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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리정자]조선민족무용의 정상 박용원 은사님을 회억하며

기사승인 2018.05.24  11:5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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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용원 선생님이 조선족 춤을 추고있는 장면
[서울=동북아신문]글 리정자=사람이 살면서 가장 큰 복은 부모복도 있겠지만 은사님을 잘 만나는 거야 말로 최상의 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좋은 스승을 모시면 성품, 인품 ,지혜 심지어 인생의 방향판까지도 결정지을 수 있으니까.  

인생 60이 훨씬 넘어선 지금에 와서도 그저 떠올리기만 해도 감개가 무량해 지는 잊지 못할 은사님이 계신다는 건 실로 가슴 벅찬 일이기도 하다. 나 뿐이 아닌 룡정1(원대성중학 70년대) '모택동사상 문예선전대' 제자들은 하나같이 은사님을 기리며 그 가슴 뭉클하고 맵고맵던 사랑과 정성을 가슴이 먹먹해 지도록 오래오래 잊지 못하고 있다.
 
조선민족무용의 창시자 박용원선생님!! 어떤 형용사로 선생님의 인격을 더정확히 묘사할 수 있을까! 또 무엇이 우리들을 이토록 끈끈하게 이어 주었을까?…….
 
   
 
문화대혁명중기 한떨기 싱싱한 예술의 꽃송이-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아름다운 꽃한송이가 재교육 대상으로 룡정현태평촌에 내려가 농사일을 하게 되었다. 최고의 무용수가 꿈이었지만 그 시기로선 시대의 조류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유명한 무용가 최승히 제자로 5년간 있었고 무용을 생명으로 여기면서 배우고 익혀온 중국 조선족무용의 창시자인 박용원선생님은 이렇게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조선민족무용의 기본체계-동작으로부터 깊은 이론체계에 이르기까지 연구에 깊히 묻혀 실천의 나래를 펴서 훨훨 나래치려던 시기였건만, 그 나래를 끝내 펼쳐보지도 못하고 이 생에서 무용과의 인연을 갑자기 접게 되었다. 박용원선생님의 나이 그때 41, 딸 둘에 아들 하나를 둔 어머니셨다.
 
룡정현태푱촌에서 선생님한테는 모든 것이 생소했다. 호미도 신기했고 씨를 뿌려서 채소가 자라는 그자체가 너무 신기했다. 하여 기음 맬 때 풀과 묘싹을 분간 못하셨다.
 
   
 
 그래도 심성이 바르고 의지가 강한 분이라 농사일에 적응하기에 열심히 노력했다. 언젠가 선생님의 집에 가서 선생님께서 손수 지은 밥과 채소를 맛있게 먹은 기억이 난다. 원래 말씀이 적으신 분이 그렇게 흥분하여 이것저것 손수 심고 가꾼 것이라고 곱씹어 얘기할 때의 그 격동되고 상기된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생생하다.
 
룡정현 태평촌의 사람들은 누구도 그가 무엇을 하는 사람이었는지에 관심이 없었다, 농민들이 알고있는 것은 시내에서 농촌으로 재교육 받으러 왔다는 사실 뿐이었다. 다만 아주 정직하고 대바른 은사님의 성품은 그이를 거쳐 간 모든 사람들의 기억의 한 구석에 남아 있으리라…….
 
선생님은 정말 어려운 사람들한테는 돈을 꾸어주곤 하셨는데, 태평촌을 떠나 룡정일중으로 갈때는 빌려준 돈을 돌려 받으려고 하지 않으셨다. 원래 처음부터 도와준거지 꿔준 게 아니라고 또박또박 말씀하셨다. 태평촌을 떠나면서 정책 시달로 받은 로임 2500원을 들여 촌에 손잡이 뜨락또르를 사놓고 가셨다. 지인들과 동네에서는 대단한 분이라고 오래동안 소문이 자자했지만 본인은 한마디 입밖에 내지 않았다. 알고보면 그는 마음이 한량없이 깊고 따뜻한 분이셨다. 비록 다시 무용을 하게 되어 기뻤지만 태평촌을 떠나면서 힘들게 일하는 농민들을 얼마 간이라도 돕고 싶은 마음이었으리라. 그 때는 한달 로임이 몇 위안 밖에 안 될 때였는데 선생님은 돈을 대수롭잖게 여겼다. 무용만이 인생의 전부였다. 무용을 다시 할 수만 있다면, 다시 말한다면 우리 민족의 무용을 체계화시켜 후세에 전수할 수만 있다면 그 어떤 댓가를 치러도 두렵지 않았다. 다시 무용을 하게 된다는 것이 그토록 선생님의 마음을 들끓게 하였던 것이다. 말씀은 안 하셔도 우리는 선생님의 일 처사 하나하나에서 마음 속 깊이에서 무용에 대한 애착과 열정의 용트림, 미래에 대한 꿈, 조용히 움직이는 뜨거운 용암을 느낄 수 있었다. 아래 선생님의 무용창작과정을 읽으면 독자들도 금방느낄 수 있을 것이다.
 
