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신문=이동렬 기자]우상렬 교수의 수필은 물이 흐르 듯 부드럽다. 흐르는 물에 산을 담고 구름을 담고 인간만사를 담아 필가는데로 일필휘지 하듯 자유분방하다. 독자가 보고 느끼 듯이 알기 쉽게 마치 독자의 피부에 닫 듯이 글을 써내려간다. 그러나 결코 글의 구성과 맵씨가 흐트러지지 않느다. 중국과 북한과 한국과, 프랑스 등 나라에서 교수, 또는 교환교수로 있으면서 그 나라의 정치 경제 사화 문화 역사 인문 세태들을 눈으로 보고 느끼고 공부한 것들을 풍부한 감수성과 지성으로 구수하게 엮어나간다. 그래서 그의 수필들은 마치 수필인 듯 아닌 듯, 르포인 듯 아닌 듯, 소설인 듯 아닌 듯 , 칼럼인 듯 아닌 듯 아무려나, 그 경계를 자유롭게 허물며 순수한 글의 금맥을 찾아 줄기차게 풀어나간다. 사회의 직분을 내려놓고 세상과 대화를 하며 될수록이면 각을 세우지 않고 부드럽게 포용하면서 소탈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자신의 품성을 글이란 그릇에 담아 인생의 멋진 그림을 그려가는 것 같다...<편집자>

 

우상렬 약력 : 연변대학조한문학원 교수,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박사생 도사(导师), 연변작가협회 이사. [연구방향] : 중조일문학연구. [주요 강연 과정]: 글쓰기 기초, 문학 개론, 미학 개론, 문학 비평 방법론 등. [저서] : 2009년 조류와 한류의 비교문학 연구(한국학중앙연구원 2009년 7월~2009년 12월) , 2015년 국가사회과학원기금 중점입찰사업 20세기 동아시아 항일서사정리 연구 자과제(子课题) 담당자 등 10부. (구체 약력 하단 참조)

 

 

차례

1. 영삼이, 대중이
2.「우형, 언니, 우리 식구」
3. 한국사람과 장사
4. 쓰레기는 저를 주세요!
5. 신토불이
6. IMF의 이모저모
7. 한국사람과 외래어
8. 홍도야, 울어라! 오빠가 달려간다

 

   하고 싶은 말

 

나는 시요, 수필이요, 소설이요 하는 것들을 모른다. 거저 대학교 때부터 하고 싶은 말을 하며 막 글을 써내려 왔을 뿐이다. 一筆揮之, 一瀉千里가 나의 경지다. 그 무슨 한 글자 며칠, 몇달 내지는 몇 년만에 얻어 냈다는 고대 명필들의 말은 나에게 가당치 않다. 나는 그것을 우습게 본다. 거저 할 말을 다 하며 막 써내려 가다가 할말이 없을 때 끝마치는 것이 나의 글이다. 평론가들이 무엇이라고 결론을 내리든지 내가 상관할 바 아니다. 一筆揮之, 一瀉千里이기에 나의 글은 거칠고 난삽하다. 일관된 논리가 없는 제 멋대로다. 말구만 보아도 중국조선족투에 남한투에 북한투에 여기다 경사도, 전라도 투까지 합세하여 말 그대로 오구잡탕이다. 본인이 경상도, 전라도 자식인 데다가 조선족 그리고 남한에 한 몇년, 북한에 한 1년 있다 보니 자연 짱뽕된 것. 그러나 이것이 바로 누구도 다 잘 알아보는 통일체라는 알량한 마음은 살아 있어 일말의 안스러움도 없이 태연자약. 편폭도 짧은데서 긴 데로, 여기에다 중질짜리까지 들쑹날쑹. 반듯한 인쇄글로 찍혀 나왔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으면 글씨도 세상 둘도 없는 꼴볼견… 一筆揮之, 一瀉千里하고 나면 돌아보며 좀 정리하는 맛이 있어야 되겠는데 나는 거저 통쾌한 멋에 도취되어 그것으로 만족하고 만다. 미안한 소리지만 나는 독자들을 그리 의식하지 않는다. 거저 내 좋아 내 멋에 찧고 빻구 한다. 내 글이 누구누구에게 읽히기를 그리 바라지도 않는다. 나는 내 글이 누구누구에게 어떤 사상영향을 주리라고도 기대하지 않는다. 나는 뭐 거창하고 심오한 논의를 전개한 작품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거저 가볍게 홀가분히 읽을 수 있는 것들을 좋아한다. 그래서 내가 써낸 모든 것들에 대해 나는 정중하고 대단한 맛을 풍기는 창작이요, 작품이요 하는 말들을 버리고 항상 거저 내 생김새와 같이 막 쓴 글들이라고 한다. 나는 바로 요 모양이다. 문제가 많은 줄로 안다. 그러나 똥집 하나 세서 아무리 고치려고 해도 이것 하나만은 죽어도 못 고치겠다. 나는 나니깐!

