한 몸에 껴안고 궂은 날 마른날 가릴 새 없이 달려오던 그 언덕길, 한 여인의 인생에서의 쏟아낸 희로애락을 고스란히 간직한 고향. 그런 고향이기에 자식들 모두 보금자리를 찾아 떠난 후에도 흔들림 없이 고향에 못 밖은 듯 굳건히 집을 지키고 있었다. 고모가 고향 떠나 한국으로 가게 된 것은 뇌경색이 재발하면서였다. 큰아들은 연해도시에서 식당을 하고 작은아들 또한 광주에서 복장사업을 하는지라 고모를 돌볼 겨를이 없어 부득이 한국에서 일용직을 하는 둘째아들이 곁으로 가게 되었다.

워낙 고모네 아들들이 형제 간에 정이 깊을 뿐만 아니라 효성도 지극 하였다. 중국에 있는 두 아들은 엄마를 모시지 못한 미안함에 병원비도 아낌없이 보내주었다. 입원해 있는 동안 둘째아들은 딸보다 더 살갑게 엄마를 보살피었다. 덕분에 뇌경색의 재발로 악화되었던 병세가 빠른 쾌차를 하게 되였다. 병원 침대에서 혈관으로 뚝~뚝 떨어지는 약물을 보면서 병이 나아 하루빨리 고향으로 가게 해달라고 속으로 수없이 빌었던 우리 고모.

고모의 목마른 고향행도 그리움을 담은 채 이국땅에서 몇 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아들이 일 나가고 나면 희붐히 밝아오는 여명이 고모에게는 지독한 고독이었다. 그때 고모는 스마트 폰으로 혼자를 즐기는 탐구를 하기 시작했다. 세상을 향한 늦은 도전인 만큼 하나하나의 기술을 터득하는 순간 터지는 환성은 내 폰을 요란하게 울렸다. 고모는 매달 1일이면 중국에 있는 두 아들에게 희망과 축복의 마음을 담아 메세지를 전송한다. 뿐만 아니라 고향을 그리는 절절한 마음을 글귀로 써서 고향 노인 그룹 채팅방에 보내기도 한다. 정말 고모의 불타는 정신력과 열정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워낙 부지런하고 억척스레 농사일을 하던 고모부와 고모님은 남 먼저 기와집을 짓고 생활도 좋은 편이였다. 고모는 마을에서도 살림 잘한다고 소문이 났다. 고모네 집은 언제라도 마당에 돌 자갈이 정갈하게 깔려 있고 문에 들어서면 기름을 바른 듯 반들반들한 솥, 단지들, 노란 페인트를 칠한 구들장이며 가구들까지 모든 것이 자리 정돈이 깔끔해서 첫눈에 안주인의 알뜰한 손길을 느낄 수 있다.

나는 어렸을 때 겨울 방학을 거의 고모네 집에서 보내기를 좋아했다. 고모네 아들만 해도 셋이나 되는데다 방학이면 고모 시집 조카들에 우리 삼촌네 자매들에 나까지 조카들이 한 구들 모여들었다. 고모는 조카들이 올 것을 감안해서 가을부터 채소를 말리고 절이고 무치고 방학이 다가오면 떡, 물만두, , 과줄들을 해서 차곡차곡 얼려 놓고 해바라기 땅콩도 많이 말려 놓는다. 고모는 주방에서 우리들이 먹을 음식을 하고 먹은 것을 치우고 나면 바로 우리가 벗어 놓은 빨래감들을 걷어서 손 빨래를 하고 간식을 챙겨주곤 한다. 손에 물이 마를 새 없이 팽이 돌듯 바쁘면서도 얼굴은 함박 꽃처럼 활짝 피여 있었다.

정신없이 웃고 떠들고 놀다 보면 올챙이처럼 볼록하던 배는 어느덧 꺼져버린다. 허기가 나서 어슬렁대는 우리를 보면 고모는 얼른 부엌에 군불을 지펴서 물을 끓여 밥을 말은 다음 움에서 김치 한포기를 꺼내 머리만 쭉 잘라 놓아준다. 그때 그 밤참은 아마도 여태 내가 먹은 중에 제일 맛있는 환상 그 자체의 야식이었지 싶다. 입이 많으니 뭐나 맛있겠지만 고모의 음식 솜씨는 한번 먹어보면 잊을 수 없을 만큼 손맛이 독특했다. 우리 막내딸도 4살 때 고모가 끓인 두부찌개를 먹고는 너무 맛있다면서 그날부터 고모를 두부 할매라고 부른다.

사촌 언니가 오지 않았던 그해 겨울, 남자 애들만 있는 무리 속에 나만 여자애라 나는 고모와 한 이불을 덮고 자는 행운을 차지했다. 고모는 두 팔을 벌려 나를 품에 안고는 아이고 요 예쁜 우리 숙이하면서 내 엉덩이를 톡톡 두드려 주었다. 그때 고모의 품은 참 따뜻하고 포근했다. 딸이 없는 고모부와 고모는 나를 끔찍이 예뻐 했다. 설날에는 자기 아들들도 못사주는 목 플라 티를 내게만 사주었다. 지금 기억으로 그 티가 5원이였던것 같다. 그 당시 5원으로 티를 선물한다는 것은 엄청난 사랑이 아닐 수 없다. 장밋빛 목 플라 티는 지금도 내 기억속에 잊을 수 없는 고모님의 사랑이다.

