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은경 약력: 소설가. 중국 화룡 출생. 서울여자대학교 문학박사.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는 우리에게 익숙하다. 예전에는 가족관계로만 보이던 것이, 최근에는 이 이야기를 들춰볼 때마다 재한 조선족들이 한국이라는 ‘친정’을 찾아온 ‘선녀’와 비슷한 신세에 처해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선녀’가 앞으로 ‘천상’에서 살아갈지 ‘지상’에서 살아갈지 궁금해 하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자네는 한국과 중국이 축구경기를 하면 어느 쪽을 응원할 텐가?”
십년 전, 갓 한국에 왔을 때 이런 질문을 여러 번 받았다. 친밀감 때문이든 단순한 호기심 때문이든 당시 나는 반복되는 이 질문 자체가 유치해보이기도 했고, 괜히 편 가르기를 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얄팍한 처세술을 발휘해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로 대답을 회피하곤 했다.
시간이 지나서 그 질문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니 이런 의미도 포함되어 있지 않을까 싶었다.
“조상 대대로 우리와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만, 중국 국적을 지닌 당신은 누구입니까?”

얼마 전, 한 후배가 진지한 질문이라는 전제를 단 문자를 보내왔다.
“한국에서 학위를 받고 왜 연변 혹은 중국으로 돌아올 생각 안하고 한국에 머물러 있지? 조선족, 특히 재한 조선족들의 앞으로의 삶의 터전은 연변이라고 생각하나? 아니면 한국에서 차차 한국인으로 살아가는 것(특히 재한 조선족들의 아이들)이 맞다고 생각하나?”
부당하지도 새삼스럽지도 않은 질문인데 괜히 울컥했다. 후배의 직업적•민족적 사명감으로 볼 때 이 질문은 중국 조선족의 미래에 대한 걱정에서 연유한 걸로 안다. 그러나 은연중에 이런 의도를 감춘 게 아닐까.
“조선족인 당신이(혹은 당신의 후대가), 오리지널 한국인도 아니면서 한국에서 ‘한국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행복할까?”

 

차규근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장(앞중 가운데)이 지난해 9월 28일 민관협의체 위원들과 함께 대림역 인근지역을 돌아보고 있다.

요즘따라 한국이나 일본에 있는 친구들과 대화하면서 체념한 듯, 공감하게 되는 부분이 있다. 처음 외국 땅을 밟을 땐 그저 잠깐 머물다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갈수록 ‘집’이 멀어지는 것 같다는 넋두리이다. 일본유학을 간 친구는 15년째 살다보니 연호가 헤이세이에서 레이와로 바뀌어 본의 아니게 두 시대를 살게 됐다고 했다. 나 역시 금방 중국으로 돌아가 제도권 내에서 성실한 직장인으로 살아갈 줄 알았다. 그러나 이젠 돌아가려 해도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해졌다.

 

여기까지는 왜 여태 한국에 머물러있냐는 후배의 질문에 대한 나름대로의 변명이다. 그러나 조선족들의 앞으로의 삶의 터전에 대한 다음 질문은 오랜 여운을 남겼다. 나는 몇몇 단어만 바꿔서 후배에게 되물었다.
“중국에서 대도시로 이주한 조선족들은 앞으로의 삶의 터전을 연변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그곳에서 차차 한족으로 살아가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중국 내 대도시로 이주한 조선족들에게 계속 거기서 살 거냐는 질문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이다. 북경이나 상해, 심천 등지에서 살아가는 지인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본 적이 없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혹여 그들이 조선어를 할 줄 모르는 날이 오더라도 신분증에 조선족이라는 세 글자가 빠지지 않기 때문이다. 똑같이 고향을 떠났음에도 그들은 가끔 나에게 물어온다.
“너는 계속 한국에서 살 예정이니?”
나는 그냥 오늘을 살 뿐이라고 답한다.
일본이나 미국에서 살아가는 조선족들에게도 앞으로의 삶의 터전에 대한 질문이 유효하겠지만 대놓고 묻지는 않는다. 그곳에서 살아가는 조선족들은 온전한 외국인이자 이방인이기 때문이다.

왜 이런 질문이 재한 조선족들을 향하는가.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이유는 한국이라는 공간이 처한 특수성에서 기인한 게 아닌가 한다. 한국에서 조선족들은 외국인이면서도 중국동포 혹은 재외동포로 불린다. 문화적•언어적으로는 미세한 이질성을, 민족적으로는 동질성을 지닌다.

