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북아신문] 시로 보는 동포문인의 정감세계...  

▲ 중국 길림성 안도현 출생한영남 약력 : 시, 수필, 소설, 실화, 평론 등 300여만자 발표, 각종 문학상 다수 수상. 연변작가협회 회원, 흑룡강작가협회 회원, 중국소수민족작가학회 회원. 현재 중국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편집.

시집 <하나님 눈을 너무 깊이 감으셨습니다>(2006), 소설집 <섬둘레 가는 길>(2013년), 서정장시집 <굳이 네가 불러주지 않아도 수선화는 꽃으로 아름답다>(2017년) 등 출간.

  1. 꿈에 고향에 갔더라 한영남   꿈에 고향에 갔더라
고향은 꿈에도
어릴적 추억이기만 하더라 앞벌 가없이 펼쳐진 논에서는
밤마다 개구리 울음소리 노래가 되고
풀이 미여지게 자란 산골짝
실개천은 숨어서 소리로만 가더라 머리 들어 하늘을 보면
아무렇게나 걸려있는 흰구름
기다려도 버스조차 오지 않는 언덕길이
하루내내 고스란히 낮잠에 빠져있더라 어디선가 개구장이 오빠가
물쑥 꺾어들고 불쑥 나타나줄 것 같아
순이가 댕기 매고 뿌리내린 고향
흙에 코를 쿡 박아도 옛말이 아홉 컬레씩 그리고 하오의 고요로움이
엷은 가락으로 들려오더라 꿈에 고향에 갔더라
고향꿈에서 나는
언제나 클 줄 모르는 열네살이더라
<료녕신문> (2007년)  
2. 내게 꽃멀미나 시켜라   마른 나무에 물이 오르는 계절
내게 꽃멀미나 시켜라 사람사이에 찡기우면서 풀이 그리워
서러운 살몸 여미는 초라니 인생
한번쯤이라도 꽃멀미나 시켜라 쟁그런 해살이 부서지는 기껏 부드러운 하늘
파겁을 못한 소녀인양
오무리고 서서 바시시 떠는 가난한 심장
순간이나마 꽃멀미나 시켜라 개나리 복사꽃 개불알꽃 노루궁뎅이
우리 꽃들이 다급히 피는 계절
이슬이 싱싱해 그만두는 민들레의 아픔
양지에서는 저리 픽 웃는 달래의 쨍한 향
더도 말고 그저 꽃멀미나 시켜라 저쯤 바라보이는 저 꽃멀미나 술렁술렁 해보리
<두만강여울소리 시가창작 대상> (2004년)  
3. 꽃잎으로 불러보리라   해빛 쟁쟁한
오전 아홉시 이슬이 아직
사라지기전 그 이슬진 꽃잎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설핏한 향이 코날을 스치는
그 섬섬한 꽃잎으로
<료녕신문> (2007년)  
▲ 가방 메고 사진기 걸고, 걷고 걷는, 진실을 찾아가는 길...
 4. 님의 이름  조금은 눅눅한 새벽공기가 흐르는 가운데 사랑하고 사랑하는 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밤새껏, 바람에 창이 푸르릉거리는 그 밤새껏 연습해둔 가장 부드러운 목소리로 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저 이륵이륵 밝아오는 하늘에 이제 너무도 예쁘게 피여날 선홍빛 노을 같은, 한겨울 수북수북 말없이 내리는 순백의 눈송이 같은, 그리고 이슬 함함히 머금은 빛부신 꽃두덩 같은 그 이름을 부릅니다
하늘에, 바람에, 아득한 지평에 님의 이름과 더불어 새떼처럼 비껴갈 글자들은 기쁨이나 환희의 의미가 아니요 끝없이 슬픈, 황홀할 지경으로 아름답게 슬픈 약속의 이야기무더기입니다
지금껏 창으로 흘러드는 새벽빛을 온 몸우에 포근히 두른채 혼곤히 주무시고 계실 님의 귀전에 깨울가 깨울가 저어되여 정말 조용히 사랑의 노래도 불러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님을 깨우는 첫사람이고 싶습니다
님만이 알아듣는 나의 언어로, 나만이 알아듣는 님의 언어로, 우리 둘만의 터전에서 소곤소곤 나누던, 우리 둘만이 서로 통하는 그 꽃다운 언어로 순밀의 정을 담은 이야기를 다발로 엮어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님이 아시는 첫남자이고 싶습니다
나무우듬지 새울음이 날아가 님을 깨우기 전에 나의 청명한 소리가 님을 부르며 막 달려가게 하렵니다