   
 
1) 새로 오신 무용선생님
나는 196810월부터 룡정일중문예선전대에서 제일 막내로 있었는데 선배님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었다. 그때는 중국문화대혁명 중기로, 모든 절목이 형세와 연관된 시대성을 띤 노래에 맞추어 가무식으로 만들어졌다. 내가 다니던 룡정일중문예선전대에서는 모주석의 시사 '장정'노래를 주제로 홍군이 장정을 시작한 경과를 무용으로 창작하여 연출하였으며 '적들의 후방으로 가자' 등 절목들과 홍색 본보기극이 유행될 때라 '홍색랑자군', 무용 제2장을 그대로 옮겨 연출하였다. 그때는 '백모녀', '지혜롭게 위호산 탈취' 등이 많이 유행되었다.
 
19714월로 기억된다. 날씨가 아직도 쌀쌀할 때였다. 어느날 룡정일중공청단서기로 사업하시는 로동문서기가 오셔 새 무용선생님이 오신다고 하셨다. 그때 로동문서기는 1중에서 아주 이름 있고 확신성 있고 활약이 뛰어난 열정적인 분으로서 로서기의 지시면 바로 실행되는 것으로 알았다. 그때 우리들한테 공산당선언, 유물변증법, 경제학등 이론을 머리에 박히도록 강의하셨던 분이시다.
 
로동문선생님께서 그 험한 시대에 감히 박용원선생님을 무용교원으로 모셔온 행동은 참으로 비범한 시대의 비범한 생각이 들었고 아주 비범한 처사같았다. 그 시대에 '우경번안풍'의 덕분에 우리는 한 시기 머리를 싸쥐고 공부할 기회가 있었다. 문예선전대도 학교에서 성적이 제일 우수하고 품성이 바른 학생만 받기로 결정되여 있어 그 당시 문예선전대의 매 성원들은 그 바쁜 환경에서도 누구도 학습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참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하여 그 시대 룡정일중학교에서는 모택동사상문예선전대에 관심이 많았다. 또 사회적으로 연출 기회도 엄청 많았고 전업대 못지않게 기교도 높았다. 그때 연변가무단에서는 '백모녀' 전장을 그대로 옮겨 연출하고 있었다. 마침 로동문서기가 연변가무단에 가서 바레무용신을 빌려다 바레신을 신고 무대에 오르게 하였으니 기본공이 전업대 수준을 방불케 했다.
 
새로 오신 선생님이 바로 우리가 그토록 존경하는 박용원 선생님이셨다.
 
박용원선생님께서는 오시자마자 우리들의 절목을 보시고 나서 용감하게 새로운 설계를 시작하셨다. 제일 먼저 가무 '여러 민족 인민들 모주석을 열애하네'였는데 아주 짧은 시간에 창작되여 번마다 무대의 서막 첫 절목으로 연출을 해서 사람들을 흥분의 도가니에 빠지게 했다. 여러 소수민족들이 천안문광장에 모여 모주석을 노래하며 춤주는 절목으로 그렇게 반응이 좋았는데 아마 전국적으로 제일 먼저 이런 절목이 나왔으리라.
 
무용 인기는 정말 선풍적이었다. 수년이 지나면서 중국 전 지역의 가무단들에서도 유사한 절목을 많이 연출했는데 모두가 우리 무용을 벤치마킹한 것이었다.
 