현재 얼마간 손에 있는 초라한 글이나마 곱게 보아주고 선을 보이게 한 이후출 사장님께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하는 바이다. 기회가 되면 다음에「하고 싶은 말」을 하나 더 막 해볼까 한다.

   

1. 영삼이, 대중이 

 

나는 한국에 있을 때 처음 영삼이, 대중이 소리를 듣고 벌뚝 놀랐다. 한국 사람들이 자기네 대통령 이름을 애 이름 부르듯이 마구 부르니 말이다. 나는 그때 옆의 한국친구들에게 어떻게 대통령이름을 함부로 부를수 있는가고 물어 보았다. 거저 대통령이니까 부른다는 것이다. 그 대답이 나를 맥삭하게 만들었다.

한국사람들은 어른들의 이름을 잘 안 부른다. 어른들의 이름자뒤에는 꼭 자(字)를 붙여 또박또박 읽는 것으로 존경을 나타낸다. 영삼이, 대중이(나도 좀 이렇게 불러보자)는 60대에 들어서 대통령자리에 앉았다. 아무리 60이 청춘이이라고 하지만 영삼이, 대중이는 분명 로인줄에 들어섰던 것이다. 감출수 없는 영삼이의 백발, 지울수 없는 대중이의 주름살은 뛸데 없는 로인의 백발, 주름살이었던 것이다. 영삼이, 대중이는 존경을 받아야 한다. 로인, 아니 적어도 어른으로서 존경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영삼이, 대중이는 이름을 마구 불리우며 분명 그리 존경을 받는 것 같지 않다. 이것이 대통령의 업보면 업보라는 것이란다. 이것이 이른바 민주화라는 것이란다.

나는 한국의 대통령이 불쌍해났다. 아무리 대통령질(노릇?)을 잘 하려고 노력해도, 또 아무리 훌륭한 치적(?)을 쌓았다하더라도 서민들은 “못하려”고 노력한 것, 졸렬한 “업적”밖에 보아주지 않으니 정말 쩔쩔매는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참, 한국은 누가 대통령해도 힘들어.

한국사람들은 분명 대통령을 우습게 본다. 선거니, 투표니 뭐니 해서 대통령자리에 앉혀 놓고는 쩍 하면 데모(우리가 말하는 시위행진)니 뭐니 해서 물러나라고 한다. 그러면 대통령은 쩍 하면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며 미안해요, 죄송해요하다못해 눈물까지 짜기도 한다. 대통령은 확실히 이 데모 잘 하는 초개 민생들이 두려운 듯 하다. 한국의 대통령은 자기한테 할 말이 있으면 언제든지 하라는 식으로 자기가 거처하고 있는 근처에 전통적인 신문고(伸聞鼓)를 받쳐놓았다한다. 참, 그 민주화란 것이 무엇인지···

한국은 아름다운 민주화의 꽃을 피웠다. 민주화의 꽃은 사시장철 곳곳에 피고 있다. 대통령 선거는 더 말할 것도 없고, 지방자치지까지 실시하고 있다. 일개의 리장(里長, 우리 여기의 촌장에 해당함)까지도 전 리민의 투표에 의해 선출된다.

한국사람들의 민주화의식은 어려서부터 싹터고 키워진다.

내가 한국에 있을 때 한 번은 한국친구하고 독재니 민주니 하고 한바탕 입씨름을 했다. 그랬더니 그 친구는 나를 자기가 담임선생을 맡고 있는 반의 반장민주선거 구경을 오라고 했다. 그는 초등학교(우리 여기의 소학교)1학년 신입생담임선생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 꼬마들이 민주요 뭐요 하는 것을 알기는 뭐 알겠는가고 코웃음을 치다가 그래도 호기심이 동해 구경을 갔다. 그날 나는 참 많은 것을 배웠다. 내가 본 것은 워낙 일반 구경거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꼬마들이 귀였다못해 존경스럽게 느껴졌다.