그렇게 조카들까지 품어 주던 큰 기와집, 고모부와 고모님의 피땀으로 가꾼 아지트를 사업의 실패로 막다른 골목에 들어선 시형을 위해 고모가 나서서 고모부를 부추겨 집을 팔아 빗 청산에 한몫 막기로 했던 아량 넓은 우리 고모. 그리고 고모네는 찌그러진 오두막집에서 삶을 다시 시작했다. 집이 좁은 것도 있겠지만 고모네 살림이 조카들까지 챙기에는 너무 궁핍했다. 그때부터 우리는 더이상 고모집으로 모여들지 않았다. 그 어렵고 힘든 고모네 식구들의 삶에 셋째아들이 희망처럼 찾아왔다. 그때 고모는 또 한차례의 인생에서 큰 일을 해내고야 말았다.

햇빛에 반짝이는 눈꽃은 마치 얽히고 설킨 고모님의 삶의 이야기처럼 빛이 되여 내 동공에 비쳐 든다. 최씨 집의 막내딸로 태어난 우리 고모는 위로 오빠가 둘이였다. 각자 가정을 이루고 작은 오빠도 고모네도 자식이 잘도 불어나는데 워낙 약골이던 큰오빠가 자식을 보지 못하였다. 봉건이 많은 시기 장손이 대를 잊지 못하는 죄책감에 늘 위축해 있는 큰오빠를 생각해서 자신의 셋째아들을 선득 큰오빠에게 양자로 주기로 결심했던 우리 고모. 고모의 말에 의하면 셋째아들은 태어날 때부터 하야말쑥하고 참 웃기를 잘했다고 한다. 아무리 힘이 들어도 활짝 웃는 아기의 두 볼을 바라보면 저도 모르게 새 힘이 솟구치곤 했다고 한다.

딸이 부러웠던 고모는 셋째아들에게 원피스를 입히고 머리에 빨간 나비 댕기를 메고 자랑삼아 동네 돌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보는 사람마다 복스럽게 잘도 생겼다고 달콤한 칭찬을 할 때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아침에 일어나 젖을 빨면서도 엄마를 올려다보고 좋아서 눈웃음을 살살 치던 만 4개월의 귀염둥이. 그런 아이를 무슨 구경거리라도 생긴 듯 모여든 사람들 앞에서 한치의 주저함도 없이 물렸던 젖을 빼며아가야 어서 커서 외삼촌 잘 모셔라, 이제 너는 내 아들이 아닌 내 큰 외 조카다라며 굳은 결심을 하고 큰오빠품에 넘겨주었다던 우리 고모. 셋째를 보내고나서 고모의 넷째아들이 태어나 호적에 다시 셋째의 자리가 메워졌다. 나는 이런 고모를 세상에서 제일 위대한 모성을 가진 여자라고 부르고 싶다.

큰오빠를 생각해 양자로 보낸 아들을 칼같이 조카로만 간주했던 고모. 큰오빠 내외가 다 돌아갔음에도 원 줄기에서 한번 잘린 가지가 쉽사리 봉합이 되지 않는가 보다. 아들은 아들대로 형제 중에 하필 자기만 입양을 보낸 것이 앙금으로 남고 고모는 고모대로 그때 상황이 그렇게 할수밖에 없었다는 사연을 넋두리처럼 뱉을 뿐이다. 서로 가슴에 아픈 사랑을 품고 멀리서 바라만 보며 부모 자식 간의 골이 점점 깊게 페어만 가는 것이 너무 안타깝다. 이제는 고모님이 80고개에 이른 나이라 서로 당겨주고 다가서고 한다면 서로에게 여한이 없을 법도 할 텐데 말이다.

눈꽃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사색에 잠겨 있던 나는 부르릉하는 전화 울림에 화들짝 놀랐다. 마음이 전해져서 일까. 마침 고모에게서 걸려 온 영상 전화였다. 눈 내리는 마당에서 빨간 스카프를 날리며 눈발을 가리키며 소녀처럼 환하게 웃고 있는 고모의 모습이 얼마나 찬연한지 눈시울이 뜨거워 나려 한다. 여든의 나이답지 않게 온라인의 보급을 잘 이용해 인생의 황혼기를 아름답게 가꾸어 나가는 멋진 우리 고모 청자씨, 본명이 최경자(崔京子) 북경이란 경자인데 중국말 발음을 잘 못 해서 신분증에 경축이란 (庆)자가 되어버린 우리 고모. 인생의 전반은 본명 최경자로 열심히 젊음을 불태웠다면 후반생에는 최청자(崔庆子)란 이름으로, 효자 아들들이 불러주는 최여사란 호칭으로, 우리 딸의 두부 할매로, 이제는 저 눈꽃속에 찬란한 미소를 온전히 간직하고 모든 시름 다 털어버리고 지금처럼 건강한 정신력으로 100세까지 건강 장수하시기를 기원한다.

 

최화숙 프로필

         * 1967년 흑룡강성 상지시 출생
         * 흑룡강성조선족작가협회 회원
         * 재한동포문인협회 이사
         * "오늘의 내 고향" 체험 수기 대상
         * KBS 북방 동포 체험 수기 특별상
         * 할빈 문학의 밤 "록환 컵" 수필상
         * 노년세계 "천우컵" 생활 수기 은상
         * "카라즈컵" 세계 조선족 글짓기 대회 가작상
         * 신문 잡지에 수필 수기 다수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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