그때 룡정일중문예선전대는 바레무 기본공과 한족고전무 기본을 많이 연습했었다. 그것도 전문 영화를 수차례 보면서 익혔던 것이다. 박용원선생님께서 오시자 곧바로 조선무용기본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모두가 굿거리 장단부터 시작하여 휘감기로부터 메고펴기, 뿌리치기, 사위치기 등 기본을 배우며 모두가 흥에 둥둥 떠 있었다. 조선무용의 그 우아한 미와 매력을 과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2)박쥐의 집이 무용가의 침실이자 창작실이 됐다
선생님께서는 항미원조시기 조선에서의 사고로 다리를 험하게 상한 적이 있었는데 학교에서 태평3대까지 걸어 다니시면서 출근하기가 쉽지 않았다. 더우기 길에서 소진하는 시간낭비가 아까웠다. 학교에서는 토론을 거쳐 현재 룡정1'윤동주전람관' 북쪽 3층 층계 구석을 임시 숙소로 꾸며주기로 했었는데, 그곳은 박취들이 많이 붙어 살던 곳이었다. 그땐 지금의 윤동주전람관 1층이 무용연습실있으니까 가까워서 좋았다. 벽 구석에 붙어있는 박쥐들을 쫓아 날려보내고 층계를 받침대로 널마루로 침대삼아 구들을 만들었다. 아마 다섯평 정정도 되었을 것이다. 그땐 난방이 없고 난로를 쓸 때라서 겨울엔 춥고 여름엔 통풍이 별로 안 되는 곳이었지만 선생님께서는 불평 한마디 없이 창작에 몰두하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선생님께서는 무용에 대한 놀라운 잠재력과 의지력을 지닌 분이셨다. 진짜로 무용의 거인이셨다. 학교에 새로 오셔서 한달도 되기전에 가무극에 이어 감히 무극을 창작하기 시작하셨다. 선생님의 머리 속은 샘물과도 같이 끊임없이 새로운 동작들이 만들어져 나왔다. 학교에서는 선생님과 나를 함께 주숙하게 했다 하루 창작량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혼자서 여러 각색의 동작을 창작하여 기억하였다가 이튿날 배워주기에는 너무 초과량이었다. 하여 내가 녹음기이자 비디오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존경하는 은사님과 고락을 함께 하는 행운을 지니게 됐다.
 
선생님께서는 무극을 창작하여 배워주실 때 우선 극본이 준비된 후 하나하나 동작을 배워줄 때마다 그 내용에 따른 감정이 안받침된 언어가 늘 튕겨나오시곤 했었는데. 늘 입속으로 중얼거리면서 배워주셨다. 모든 각색에서 학생들도 모두 그대로 따라하다보니 동작마다에 내용, 감정과 진정이 슴배여 표현되였던 것 같았다. 또 모든 극본은 장절이 명확하고 중점이 간단명료하며 결론이 통쾌하였다. 희노애락의 표정과 표현이 동작에서 쉽게 느껴지게 창작을 잘하셨다. 그러나 창작한 내용을 그대로 학생들이 받아 소화하기에는 진짜 쉽지 않았다. 수많은 반복과 수정, 인내심과 열정과 노력이 따라야 했다. 선생의 아래 다리는 늘 퉁퉁부어있었지만 그는 전혀 힘든 내색을 보인 적이 없었다.
 
무극 '신 한짝'을 보자. 신 한짝 귀중했던 구사회에서 엄마가 주어온 신 한짝을 딸에게 한뜸한뜸기워 주었고 딸은 그 신을 신고 엄마와 동생을 도와주는 내용으로 새시대 학생들이 교육받을 수 있는 과정을 3장무극으로 만든 것이었는데 무극과정의 딸이 빚으로 붓잡혀갔을 때 어머니의 실신한 동작표현, 누나가 붙잡혀가자 엄마를 붙잡고 하염없이 우는 동생의 동작표현, 여러 정면인물과 반면인물의 동작에서 많은 멋진동작들이 창작되였었으며, 더불어 이야기 내용을 아주 또렸하게 표현하였다.
 
   
 
무극 '어머니'는 부상당한 지원군아저씨를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 아들을 대신 잃은 조선족 어머니가 부상병을 치료하여 부대로 돌려보내고 포화속에서 음식을 산으로 전하는 군민관계의 형상을 부각한 5장 무극이다.
 
'어머니' 무극에서 어머니 역을 맡았던 김순금 염경숙씨는 그때 나이 17살이였다. 17살짜리가 50대 역을 맡아서 음식함지를 이고 산으로 오르는 동작은 진짜 가관이었다. 아무 시설도 없는 평무대에서 힘들게 산으로 오르는 동작을 수십번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까끈히 배워주셔 끝내 성사시켜 관중들의 어마한 박수갈채를 받았었다.
 