“이제부터 우리반 반장선거를 하겠습니다…” 담임선생의 말이 떨어지게 바쁘게 반장이 되고 싶은 사람들이 앞다투어 교단에 올라 자기가 반장이 되어야 한다는 일장 열변을 토한다. 대개 다 자기는 어떻게 어떻게 훌륭한 사람인데, 이제 자기가 반장이 되면 어떻게 어떻게 잘 하겠다는 식으로 론제를 전개해나갔다. 연설이 끝나면 의례 청중들과 연설자사이에 열띤 질문과 답변이 어지러히 오고 간다. 그러면 담임선생은 칠판에다 나오는 순서대로 기호 1, 2, 3, …식으로 연설자들에게 번호를 매겨 나간다. 그 번호는 연설자가 더 없을 때까지 매겨 나간다. 그러면 번호가 매겨진 학생들은 반장 후보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누구든지 반장이 되고 싶은 사람은 모두 후보가 될 수 있는 셈이다. 열변을 토할 사람이 더 없게 되자 곧 무기명 투표가 시작되었다. 담임선생을 포함한 전 반의 학생들이 유권자인 셈이다. 그들은 그 누구의 연설을 잘 했고 믿음성이 있다는 제 나름대로의 판단에 의해 기호 몇번 식으로 투표지에 살짝 적어 투표함에 넣는다. 물론 기권할 수도 있다. 투표가 끝나면 담임선생은 투표함을 열고 꼬깃꼬깃 접은 투표지들을 펴고 기호 1 몇이, 기호 2몇이…식으로 칠판에다 후보들의 득표수를 체크해 나간다. 득표수 통계가 끝나면 득표수 최다수기호가 곧 반장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 최다수득표 기혼는 열렬한 박수갈채 속에서 반장 취임연설을 하게 된다. 이때로 부터 그는 반장의 절대적인 권리를 행사하고 신성한 의무를 이행하게 된다. 이 반장의 임기는 한 학기를 단위로 한다는 것이다. 전반 선거과정을 보면 담임선생은 두말한 것없이 뽀이에 불과한 존재였다.

이것이 민주선거라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기회가 주어지고 거짓없이 자기를 나타내 객관의 평 판 속에 권리과 의무를 부여받으며 끊임없이 새롭게 난다는 것이다. 그 담임선생도 좋고 그 꼬마친구들도 좋고 그들은 민주요 뭐요 하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일거일동으로 분명 민주를 실현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민주는 워낙 몸에 배어 체질화된 것이었다.

한국의 대통령선거는 가히 위 아이들의 반장선거의 전 국민적 확대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내막을 뒤집어 보면 아이들의 민주에는 못미치는 듯하다. 아직도 그것은 초기 단계로서 성숙된 단계는 아니다. 대통령선거는 워낙 국가의 운명과 관계되는 일이라 해서 그런지 그 후보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닌 듯하다. 아무나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주로 경제적 제약을 가한다. 무소속의 단독출마인 경우 반드시 선거위원회에 몇억이라는 엄청난 돈을 예치해야 하며 낙선될 경우 규정된 투표율에 도달 못했을 때 그 예치금 몇 억은 곧 바로 날아나게 되어 불이익을 당한다. 그러니 일반 서민은 물론 웬간한 사람도 그 실제적 출마는 불가능한 것이다. 아이들 선거에서 풍기지 않는 더러운 돈 냄새가 물씬 풍겨 나온다. 그리고 겨우 입후보한 사람들은 서로 상대방을 꺼꾸러 뜨리기 위해 혈안이 되어 우선 자기를 널리 알리는 광고에 무진장 투자한다. 우선 수많은 전문 선거운동원들을 고용한다. 그런 다음 이런 선거운동원들로 하여금 휘황찬란한 명함을 돌리게 하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어마어마한 프랑카트, 포스트들을 제작하여 곳곳에 걸고 붙이게 한다. 때로는 돈 뭉치를 돌리기도 한다. 그리고 귀에 따까리가 앉을 정도로 기호 몇번, 몇번하며 고아댄다. 고성스삐까지 동원해서 말이다. 이 모든 것은 실로 돈의 “세례”를 거치지 않은 것이 없다. 한국의 정치는 우선 이런 돈 냄새 때문에 망한다고 한다. 돈폭격을 들이대 이러저러한 보좌에 앉게 되면 정치인들은 시기가 지나면 무용지물(過期作廢)이 되고 만다는 권력을 최대한 휘들러 이제껏 투자한 자본의 리윤을 “절대시간”에다 “상대시간”을 합승시켜 배가로 추구한다. 이로부터 금전의 비리가 생리화된다.

