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석화 약력: 중국 용정 출생. 연변대학/ 한국 배대대학 졸업. 중국작가협회 회원. 중국(연길)문학아카데미 대표. 시집 "연변", 문학평론집 "윤동주대표시 감상과 해설", 번역서 "손자병법(전3권)" 등 30여 권의 저작 출간.
[서울=동북아신문]요즘 중국 조선족사회에서는 북경 민족출판사에서 출간한 ≪조선족으로 산다는 것—70, 80 후의 삶, 앎, 꿈≫이라는 제목의 책 한권이 나와 세간의 화제를 모으고 있다.

편집자는 후기에서 자신을 포함하여 이 책의 저자들인 중국에서 ‘70, 80후 세대’라고 부르는 이들 군체적 특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70, 80후 세대는 이제 더 이상 그 전 세대와 같은 곡조의 노래를 부를 수 없다. 우리의 생활양식은 많이 달라졌다. 우리에게는 거대담론이 없다. 공부도 할 수 있을 만큼 했고 문명의 혜택도 많이 누린 70, 80후 세대는 외국으로, 대도시로 본격적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한 세대이다. 후세들에게 우리 이 세대는 어떤 세대로 남을가?” —  “후세들에게 우리 이 세대는 어떤 세대로 남을가?” 이것이 문제이다. 우리는 비록 현재를 살아가지만 우리의 삶은 미래에로 이어진다. 그것은 우리 현재의 삶은 과거로부터 넘겨받았기 때문이다. 과거 현재와 미래에서 우리는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현재 중국에서 ‘70, 80후 세대’라고 불리는 이들은 지금 바로 30대를 넘어 40대에 접어드는 세대로서 사회적으로 바야흐로 세상의 중심에 나서는 세대들이다.  이들은 또한 개인의 삶에서도 ‘삼십이립(三十而立)’을 넘어 ‘사십불혹(四十不惑)’에 접어드는 세대로서 이 시기는 각자의 삶에 있어서도 대단히 중요하고 관건적인 시기이다. 그런데 하루하루의 자기 삶을 살아내기도 벅찬 이들이 무엇 때문에 부디(사전적인 ‘바라건대’,  ‘꼭’,  ‘아무쪼록’의 뜻이 아니고  ‘하필이면’, ‘어찌하여’, ‘꼭’의 북쪽방언) “여기서 우리가 이렇게 살았다”라는 것을 “가장 잘 보여줄” 것을 고민해야 할가? ‘여기’가 어데인데? 그리고 ‘우리’가 무엇인데? 나 하나만 잘 살면 될 일을 굳이 ‘여기’와 ‘우리’까지 곁들어 걱정하며 부질없는 고민을 보태고 있을가? 여기까지 적고 보니 나도 바로 20년전에 이들과 똑같은 화두로 고민하였던 기억이 떠오른다. 지난 1999년, 내가 《연변문학》 한국지사장 임명장을 들고 서울에 갔을 때 눈앞의 종로와 을지로, 강남의 고풍스럽고 모던한 건물이 섞여있는 눈부신 네거리 너머 하필이면 두고 온 두만강기슭, 백두산 아래의 연변이 자꾸 떠올랐던 것이다. 그래서 씌여진 시가 련작시 <연변>이다. 후에 이 시편들이 《장백산》 모드모아문학상 수상시집에 선정되여 책으로 나올 때 나는 고마운 말씀을 이렇게 적었다. “먼 북쪽하늘을 넋없이 바라보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리운 산천, 그리운 얼굴들이 비껴있을 것만 같은 하늘, 한 오리 하얀 연기를 타고 아버지, 어머니가 올라가 계시는 하늘, 그리움이라는 단어 하나로 파랗게 열려있는 저기 하늘을 고개 들어 바라만 보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또한 문제이다.  현재의 ‘70, 80후 세대’인 그들 그리고 20년 전, 그때의 ‘70, 80후’였던 ‘50, 60후 세대’인 나는 무엇 때문에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 같이 똑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을가? 그것은 현재의 이들이나 나 본인이나 비록 한 세대라는 시간적 차이로 나눠져있으나 모두 ‘조선족’이란 이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조선족’, 이것이 문제이다. 현재의 ‘70, 80후 세대’들이 적어낸 ≪조선족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고민과 그 고민과 마주선 당당함이 가득 차있다. 그렇다. 우리는 모두 ‘조선족’이란 부름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조선족은 연변지역을 주요한 생활기반으로 하고 있다.  1900년대 룡정에 온 초기이주자들은 도랑물을 에워 논을 풀고 벼농사를 시작하였다. 