그외에도 '모내기타령', '전투속의 월남소년', '기네아 아동들 마음북경으로' 등등 무용들이 창작되어 무대에 올랐는데 특히 '모내기타령'에서 조선무용의 숨은 매력을 멋지게 과시하였다. 덩실덩실 어깨춤에 손사위치는 동작, 뿌리치는 동작들에서 중간중간 박수갈채를 많이 받았었다. 조선민족 무용의 성수나게 만드는 끌 힘, 모두가 공감하여 함께 하고싶게 하는 그 매력, 그 시기 어느 무대에서나 관중의 우뢰와 같은 박수 갈채를 받았으며 로천부무대를 독점할 지경으로 절목 모두가 연변인민들의 사랑과 호평을 받았다. 선생님께서는 기발한 착상으로 짧은 시간동안에 이름난 명작들을 창작하셨다. 선생님과 함께 하면서 어린 마음에도 선생님의 만강의 열정과 빼여난 창작에 우리는 감탄을 하였다.
 
   
 
 
3) 박식하고 지혜로운 스승님
선생님은 제자들에 대한 요구가 아주 엄한 스승님이셨다. 매일 가르치는 조선족무용의 기본동작은 지극히 세절적이었는데 미세한 틀림도 용서없었고 매개 동작에서의 감정표현 때문에 목이 쉬도록 곱씹어 해석해 주시며 반복되는 시범동작을 하셨다. 하나하나의 손놀림과 표정, 몸짓의 미세한 점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지도하시던 선생님 표정에서 희노애락을 읽던 그 순간순간이 지금도 눈앞에 생생이 떠오른다.
 
배워줄 때 늘 하시던 말씀이 귀에 쟁쟁하다. "동작은 끈기가 느껴져야 합니다. 탄성이 있어야 합니다. 무용은 사지로 주요 내용을 표현하므로 동작에서 경중이 느껴져야 합니다. 동작의 연관성, 그리고 매동작마다 손끝까지 신경이 닿게 해야 합니다."
 
선생님은 사지의 움직임과 표정의 조화와 미세한 감정까지 시원하게 표달할 수 있게끔 아주 까근하게 배워주셨다.
 
15세부터 17세 사이의 남여학생 30여명의 무용대 학생들이 전혀 말썽없이 그처럼 꾸준히 잘배웠고 너나없이 전업대 못지 않게 기본공과 무용련습에 열중했었다. 그 어떤 힘이 그 어떤 매력이 그처럼 열혈청춘들을 한곬으로 이끌 수 있었을까?
 
특히 남학생들은 학습을 끝마치고 나면 모두가 열심히 절목을 연습하곤 했었는데 늘 밤늦게까지 연습하곤 하였다. 지금 기억엔 누가 주역이라 없이 모두가 열심히 배웠다는 생각밖에 없다. 그때 17살이던 임전일씨는 언젠가 연출이 끝나 밤 10시가 되어 유신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도중에 여럿이 함께 걸어도 머리카락이 곤두서게 무서운 곳-버들방천을 지나서도 해란강을 건너야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20리 길을 돌아서 걸어가야 했으니 말이다.입춘 처서가 지났지만 아침에 녹았던 해란강이 늦은 밤중이라 살얼음이 끼여 둥둥 떠 있었는데 바지를 벗어 가방과 함께 이고 살얼음 치는 가슴팍을 넘어서는 해란강을 건너 집에 간 적도 있었다. 얼음 없는 강을 건너는 일은 수없이 많았던 것이다. 이것을 보면 그때 룡정1중 문예선전대대원들의 무용에 대한 사랑과 정신면모를 얼마 쯤은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 제자 강승국씨와 의 차이를 얘기하게 되었는데 명사 형용사 차이를 그렇게 상세히 진지하게 이해시키며 알 때까지 설명했던 적도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한자에 대해서도 아주 공부를 많이 하셨던걸로 기억된다.
 
   
 
 4) 엄마같은 사랑을 지닌 엄한스승님
교육자로선 그처럼 엄격하신 선생님께서 생활에선 아주 소박하고 인자하고 배려심이 넘치는 어머니의 형상이었다.
 