그리고 대통령 입후보들의 민심낚기 대 국민 연설 및 대화도 듣기 좋은 미사여구로만 가득 차 있다. 말 그대로 민심낚기이다. 실현하지도 못할, 그러나 듣기에 좋은 호언장담을 열주포처럼 쏘아댄다. 내가 대통령이 되면 한국이 하루아침에 선진국대열에 들어선다는둥, 남북한이 하루아침에 통일이 된다는둥… 그야말로 기상천외의 ‘천방야담‘이다. 여기에 위 반장선거아이들 입후보자들의 그 내심으로부터 우러러 나오는 또박또박 내뱉는 거짓 없는 진심 하나가 아쉽다.

한국의 정치는 이런 아쉬움에서 부터 멍이 든다고 한다. 그 거창한 공약에 가슴이 가득 부풀어 어제나 저제나 하고 목을 빼들고 기다리던 서민들은 그만 어느 하루아침에 물앉고 만다. 정치에 실의를 느끼게 된다. 될 데로 되라는 식으로 마음은 허탈과 불신에 빠지게 된다. 대통령선거요, 지방자치제선거요 하는데 투표율이 점점 낮아지는 근본 원인은 바로 이런데서 찾아야 한다.

아이들의 그 돈 안 드는 깨끗한 선거, 그 진실 하나로 말하는 선거…그것이 아쉽다. 너네 우리 어른들에게 말이다. 

 

2. 「우형, 언니, 우리 식구」

 

다음 역은 ××× 입니다. 내리실 분은 잊어버린 물건이 없는가를 잘 확인하시고 내리십시오. 내리실 때는 승강장과 열차 사이 틈이 넓으니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 주십시오. 그 다음 영어로 다시 한번 반복. 안내양의 은방울 굴리는 듯한 미스 목소리. 잃어버릴세라, 빠질세라 다심한 어머니 같은 서울 지하철의 안내방송. 정다운 서울, 아니 한국이여!

어, 우형 왔구만. 반갑다이, 한 잔 해야 되지. 내가 처음 서울 갔을 때 이미 전부터 알고 지내던 나이 지긋한 박사장이 나를 반겨 맞으며 하던 말. 순간 나는 좀 어리뻥뻥해 났다. 왜 나를 형이라 부르지? 내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분이 말이다. 아마 잘 못 불렀겠지. 그러나 다음 순간 소주잔을 기울이며 한잔 할 때도 박사장이 우형, 한잔 쭉 내라구 하며 자꾸 우형, 우형 하는데는 나로서는 더는 궁금함을 금치 못했다. 분명 박사장이 의식적으로 그렇게 부르고 있지 않은가? 얼마나 똑똑한 박사장인데 말이다. 그래서 나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지고 송구스러워 났다. 박사장님, 저를 왜 자꾸 형이라 부릅니까? 동생벌이 아닙니까? 거저 이름을 불러 주십시오. 그래야 제가 마음이 편하지요. 아, 이 사람, 자네야 내 동생이지. 그러니 그렇게 부르는 거네. 우형, 한잔 해. 나의 궁금증은 그대로 남음. 그러다가 분명 내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우형, 우형 소리를 계속 듣게 되면서 조금도 이상한 감이 없이 정답게만 느껴짐. 그러면서 독특한 한국의 정도 얼마간 몸에 와 닿게 되었다. 분명 내보다 나이 어린 동생벌이지만 존경심을 나타내고 싶을 때는 자세를 낮춰 내가 동생벌이 되여 주기도 하는 한국적 인심. 그래서 근엄하게만 느껴지던 웃사람이 동생과도 같은 스스럼없는 정다움을 안겨 주기도 한다.

언니, 여기 소주 한병 더. 분명 오빠벌 됨직한 남자 손님이 새파란 써빙 아가씨보고 웨친다. 성도착증. 정신병자. 나는 내 좋을 데로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박사장이 언니, 여기에도 소주… 나는 두 눈이 둥그래 자기도 모르게 박사장을 빤히 쳐다 봄. 그리고 예, 알았어요 하는 소리와 거의 동시에 곧 바로 달려오는 새파란 「언니」. 참, 알고도 모를 일이다. 여기 저기서 부르는 「언니」 소리에 바빠 나는 써빙 아가씨.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리 놀라울 것도 없다. 「우형」과 같은 논리가 적용되고 있으니 말이다. 너가 사랑스러우니깐 혹은 써빙 하느라 수고 많으니깐 혹은 기분 좋게 써빙 잘 해 달라고 역시 자기 자세를 낮추어 아래 사람 신분에서 정답게 불러 본다. 여기에 성도착까지 가미한다. 그러니 「우형」의 경우보다 그 도를 더 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자기 자세를 낮추는 것은 물론 「성도착」까지 동원하여 인간관계를 정이 찰찰 넘치는 가족화로 수시로 전변시킬 줄 아는 것, 이것은 한국사람의 삶의 지혜.