지금도 룡정에서 조선 회령으로 가는 길목인 대교동 일대에서 당시 관개시설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이렇게 새로운 삶의 터전을 이룬 이들은 ‘조선족’이란 이름으로 중국 동북 땅에서 새롭게 태여났다. 이 이름은 비록 1945년에서 1949년을 지나 1952년에 공식적으로 부여받은 이름으로 아직 100년도 채 안 되는 이름이지만 중국에서는 가장 빛나는 이름의 하나이다. 중국에서 ‘조선족’은 55개 소수민족 중에서 문화와 교육, 전통과 풍속 그리고 삶의 질 다방면에서 모두 우수한 민족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것은 ‘조선족’이란 이름이 하늘에서 떨어져내린 것을 그냥 거저 가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할아버지, 아버지들이 땀과 피로 바꿔온 이름이기 때문이다. 이네들은 룡정 대교동이야기에서처럼 찬바람 불어오는 허허벌판 드넓은 광야에 괭이를 박고 논을 풀며 맑은 샘가에 하얀 마을을 짓고 삶의 터전을 일궈냈다.  1919년 룡정의 ‘3.13’만세운동과 봉오동, 청산리 전투 등 침략자 일제와 격전을 벌이고 국민당을 뒤쫓아 황하, 장강을 넘어 해남도까지 달려갔으며 공산당의 공화국 건립에 기여하였다. 이로 하여 중국의 최고 지도자는 “중국의 붉은 기발에는 조선족의 피도 물들어 있다.”라고 하였고 중국의 한 유명한 시인은 조선족이 모여 사는 연변을 “산마다 진달래요, 마을마다 렬사비”가 서있는 고장이라고 칭송하였다. 
▲ 석화, 시인.
 그래서 쓴 시가 련작시 <연변>의 머리시인 <천지꽃과 백두산>이다. 이 시는 중국에서 조선족중학교 교과서에 실렸고 한국의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등재되였다. 이 시에서 연변은 ‘백두산’과 ‘두만강’ 그리고 ‘천지꽃=진달래’의 이미지로 그려지고 있다,  천지꽃과 백두산 ―연변  이른 봄이면 진달래가 천지꽃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피여나는 곳이다  사래 긴 밭을 갈면 가끔씩 오랜 옛말이 기와조각에 묻어 나오고 룡드레우물가에 키 높은 버드나무가 늘 푸르다  할아버지는 마을 뒤산에 낮은 언덕으로 누워계시고 해살이 유리창에 반짝이는 교실에서 우리 아이들이 공부가 한창이다  백두산 이마가 높고두만강 천리를 흘러 내가 지금 자랑스러운 여기가 연변이다.  여기까지이다. ‘내가 지금 자랑스러운 연변’과 ‘조선족’은 언제부터인지 한국의 티비 코미디프로그램에서 멍청하고 웃기는 역으로 등장하고 그것도 모자라 스크린에서는 사회악의 대명사, ‘깡패’의 단골메뉴로 비춰졌다. 물론 뉴스에서도 살인, 그것도 무시무시한 토막살인의 장본인으로 ‘조선족’이 호명된다. 힘들고 거친 건설현장과 같은 3D업종에는 조선족 남자들이, 식당, 노래방 같은 서비스업종에는 조선족 여자들이 하루하루를 버틴다. 이 장면을 바라보는 ‘70, 80후’들, 바로 그 전세대인 ‘50, 60후’의 시선과 사뭇 다를 수 밖에 없는 현실이다. 이것이 문제이다. 그래서 쓴 시가 ‘어떤 론리’이다.  어떤 론리 ― 나무일지   은행나무 옆의 은행나무 한 그루는  은행나무.   도토리나무 곁의 도토리나무 한 그루는 도토리나무.   밤나무 옆의 밤나무 한 그루는  너도밤나무?   세상의 만물과 현상은 모두 자기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이름으로 세상에 존재한다. 존재하기 때문에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름을 가짐으로써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 이름에는 지시하는 대상의 형태, 속성 모든 것이 담겨있다. ‘조선족’이란 이름도 마찬가지이다. 원해서 그렇게 불러달라고 불리는 이름이 아니라 원래부터 그렇게 정해진 이름이다. ‘조선족’이란 이름의 우리는 때론 현재 조선반도의 남과 북, 두 나라 사람들과 피줄이 같은 것으로 그들도 우리와 같으려니 제 좋게 생각하지만 현실은 아니다. 또한 호적이 있는 중국에서 저기 ‘안쪽동네’ 사람들과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하지만 그것 역시 제 좋은 생각일 뿐이다.  그럼 조선족, 우리는 누구인가? “은행나무 옆의 은행나무는 은행나무”이고 “도토리 옆의 도토리나무는 도토리나무”일지는 몰라도 '밤나무' 옆에서 '너도밤나무'라는 이름으로 생겨난 나무는 결코 그냥 ‘밤나무’가 아니다. ‘너도밤나무’라는 또 다른 이름의 나무이다. 제 아무리 밤나무 곁에 다가가서 친한 척하려 해도 밤나무는 “너도 밤나무 맞아?”라고 되물을 것이다. 이것이 소위 ‘어떤 론리’이다. 