무용은 박용원선생님의 전부였다. 제자들이 그토록 은사님을 존경하고 자랑할 수 있었던 것은 선생님의 깊은 지식면과 엄격함에 따른 따뜻한 어머니같은 인성이 학생들로 하여금 더 열심히 배우게 하였으며 따라서 모두가 그토록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을 품고 지금도 잊지 않고 그리게 되는 이유이다.
 
그땐 한창 문화공부를 심히 중시할 때라 무용연습과 공부 어느 것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정황이였다. 오전에 공부하고 오후엔 학교 중요행사가 끝난 후라야 연습을 할 수 있었는데 거의 매일 저녁 8,9시에 연습이 끝나군 하였다. 선생님께서는학생들이 돌아간 후에도 계속하여 거의 두시간좌우 창작에 몰두하시곤 하셨다.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전에 씻을때 보니 선생님 다리가 퉁퉁부어 있었다. "선생님 다리가 많이 부었습니다."라고 내가 말하자 선생님께서는 ", 그래 자, 보아라. 손으로 꾹 누르면 쑥 들어가서 인츰 회복되지 않은 것은 많이 부은 것이고 인츰 회복되는 것은 부은 것이 아니지."하시면서 놀라는 나한테 말머리를 돌려 상식적인 것을 가르치곤 하셨다.
 
, 그땐 뜨거운 물도 겨우 조금 얻어다 섞어서 쓰곤 했는데 늘 나한테 많이 양보하시려 하셨다. 어린 마음에도 어쩔 수 없 는것이 몹시 마음이 아팠다. 나도 힘들단 말 한마디 없이 꾸준히 따라하였다. 학습은 더욱 게을리 하지 않았고 게시판의 12등엔 늘 나의 이름이 있었다.
그래서 선생님의 사랑을 더 받았던 것 같다.
 
어느날인가 밤창작시 내가 잠시 넘어졌다가 깨어났는데 선생님께서는 내가 쇼크가 왔었다고, 얼마간 정신을 못차리다가 깨여났다면서 많이 걱정하시더니 이튿날 기어이 병원으로 가서 검사시켰다. 의사가 과로해서 쓰러진 것이라고! 그리고 지나친 빈혈이라고 알려주었다. 선생님께서는 아무 말씀없이 조용히 의사 선생님과 몇마디 주고 받더니 이튿날부터 한달 남짓이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마다 콩물에 밀가루 튀김을 사주셨다. 그땐 참 누구나 많이 먹고 싶었던 음식이었다. 그리고 포도탕 가루를 매일 물에 타서 마이게 하셨다. 내가 어떤 땐 잊어버리고 공부를 할 때면 손수 타주시곤 했다. 그때 집형편에 친어머니도 그렇게는 못했을 것이다.
 
그때는 전기장판도 없을 때였다. 나는 17세 나이라 그대로 지낼 수 있었지만 42세 여인으로 추위에 제일 민감한 나이에 어떻게 그대로 견지했을가 싶다. 지금 생각하면 이붓자리도 변변치 않았는데 말이다. 참 눈물나게 마음이 아프다. 매번 연출이 끝나면 얼굴의 도료화장을 지우는 것도 쉽지 않았다. 모두가 젊은 나이라 신문이거나 무엇이건 가리지 않고 닦고 씻곤하였는데 진짜 잘 지워지지 않았었다. 선생님께서 처음에는 기름으로, 후에는 조개에 담은 썅즈(기름)으로 지우게끔 하곤했는데 그땐 분홍색 위생지가 귀할 때라 선생님의 로임으로 직접 사셔서 나누어 주시곤 눈섭이 빠지면 잘자라지 않고 피부가 상한다고 차근차근 가르치곤 하셨다.
 
그처럼 따뜻하신 분이 무용동작에서는 한치의 오차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아주 엄격하게 가르치셨다. 미세한 틀림도 용서없었다 박선생님은 제자들에 대한 요구가 아주 엄한 스승이셨다. 학생들도 모두 엄격함과 참다움과 따뜻함에 습관되어 갔고 타학교의 학생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룡정일중문예선전대는 화목했었고 선후배서로 화애롭게 지냈다.
 