한국의 회사들도 보면 사장을 비롯한 전반 회사원들이 하나의 가족적인 분위기로 끈끈히 뭉쳐 있다. 사장은 구체적인 업무보다는 이런 가족적인 분위기를 살리는데 더 신경을 쓰는 것 같다. 사장의 입에서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말의 하나가 「우리 식구」. 사장뿐만 아니라 말단 대리에 이르기까지 조그만한 직위라도 갖고 있다면 「우리 식구」를 자주 외우며 자기의 포용력을 나타내고 가족적인 분위기를 돋군다. 우리 식구들 어디 갔지? 이제 밥이나 먹지. 그러면 「우리 식구」들 쭉 둘러앉아 가족적인 분위기 만낌. 그리고는 우리 회사, 아니 우리 식구, 우리 집을 위해 신명을 다 바치는 식구들. 「우형, 언니, 우리 식구」는 한국의 독보적인 존재. 국제특허권 낼만 함.   

 

 

3. 한국사람과 장사  

 

士, 農, 工, 商, 한국전통적인 사회위계질서. 장사 商은 말등. 전통적으로 한국에서 商은 배척을 받았으며 점잖은 사람들이 입에 올리기도 꺼려했던 것이다. 장사치는 이속을 따지게 되며 제 애비도 홀리먹는다는 것이 통념. 문학작품만 놓고 보아도 장사치의 형상은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형편. 근대 실학사상이 싹 터면서 실학자 박지원의 소설 <허생전>과 <양반전>에서 장사치의 형상이 등장. 그런데 이 소설들에서도 장사치는 자아부정적이고 가소로운 존재로 전락되고 있음. <허생전>에서의 허생은 글공부출세를 지향하다가 장사의 길에 나서 성공. 그러나 마지막에 억만금을 바다에 처넣는 것으로 자기 당착과 부정에 빠짐. <양반전>에서 상놈은 장사를 해서 갑부가 되나 양반이 못되어 안타까워하던 나머지 양반신분을 돈으로 사는 희극을 벌림. 한국은 적어도 근대까지만 해도 국내 장사는 물론 국제 장사까지도 부정적인 시각으로 대해 왔음. 근대 자본주의 발전의 일반적 논리와 다른 근대 한국의 침체성과 낙후성이 나타남. 유무상통의 합리성까지도 일괄적으로 배격한 대원군의 봉쇄정책은 그 전형적인 한 보기.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정통적인 관변측 얘기. 전통사회에서 서민이 꽃피운 장사문화 및 그것의 현대적 각광은 단연 돋보인다. 나는 한국의 명물하면 주저 없이 남대문시장, 동대문시장을 꼽게 된다. 생기에 넘쳐 들끓는 가장 서민적인 곳. 남대문과 동대문은 각기 옛날 서울성곽의 4대문의 하나. 남대문시장과 동대문시장은 예로부터 있어온 듯. 전통사회에서 아무리 商이 천시되고 우습게 취급되었어도 서민들은 유무상통의 생활의 방편으로부터 출발하여 자연적으로 장마당을 형성하고 商행위를 했던 것이다. 특히 사람이 많이 들락날락하는 성문 근방에 쉽게 장마당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남대문시장과 동대문시장도 이런 전통적인 장마당으로부터 출발했을 것이다. 현대화적인 대도시안에 돌고돌도 끝이 없는 듯한 대규모 시장의 조성은 물류유통의 대통로를 열고 그기에 활기를 부여하는 필요불가결의 메커니즘.

한국의 남대문시장과 동대문시장은 생활필수품들인 경공업제품들이 많이 유통된다. 특히 의복류가 많다. 그 경영방식은 주로 신 새벽에 진행되는 도매에서부터 밤늦게까지 거의 하루 종일 이어지는 소매. 남대문시장과 동대문시장을 돌면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춤을 추면서 물건을 팔고 있는 듯한 멋쟁이 젊은 총각들. 물건더미 속에 서서 손벽을 치고 발놀림도 해가며 왕창세일, 골라잡아 무조건 몇×천원라고 한바탕 목청을 뽑으면 정말 안 사면 머저리같이 보이기라도 하는 듯 너도나도 앞다투어 사게 되는 소비심리. 그리고 중절 모자에 노란 수염을 해 달고 목에는 아무렇게나 수건 하나 동이고 허리에는 탄띠에 모조권총까지 척 찬 미국 서부영화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사나이가 상점 문 앞의 높은 대위에서 손장단, 발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가며 손님을 끄는데는 안 끌려갈 수 없음. 그리고 우스광스러운 가면을 쓰고 손님을 끌기, 죽장망혜에 초립을 쓴 조선전통복장행색으로 손님을 끌기… 여하튼 일단은 자기 재간껏 손님을 끌기. 그 다음 몇 퍼센트 세일로부터 절반 세일, 왕창세일로 나가며 세일 폭탄을 들이대 소기의 목적 달성. 한국 장사는 세일장사. 서민적인 장사는 이렇게 요란스러운 데가 있다.