요즘 말로 ‘아이덴티티’요, ‘디아스포라’요 할 것이 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다. 팩트이다. 이는 또한 현실이고 운명이다. 사전에서 ‘운명’에 대하여  “인간을 포함한 우주의 일체를 지배한다고 생각되는 초인간적인 힘”이라고 해설한다. 인간으로 태여나서 이런 ‘초인간적인 힘’에 항거할 수 있을가? 그렇다면 그런 운명으로 태여났으니 그냥 “나 잡숴보세요.” 하고 두손 두발 다 놓고 있을 것인가. 베토벤은 웅장한 교향곡으로 <운명>을 지었다. 그러니 ‘조선족’ 우리도 우리 나름의 <운명교향곡>을 지어야 할 것이다. 그 리유를 다음의 시로 적었다.  연변은 간다 ―연변   연변이 연길에 있다는 사람도 있고 구로공단이나 수원쪽에 있다는 사람도 있다 그건 모르는 사람들 말이고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연변은 원래 쪽바가지에 담겨 황소등짝에 실려왔는데 문화혁명 때 주아바이랑 한번 덜컥 했다 후에 서시장바닥에서 달래랑 풋배추처럼 파릇파릇 다시 살아났다가 장춘역전 앞골목에서 무우짠지랑 같이 약간 소문났다 다음에는 북경이고 상해고 랭면발처럼 쫙쫙 뻗어나갔는데 전국적으로 대도시에 없는 곳이 없는 게 연변이였다 요즘은 배 타고 비행기 타고 한국 가서 식당이나 공사판에서 기별이 조금 들리지만 그야 소규모이고 동쪽으로 동경, 북쪽으로 하바롭스키 그리고 사이판, 샌프란시스코에 파리 런던까지 이 지구상 어느 구석인들 연변이 없을쏘냐. 그런데 근래 아폴로인지 신주(神舟)인지 뜬다는 소문에 가짜 려권이든 위장결혼이든 가릴 것 없이 보따리 싸 안고 떠날 준비만 단단히 하고 있으니 이젠 달나라나 별나라에 가서 찾을 수밖에  연변이 연길인지 연길이 연변인지 헷갈리지만 연길공항 가는 택시료금이 10원에서 15원으로 올랐다는 말만은 확실하다.  중국조선족이 100년 이상 중국에서 자기의 민족정체성을 지키면서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연변이란 이 가장 큰 조선족집거구가 있었고 연변을 중심으로 하여 민족문화를 지키고 보존해왔기 때문이였다. 하지만 오늘에 이르러 연변조선족공동체는 흔들리고 있고 이것은 일종의 위기상황으로 표출되고 있다. 연변은 곧바로 조선족의 고향이고 조선족 그 자체이다. 그런데 그 고향, 연변, 조선족이 흔들리고 있다. 떠나고 있다. 연변이 간다. 조선족이 간다.  그런데 이것이 또한 문제이다. 이 시에서 “연변은 간다”고 표현했는데 그럼 연변은 어디로 가는가? 연변은 전통적인 농경사회와 결별하고 낯설고 생소한 도시화, 산업화, 세계화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고 천방지축 달려가고 있는 ‘연변’을 보면서 깊은 우환의식을 밑바닥에 깔아둔 것이다.  상기 <연변은 간다>와 같은 시는 바로 이런 위기상황을 보여주는 것으로 우리 연변조선족의 끈질긴 생존의지와 독특한 개성을 표현함과 동시에 깊은 우환의식을 드러냄으로써 가장 조선족적인 시 정신을 보여주고자 쓴 것이다. 지난 여름, 일본을 방문하였을 때 ‘연변대학 재일본동문회’ 등 여러 단체의 젊은 친구들을 만났다. 일본에서 또 하나의 삶의 터전을 개척해 가는 그들을 보며 가슴에 뜨거운 흐름이 굽이쳤다. 재일본 조선족사회는 지난 1990년대 초반, 중국 조선족 류학생들의 일본진출과 더불어 형성되기 시작하여 현재까지 30여 년의 려정을 거치며 성장을 거듭해왔다. 그간 학업과 창업에 이어 가정을 이루고 삶의 터전을 닦으며 명실공히 하나의 사회공동체를 이루어냈다. 나는 그들이 걸어왔고 또 걸어가는 길이 현재 ‘조선족’의 문제에 주는 하나의 답이고 대안일 수 있지 않을가 하고 생각해 보았다. 그 리유는 태초부터 인류는 이동으로 력사를 써왔으며 우리 중국조선족이 원래부터 이동하는 민족이였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 몸에 락인처럼 찍혀있는 ‘몽고반점’은 유목민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증거이다. 이를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가 그의 저서《차이와 반복》에서 제시한 ‘노마드(Nomad)라는 용어로도 이야기할 수 있다. 인문학분야에서 자주 거론되는 이 용어는 사전적으로는 ‘유목민’, ‘류랑자’를 뜻하는 말이지만 일반적으로 공간적인 이동뿐만 아니라 특정한 삶의 방식에 매달리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바꾸어가며 창조적인 행위에 바탕을 둔 삶을 영위해 가는 현대인의 새로운 생존전략을 통털어 지칭하는 말로도 쓰인다. 