조선족들은 한국에서 살아가면서 ‘같은 듯 다른’ 친밀감을 넘어 좀 더 특별한, 모종의 기대까지 느끼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다른 외국인보다 좀 더 용이하게 한국인으로 ‘둔갑’할 가능성이 크다. <선녀와 나무꾼>의 ‘선녀’처럼 ‘친정’에서 계속 살아갈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특이한 존재적 상황 때문에 사람들은 재한 조선족들이 앞으로의 삶의 터전을 어디로 잡을지를 궁금해 하는 게 아닐까. 게다가 조선족들은 이미 한차례 중국으로 국경을 넘어간 이주전력까지 가지고 있다. 중국의 조선족 인구가 점점 줄어드는 상황으로 볼 때, 해외이주는 국가적•민족적 차원에서 중요시해야 할 시급한 문제이지만 뾰족한 대안도 없는 것이 그 실정이다.

학계에서는 이미 다문화인들이 한국 사회에 온전히 편입되지 못하는 현상을 두고 디아스포라, 주변인, 경계인이라는 다양한 용어를 사용하여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조선족도 이에 포함된다. 경계인이 누구인가. 둘 이상의 이질적인 사회나 집단에 동시에 속하여 양쪽의 영향을 함께 받으면서도, 그 어느 쪽에도 완전하게 속하지 않는 사람이 경계인이다. 더 쉽게 말하면 경계인은 때로 내부인이 될 수도 있고 때로 외부인이 될 수도 있는 주변인이다. 재한 조선족은 외국인 중에서도 특수한 위치에 있는, 한국이라는 ‘내부’에 좀 더 자유로이 편입할 수 있는 경계인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 역사가 저렇게 솟아 세월을 이겨나갈 수 있네요. 혹시 '나무꾼과 선녀'가 저 속에 꽁꽁 숨어 아직까지 알콩달콩 살고 있지 않을까요?...<편집자>

그러나 사회적 공동체 내에서 경계인을 규정하는 판단 기준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불명확하며 자의적이기까지 하다. 기득권자 혹은 다수자에 의해 굳이 외국인이 아니더라도 사회적 범위 안에서 누군가는 경계인이 될 수도 있고 외부인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경계인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왜 지금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다면 언제든 ‘내부’인과 같은 역량으로 존재가치를 발현할 수 있다. 자신의 존재적 속성에 따라 인간관계를 맺고 사회 안에서의 역할과 위치를 결정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을 삶의 터전으로 삼은 이들은 <선녀와 나무꾼> 속 선녀처럼 기로에 놓여있다. 자식과 부모를 중국에 둔 채 부부가 한국에서 돈을 벌거나, 배우자 한명만 한국에서 돈을 벌거나, 부모는 중국에 두고 아이만 한국으로 데려와 함께 생활하거나, 아이를 전탁시키고 부부가 한국에서 돈을 버는 등 수많은 형태의 가족들이 있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부부갈등, 부모자식갈등, 형제갈등 같은 현실적인 문제가 존재하지만 밥을 먹고 사는 문제에 가려있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앞으로의 삶의 터전을 어디라고 생각할까. 나서 자란 고향땅을 떠났으니 어디서든 더 잘 먹고 더 잘 살 수 있는 곳을 삶의 터전으로 생각하지 않을까. 잘 먹고 잘 산다는 것에는, 의식주를 벗어난 모든 분야에서 만족스럽게 생활해나가면서 자아를 실현하는 것까지 포함된다.

최근 들어 재한 조선족들은 미디어에서 조선족을 폄하 또는 조롱하는 현상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며 목소리(영화 <청년경찰>의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한 사건은 하나의 상징적인 의미를 띤다)를 뭉치고 있다. 이제껏 한국사회에 제대로 편입하지 못한 채 그 주변부를 맴돌고 있던 조선족들이 삶의 질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으며, 한국이라는 ‘사회’에 적극 진입하여 인격적•정서적으로 동등한 대우를 받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족들은 이제 본격적으로 경계인의 위치에서 ‘내부’로의 진입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중에는 이미 성공적으로 ‘내부’에 진입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아직 이들을 ‘한국인’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선녀와 나무꾼>은 작품이 마무리되는 지점에 따라 ‘선녀만 승천’, ‘나무꾼 승천’, ‘나무꾼 지상회귀’, ‘동반 하강’의 네 가지로 분류된다. 분명한 건, 선녀의 삶은 ‘지상’에서도 ‘천상’에서도 순탄하지는 않았다.

 

 

 

 

<대림칼럼>은 동북아신문과 흑룡강신문의 공동주최로 이어집니다.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