선생님은 말씀이 적은 분이셨는데 일단 말씀하시면 마디마디가 무게가 있고 정의에 차넘치셨다. 시간을 아주 아끼셨다는 것이 아주 인상적이다. 19729월의 어느날 우리가 중요한 연출임무를 맡고 룡정극장에서 연출을 하게 되였는데 누군가 전하기를 박용원선생님께서 룡정일중을 떠나 예술학교에 복귀하신단다. 모두가 화장을 끝내고 연출하러가기 직전이었는데 주위는 갑자기 울음마당으로 변해버렸다. 1년 남짓한 기간 선생님과 제자들 간에 쌓여진 뜨거운 정이 봄물처럼 터져 나온 것이다. 박용원선생님에 대한 존경의 마음과 이별에 대한 안타까움의 호소였다. 그날 연출은 특별히 더 잘한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그날 찍은 기념사진은 제자들의 얼굴 화장이 눈물로 얼룩져 있어 볼 때마다 진한 추억을 불러왔다.
 
통신이 발전되고 인터넷이 발달된 현시대에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젯날 함께 했던 국내외의 동료와 제자들은 그젯날의 추억으로 모두가 서로 소통하고 교류하면서 사이좋게 지내면서 은사님을 그리고 있다.
 
   
 
그때 박용원선생님을 다시 피어나게 한 로동문선생님, 신 한짝 무극의 작곡과 작사를 하셨던 전성호선생님, 아마니 무극의 작곡을 하셨던 김광일 선생님, 여러가지 형세에 따른 절목을 하도록 소재를 제공하시고 하셨던 김갑순선생님 등은 지금 모두 70~80이 넘으셨지만 모두가 박선생님에 대한 추억으로 더욱 끈끈하게 서로 이어져 있고, 그때 그 시절 박용원선생님의 가르침하에 용정일중에서 신나게 춤을 추었던 제자들 또한 지금도 선생님을 그리면서 함께 자리를 하곤 한다.
 
20171031, 연변예술학원에서 학교창립 60돐에 이어 박용원 은사님의 석고상 제막식을 갖게 되었는데, 룡정일중 제자들은 위챗에 소식을 올리자마자 금방 모두가 격동되어 너나없이 응당 지지해야 할 일이라며 기부에 적극 호응해 나섰다. 북경에 있는 강승국, 박춘자 부부와 리란이, 리령이, 한국에서는 양영자, 최광현을 비롯한 여러 제자들과 일본에 있는 서광룡 이외에도 소식을 들은 제자들 모두 참여했다. 연길에 있는 제자들은 직접 제막식에 가서 은사님을 존경하고 그리는 마음을 표하였다. 두 시간 남짓한 행사 기간 모두가 선생님을 추억하며 그젯날의 노래를 부르면서 함께 자리를 하였다. 그때 통지를 못받았던 분들은 참석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 하였다.
 
특수한 년대, 그 시대의 복잡함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몰입하여 함께 신나게 춤추고 활약했던 그 제자들중 한시기 중국조선족예술교육의 최고학부인 연변대학교-예술대학 무용학부를 이끌어온 김민극, 한룡길 교수가 있는가 하면, 또한 무용예술을 본직으로 전국조선족 사회공익 사업의 선줄꾼이 된 문화원장님, 리령과 전국 중소학교우수교원인 리미란무용교사도 있다. 각자 맡은 분야에서 전업 단체거나 예술학교에서의 주요 위치에서 충분히 제자로서의 작용을 발휘하였고, 다른 제자들도 모두가 기관문예공연 지방문예공연에서 창작품을 내놓아 각 분야에서 지극히 인정을 받고 있다.
2013년에 나는 문화국 산하에 있는 조선족무용학습반에 약 일년반 열심히 다니면서 조선무용기본동작을 다시 한번 더 정확히 배웠다. 열심히 기본공을 닦았다. 그리고 수요가 있는 곳이라면 언제나 열심히 조용히 나의 무용에 대한 애착심을 보여주곤 했다.
 
2000년에 나는 연길시통달외국어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면서 어느덧 18년이란 세월을 보냈다. 또 지난해부터 '성인문화교육센터'를 증설하여 더 많은 분들이 조선무용을 배울 수 있는 장소와 기회를 만들고저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누구나 한번쯤 배워보면 느낄 것이다. 박용원선생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조선민족무용의 미와 매력 영향력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1년 남짓한 기간 조선민족무용의 거인 박용원선생님과 함께 했던 세월-참 소중한 인생의 잊지 못할 한폐지를 함께 쓴 영광을 마음에 새기며 항상 선생님을 존경하며 기리는 마음을 담아 이 글을 전하는 바이다.
 
20182
 
글/ 리정자 연길시통달외국어양성학교교장 

[편집]본지 기자 pys04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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