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춘혁 시인 시 일별

[서울=동북아신문]필자가 작년 '동포 문학' 출간식에서 박춘혁 시인의 시를 읽기 전에 그와 풋면목을 익히게 되었다. 회의 장소를 사람들과 문의하면서 찾아 입장하였는데 나올 때에는 그만 길을 헷갈려 어디로 갈지 몰라 망서리고 있을 때 미남인 박춘혁 시인이 나타났었다. 나는 그에게 출구를 묻고서 이렇게 말했다.

“제가 쉽게 들어왔는데 나갈 떄는 안 되네요”박춘혁시인은 너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그럴 수도 있지요.” 그때의 대답이 내게는 위로가 됐다. 그렇다, 우리의 일상에서 때로는 실수 할 때가 있는 것이다, 그떄 비난하거나 질책할 대신에 누군가 "그럴수도 있지요.”라고 말 한 마디 해 준다면 그 사람은 위안을 받을 것이다. 우리 인생살이에서도 이렇거니와 문학 작품을 쓰는 작가들이나 평론가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작가들마다 개성이 부동하고 창작 경향이 다르기에 그들이 써낸 작품이 모든 독자들과 평론가들의 구미에 딱 맞을 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박춘혁 시인의 말 "그럴수도 있지요"가 창작과 문학평론에도 적용된다고 본다.  아래 박춘혁 시인의 시를 살펴보자. 그의 시어는 집약되었고 수법이 해학적이다. 그의 시 '바람'의 전문을 보면 이렇다.  "바람아 꽃 함부로 꺾지 마라/ 탐나거든 그냥 지켜보아라.// 활짝 폈다 질 때까지" ‘불교 문학 2018,2.19’)  사림들은 아름다운 것을 보면 꺽고 싶어한다. 만약 고운 꽃을 꺾어 집에 들여 오면 본인은 그 꽃을 소유했지만 자연의 미를 파괴인 것이지 결코 아름다움을 보존한 것은 아니다. 이미 결혼한 남여우정 사이에도 그렇다. 둘이 서로 도우며 지내다가 도덕적 한계를 벗어나서 행동했다면 일시적 쾌감은 느낄수 있었겠지만 우정이라는 이 선성한 아름다움을 이미 파괴한 것이다. 때문에 아름다움은 점유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소중히 여기는 보호에 있는 것이다.   필자는 이성 친구들과 상종할 때 상대방에게 너무 친절을 베풀지 말라고 충고를 주곤 한다. 사람은 항상 자아 보호의식이 있어야하는데 여성의 경우 더욱 그러한 것이다. 여기서 시인은 바람과 꽃의 관계를 설정하여 미적 감수와 보호를 잘 표현하였다. 바람은 사회의 사악한 세력, 꽃은 순박한 서민들이다. 최하층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서민들을 도와주지는 못할지언정 그들에게 피해는 주지 밀이야 하는 것이다.  시 '그리울 때면’의 전문은 이렇다. "강을 두고 마주하여/ 사나이 눈물 흘리느니/차라리 술로 채워/바닥 말라 찢어지도록/건배건배! 건배! 달을 보고 원망한들/하늘의 별이 들어주랴/사랑도 미움도 떨쳐버리고/비없는 구름처럼 흔적없이 떠나라/위하여! 위하여! 위하여!-"(국제문단’2016년 추석) 이 시는 사나이의 그리움을 강과 술이라는 매개물을 통해 잘 표현하였다. 그리움은 기다림에서 표현되고 기다림이 곧 사랑인것이다. ‘꿀은 달아도 벌은 쏜다’고 사랑은 고통을 동반하는 것이다 .사나이는 피를 흘릴지언정 웬간해서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여기서 시인은 눈물과 술이라는 두 액체를 유기적으로 잘 결합하여 그리움을 생동하게 표현하였다.  ‘꽃샘추위’ 전반 부분은 이렇다. "3월의 어느 화창한 정원/소녀들이 향기를 풍기며 깔깔댄다/1년 만에 다시 만나/할 얘기들이 많은 가봐/민들레의 달콤한 첫사랑에/수줍게 미소 짓는 개나리/히아신스의 보라빛 사연에/영원한 사랑을 꿈꾸는 튤립" ‘현대시선’2018. 3. 14’)  이 시는 춘흥이 시작되는 시절에 사랑을 꿈꾸는 모습을 생동하게 그려냈다. 소녀시절은 돌멩이가 대그르르 굴러가는걸 봐도 웃음이 터지는 시절이다. 예쁘고 천진란만한 소녀들의 웃음소리가 방불히 귀전에 들려오는 것 같고 상긋한 향기가 풍겨와서 코를 간지럽히는 것 같다. 이렇게 보는 듯이 손으로 만지고 후각으로 냄새를 맡는 것처럼 시를 쓰기란 쉽지 않은 것이다. 여기서 꽃샘 추위와 소녀는 인생의 서곡인 것이다. 봄은 계절의 시작, 소녀는 인생의 시작이다. 한 남자를 배양하는 것은 그 한 사람을 성장시키는 것지만 한 소녀를 배양하는 것은 한 민족을 성장시키고 나아가서는 한 나라를 보호하고 구하는 것이디. 왜서? 소녀가 성장하여 어머니로 되어 서민, 영웅, 대통령을 낳아 육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공작새가 날개를 펼치면 앞 모습은 아름다워도 뒷모습이 추한 것처럼 모든 작품에 미흡한 점이 있듯이 박춘혁 시인의 작품도 예외가 아니다.  그의 일부 시에는 언어 유희가 좀 섞여 있다. 시는 정신 재부이기에 주제와 표현수법은 더 말할 것도 없고 토 하나 문장 부호 하나까지에 심혈을 기울려야 비로소 참다운 창작태도라 하겠다. 필자의 ‘진단’에도 미흠한 점이 있을 것이니 시인과 독자들의 양해를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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