새벽 안개비 포근한 가운데 조금씩 조금씩 푸르러지는 하늘과 오므렸던 호흡기를 시원히 펴게 하는 상냥한 바람과 아슴히 펼쳐진 저 지평으로 이제 막 비껴가서 아뢰일 아아 사랑하는 님의 이름이여!
<료녕신문> (2007년)  
5. 가을이면 푸른 하늘을 걸어서 오시는 당신  포도알이 상기 푸른 구월
덜익은 해바라기처럼 고개들어
감히 하늘을 우러르면
그 아득한 푸르름속을
걸어서 오시는 당신을 볼 수가 있습니다 비 그은 뒤 해살이 찬란하면
쑥스러운 국화처럼
비이슬에 함씬 젖은 머리털 털고
물껍질조차 걸치지 않은 알몸이 되여
하늘을 우러르면
그 질리도록 아슴한 푸르름속을
걸어서 오시는 당신을 볼 수가 있습니다 누구를 바래듯
누구를 기다리듯
산기슭에 이윽토록 엉큼한 바위처럼
온몸이 그리움이 되여
하늘을 우러르면
그 넉넉한 푸르름속을
걸어서 오시는 당신을 볼 수가 있습니다 넓은 들에 홀로 선 나무처럼
뚝 뚝 옷을 벗고
수많은 팔뚝을 환성처럼 펼치고 서서
하늘을 우러르면
그 섬뜩하도록 깊은 푸르름속을
걸어서 오시는 당신을 볼 수가 있습니다 당신이 가신 뒤 쏟아지는 슬픔을
일기처럼 써두었던 시첩을 마주하고
그속에서 숨쉬는
당신의 향기를 당신의 모습을 당신의 아픔을
술처럼 마시면
시처럼 펼쳐진 푸른 하늘을
가실 때처럼 가벼이 가벼이
걸어서 오시는 당신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두만강여울소리 시가창작 대상> (2002년)  
6. 거기에 추억은 울바자처럼 서있었네  눈이 내리고 있었지
동화만큼이나 아름다운 눈이 펑펑거리고 있었어
그리고 밤이였지
아무에게라도 전화를 하고 싶은
그런 푸근한 밤이였지
열어놓은 기억속으로는
옛날 아슴한 이야기들이
청첩이라도 받은듯이 달려오고
겨울밤은 강물처럼 흐르고 있었어
그속을 나는 아이처럼 환성을 지르며
달려가고 그래서 나는 다시 그
손가락을 빨던 소년이 되였지
괜히 네 생각이 나서
나는 너에게 눈줴기를 뿌리고
너는 고드름을 창처럼 꼬나들고
나를 향해 달려왔지
강아지가 갑자기 부끄러워 고개를 드니
더없이 맑은 밤하늘에서는
별들이 눈송이처럼 쏟아져내리고 있었지
그래서 울었어
시집 못간 가시내처럼
<흑룡강신문> (2009년)   7. 고향은 내가 울바자에 오줌을 싸도 나무라지 않네  이십 년인가 삼십 년인가
아니면 그보다 더 긴 시간 동안
밖으로만 밖으로만 철없이 싸대다가
어느 날 비로소 철이 든듯 고향에 돌아왔다
불알친구들과 술 한 잔 했다
요즘의 세간에서 나를 불러주는
모든 호칭들을 무시한 채
우리는 예전처럼
쑥스러운 별명들을 툭툭 주고 받으며 낄낄거렸다
열어놓은 방문으로 훤히 내다보이는 마당가에서는
모기불이 따악따악 소리내고 있었고
먼 곳에서는 쓸데없이 개구리소리가 요란했다
갑자기 오줌이 급해서 화장실을 찾다가
그냥 체면을 몰수하고
울바자밑에 실례하기로 했다
세상사에 진작 지쳐버린 나의 까만 녀석은
부끄러운듯 더욱 자까부러져 있었고
그런 녀석을 간신히 끄집어내
고향내음을 맡아보게 했다
이십 년만인가 삼십 년만인가
아니면 그보다 더 긴 세월이 흐르도록
오랜 만에 정말 그렇게 오랜 만에 달을 보았다
어릴 적 엄마의 땀 젖은 머리에 앉아 춤추듯 돌아오던 달을
눈물이 질름질름 넘치도록 쳐다보았다
<흑룡강신문 랑시문학상> (2009년)  
8. 나는 물이다 내게 무슨 상처랴  나는 물이다
내게 무슨 상처랴
내내 흐르다가
돌을 만나면 으깨지고
나무 만나면 베여지고
산을 만나면 돌아가고…
그러나 내게 무슨 상처랴
짐승들은 철버덕거리며 나를 희롱하고
자그마한 풀가지마저 내게 칼질하고
사람들이야말로 아무렇게나 나를 찢고 베이고 갈라놓고… 해도
실로 나는 물이다
내게 상처를 바라지 마라
해아래 말리워도 좋다
오물을 퍼부어도 괜찮다
나는 물이다
아파서 속울음 울어도 눈물조차 보이지 않는
아아 그리고 차마 상처도 입지 못하는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 대상>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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