그러면서도 섬세하고 묘하고 영활한 데가 있다. 뚝바우 사나이 머리 지긋이 숙이고 지나간다. 아저씨, 이거 좀 팔아 줘요. 뚝바우 사나이 머리 쳐든다. 순간 가냘프게 생긴 새 각시 같은 여인 물건을 들이민다. 뚝바우 물건을 사준다. 그 물건이 비록 자기한테는 필요 없는 것이지만. 좀 팔아 줘요 하는 말에 뚝바우 사나이가 마음이 동했던 것이다. 좀 팔아 줘요, 얼마나 묘한 말인가? 한국장사문화에서만 나올 수 있는 말. 동정심에 호소하는 말이다. 물건 안 팔려 안타까와하는 이내 마음을 이해해 주세요. 그러니 나를 도와 하나라도 좀 팔아줘요. 하나라도 사주면 팔아 주는 것이 아니겠어요? 좀 팔아 줘요는 이와 같이 묘한 인간심리의 변증법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많이 사겠으니 값을 좀 깎아 달라 하면 깎아주기, 여기에 덤으로 한 두개 더 얹어주기… 한국 장사의 사정, 인정이 숨쉬고 있다. 덤으로 더 주기, 한국장사의 전통적인 독특한 인정. 나는 이 전통적인 독특한 인정에 끌려 할머니들이 길가에 벌려 놓은 먹을거리를 잘 찾는다. 소주 한 병에 돼지고기머리 혹은 순대 같은 먹을거리 한접시를 요구한다. 그런데 먹을거리가 없어지기 바쁘게 할머니는 덤으로 자꾸 더 쓸어 놓는다. 나는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이 할머니 이래가지구 돈을 더 받자는 게 아니야 하며 더럭 의심을 하며 기분을 잡친적 있다. 덤문화, 인정어린 장사지혜. 한번은 내가 덤 놓이를 잘 해 주는 한 할머니에게 물었다. 할머니, 이래가지고 장사됩니까? 안되면 그만이지. 심드렁하게 대답하는 할머니의 한마디 소리. 안되면 그만이라, 무서운 소린데. 그만두면 무엇을 한단 말인가? 사실 이런 걱정은 공연한 것. 안될리가 없거늘.

할머니 덤으로 거저 자꾸 썰어준다. 꼭 마치 우리 집 어머니, 할머니 같다. 나와는 벌써 어느새 정이 통하고 오가는 자별난 관계로 변해 버렸다. 그래서 나는 소주 한잔 기울이게 되면 꼭 그 할머니, 덤으로 잘 주는 할머니를 찾게 된다. 나는 어느새 할머니의 단골이 된 셈이다. 그리고 할머니는 나의 단골로 되고. 우리는 서로 서로 단골. 이젠 떨어질 수 없는 한 운명체. 그래서 우리는 이 세월이 다 갈 때까지 같이 가는 거야. 바로 이 덤으로 더 주고받는 덤문화는 한국 단골문화를 이루는 하나의 윤활제가 되기도 했다. 이로부터 한국 장사에서는 그 어느 나라 장사보다도 다정해 보이는 단골문화가 꽃펴난다. 단골집은 내 집 같은 존재, 단골손님은 내 집식구 같은 사람. 그래서 여기서 손님은 왕이고 나는 개새끼, 정확하게 말하면 노예 같은 현대적인 상술에서의 매정한 인격적인 존비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 단골집과 단골손님 사이에는 끈끈한 정으로 맺어진다. 「오실 땐 단골손님/안 오실 땐 남인데/왜 이다지도 그리워지나…」 이 <단골손님> 노래처럼 단골집과 단골손님 사이에는 애틋한 사랑이 싹트기도 한다.