 
 우수한 인재들로 형성된 재일본조선족사회, 현재 7만명에 이르는 그들이 일본이라는 새로운 땅에서 학업을 이룩하고 펼쳐내는 삶의 현장은 우리 중국조선족사회의 하나의 희망으로 떠오르고 있다. IT, 공학, 의학, 무역, 교육 및 비즈니스와 서비스 등 다방면에 걸쳐 우수한 실력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연변을 중심으로 지난 100년간 농경사회를 기반으로 이뤄졌던 조선족사회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도시산업화의 새로운 사회적 기반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지난 19세기부터 간도라 불린 연변을 비롯하여 동북 3성의 시골에서 살아온 조선족들도 오늘의 21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시골을 벗어나 중국의 북경, 상해, 청도, 대련 등 화려한 대도시와 일본 등 새로운 천지에 새 삶의 터전을 열어가고 있다.   지난 100년 동안 우리는 그냥 중국조선족으로 살아왔다. 그런데 살다 보니 우리는 또 어디론가 가고 있다. 한 그루 나무처럼 한 자리에 뿌리박고 살아가려고 하였는데 세월은 우리를 싣고 어디론가 떠나고 있었다. 이것이 문제이다. 이것은 하나의 변화이며 이는 또한 시대의 흐름이 ‘조선족’에게 운명처럼 부여한 새로운 이름이기도 하겠다. 최근 한국 연세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은 전은주 양은 이렇게 말한다.  “최근 들어 ‘이동’과 ‘정보화’라는 키워드가 조선족의 삶에 등장하면서 조선족들은 공동체의 운명에서부터 자유로운 ‘개인’으로 실존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 ‘개인’들은, 공동체나 외부의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순수하게 독립적으로 자신만을 위한 혹은 자신에 의해서 자신만을 통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 ‘개인’들은 ‘연변축구’에 열광하기도 하고 조선족사회의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에 대하여 분노하기도 하고 적극적인 대응도 실천한다. 그 ‘개인’들은 연길에서, 북경에서, 상해에서, 서울에서, 도꾜에서 또는 하노이에서 ‘개인’의 글쓰기를 통해 다시 ‘조선족’이라는 공동체를 재호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시대가 바뀌고 방향이 바뀌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제 더 이상 공동체가 그들을 규정하지 않는다. 거꾸로 조선족 하나하나가 개인의 이름으로 조선족을 구성하기 시작한다.이제 그들은 스스로 조선족의 ‘주체’로 ‘자처’함으로써 존재하기 시작한다. 물론 그 개인들의 탄생은 아직 신생아 단계에 불과하지만 조선족 개인들의 ‘출현’은 분명 조선족 사회의 새로운 지평을 열 것이다.” ≪조선족으로 산다는 것 —70, 80 후의 삶, 앎, 꿈≫은 현재의 ‘70, 80 후’들이 바로 전세대인 ‘50, 60 후’세대가 쓴 련작시 <연변>의 ‘이어쓰기’라고 봐도 무방하겠다. 그 “연변은 간다”, 어디로? 바로 도시화, 산업화, 세계화를 향해 가고 있다. 그리고 그 길은 어디까지… 그건 ‘조선족’이 오늘 여기까지 왔던 것처럼 아직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이런 시를 썼다.    길을 걷는 나무 ―연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모른다. 아무도 그저 락엽이 내리고 내리고 내리고 또 내리여 흙으로 쌓인 여기서 마침내 움이 트고 아지 뻗고 잎이 피고 키가 자라 한그루 나무라는 이름을 가졌을 뿐이다.  다시 또 어디로 어떻게 가는지 모른다. 누구도  개미의 하늘과 다람쥐의 하늘과 솔개의 하늘과 하늘하늘 하늘의 키를 재며 나이테를 감고 겨울과 봄, 여름, 가을의 산등성이를 가로지르며 이제 또 어디까지 어떻게 가는지 모른다.   나무는 그냥 걷는다 길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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