식당의 경우를 좀 보자. 단골손님은 단골집에 와서 넥타이, 양복 정장에 점잖을 뺄 필요가 없다. 집에 온 듯이 아무 옷이나 입고 벌렁 드러누워도 괜찮다. 코를 드렁드렁 고르도 괜찮다. 여하튼 편안히 잘 쉬고 나면 단골집에서는 그 사이 장만한 단골손님이 좋아하는 술과 안주를 내 놓는다. 그리고는 단골손님이 적적할 새라 단골집 주인이 술동무가 되어 줘 한잔 나누기도 한다. 그리고 덤으로 술과 안주도 더 내 오고. 그러면 단골집 주인이 바깥 양반일 때는 허물없이 형님, 동생관계, 안주인일 때는 누나, 동생 내지는 잠간 부부관계, 여하튼 그 장소와 때에 맞게 인간관계에서 맺어질 수 있는 정다운 관계를 맺어 이 세상 못 할 얘기가 없고 만단 회포를 속 시원히 푼다. 그러다가 술이 거나하여 단골손님이 게우게 될 때는 단골집 주인이 알아서 깨끗이 거두매를 해 줄 것이며 먹다 남은 술은 단골손님의 표식을 해서 다음에 와 마시도록 잘 건사해 둔다. 그리고 집으로 못갈 형편이면 편안한 잠자리를 마련해 주기도 한다. 그리고 집에 련락을 해주기도 한다. 단골손님은 단골집에서 가장 편안히 마음놓고 집에서처럼 제 멋대로 마셔도 된다. 그리고 당분간 돈이 딸리면 외상을 해도 무방하다. 언제 돈이 있을 때 물면 된다. 단골집과 단골손님 사이에는 일종 믿고 믿는 의리가 통한다. 대개 단골손님은 그때그때 결재하기가 시끄러우니깐 단골집와의 협의하에 한달 혹은 몇 달에 한번씩 결재하는 방식을 취하기도 한다. 그리고 매번 명절 때마다 단골손님들이 단골집으로부터 받는 카렌다, 메모지, 다이어리 같은 조그마한 선물도 단골로서 어깨 어슥하게 함.

한국 전통적인 장사문화의 덤과 단골은 은연중 현대상술과 잘 맞아떨어지고 있다. 현대상술의 기본의 하나는 어디까지나 단골의 확보에 있다. 현대판촉전의 초점의 하나다. 현대백화점같은 데서 비싼 물건을 샀을 경우 보너스로 다른 물건들을 얹어 준다. 이 보너스라는 것이 바로 이른 바 현대적으로 둔갑한 덤이다. 한국 전통적인 덤은 손님이 원하는 물건을 좀 더 얹어 주는 안성마춤함이 있는데 현대적인 보너스판촉은 손님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잘 팔리지 않는 자질구레한 싸구려 물건들을 마구 안겨주는 듯한 기분 잡치는 면도 없지 않아 있다. 현대적인 보너스판촉은 사람들의 맹목적인 물욕을 자극하는 맹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A/S 즉 판매 후 얼마 기간동안 혹은 영구히 제품질에 대해 책임지며 서비스하는 것은 현대상술에서 새로 개발한 덤으로서 현대소비자들의 더 없는 각광을 받고 있다. 현재 많은 경우 A/S가 좋고 나쁨에 따라 상품의 판매가 결정되기도 한다.

그리고 회원제에 보너스제를 유기적으로 결합한 판촉방식은 한국전통적인 단골손님확보에 비해 단골이 단골을 끌어들이는 효과적인 면은 있으나 전적으로 이해관계가 개입되어 있어 끈끈한 정은 맛보기 힘든게 아쉽다.

보다시피 한국 전통적인 덤과 단골 장사문화는 현대상술에 많은 계발을 줄 뿐만 아니라 보완적인 구실을 충분히 할 것이다. 

4. 쓰레기는 저를 주세요! 

 

한국은 어지간한 깊은 산 속에도 푸른 하늘색 나는 쓰레기수거통을 비치해 둔다. 그것도 한 개가 아니라 여러 개를 비치해 둔다. 이 통은 종이류, 저 통은 캔류… 분리수거를 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매 통 마다에는 「쓰레기는 저를 주세요!」하는 유머스럽고 어리광스러운 말구가 붙여 있다. 실로 이 한마디 말구에 쓰레기는 쓰레기가 아닌 그 무슨 보배나 되듯이 둔갑해 버린다.

한국은 선진국문을 두드리는 잘 사는 나라이지만 쓰레기를 쓰레기로만 버리지 않는다. 쓰레기 속에서 금싸락을 주어내듯이 값진 물건들을 건져내고 있다. 그것이 바로 분리수거인 것이다. 종이류, 캔류, 유리병류와 같이 재활용 가능한 쓰레기는 쓰레기 아닌 쓰레기로 취급해 별도로 분리수거한다. 실로 낭비 없는 쓰레기재활용인 것이다.

현대의 가장 골치 아픈 전쟁의 하나는 바로 쓰레기와의 전쟁이다. 소비, 소비, 소비…현대의 소비만능풍조는 쉼없이 쓰레기를 내뱉고 있다. 나는 처음 한국에 갔을 때 서울 서남쪽에 있는 쓰레기처리장에 진짜 산더미같은 쓰레기산들을 보고 감짝 놀랐었다. 불과 20~30년만에 서울시에서 배출한 쓰레기가 진짜 산더미들을 이루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쓰레기산들에 보배산 혹은 ··· 척 이름까지 달아 부른다는 것이다.

현재 선진국들에서 쓰레기처리 방식을 보면 대개 매립과 소각 두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방식은 현대인간들의 환경의식이 싹틈과 더불어 많은 문제점들을 드러내고 있다. 이를테면 쓰레기매립은 땅속의 쓰레기가 썩으면서 오물이 지하수를 오염시켜 나날이 더 해가는 인간의 식수난문제에 키질하는 셈이 된다. 그리고 땅속에서 쓰레기가 썩으면서 산생되는 가스는 땅위로 새여 나오며 공기오염의 주범으로 되고 있다. 그리고 인체유해물질인 다이옥신을 대량 산생시켜 역시 현대 공기오염의 주범의 하나로 되고 있다.

매립과 소각, 이 두 가지 쓰레기처리방식은 분명 위와 같은 많은 문제점들을 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로서는 보다 신통한 방법이 없는지라 계속 그 모양 그대로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차선책으로 생각해낸 것이 쓰레기 매립장과 소각장을 거주지와 멀리 떨어지게 한다는 것이다. 현재 한국에서 쓰레기소각장부근의 주민들이 거듭 데모를 하는 근본취지도 바고 소각장이전을 촉구하고 있다. 그리고 소극적인 방법이나마 생각해낸 것이 곧 쓰레기줄이기운동인 것이다. 쓰레기줄이기는 뭐니뭐니해도 위에서 언급한 바 있는 쓰레기재활용이다. 종이류 쓰레기는 제지공장으로 보내 재가공하여 새로운 종이제품을 만들고 캔류 쓰레기도 캔제조공장으로 보내 새 제품의 원자재로 이용할 수 있으며 유리병류는 유리병공장으로 보내 깨끗이 소독만 하는 것으로 새유리병으로 재생할 수 있다. 쓰레기재활용은 이런 전통적인 방식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의 개발여지는 얼마든지 있다. 얼마 전에 한국에서는 음식찌꺼기가공기계가 선보여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무슨 발명특허까지 받았다한다. 이 기계에 음식찌꺼기들을 넣고 물기를 제거하고 건조시키고 분말을 내는 등 공정을 거쳐 최고 품질의 사료를 생산해낸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보잘 것 없는 쓰레기로 귀중한 새 제품을 출시했던 것이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근간에 쓰레기매립장에서 생겨나는 가스를 이용하여 열에너지문제도 해결하고 있다고 한다. 앞으로 쓰레기재활용은 끊임없는 새로운 아이디어의 창출로 이런 방향으로 활발히 진행되는 것이 바람직한 줄로 한다.

쓰레기줄이기의 다른 한 방법은 쓰레기버리는 사람이 쓰레기량에 따라 돈을 내도록 하는 것이다. 쓰레기재활용이 보다 적극적인 방법이다면 이 방법은 좀 강제성을 띤 소극적인 면을 나타내고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매우 효과적이다. 한국에서는 이것을 쓰레기종량제라하여 법제화하고 있다. 버리는 쓰레기량에 따라 크고 작은 규격 쓰레기봉투를 사용하도록 되여 있다. 쓰레기봉투는 일반 동네슈퍼(우리 여기의 동네상점)에서 손쉽게 살수 있다. 물론 크기에 따라 그 값이 다르다. 쓰레기를 많아 버리면 그만큼 봉투를 많이 사게 되어 경제적부담이 따르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될 수 있는한 쓰레기를 안 만들려 한다. 쓰레기기피증이라고 해도 좋다. 백화점에서 물건을 살 경우만 보더라도 이제는 사치한 겉포장들이 거추장스럽게 여겨져 벗겨버리고 알맹이만 취하는 그런 실용주의적인 착실한 삶의 지혜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그래서 한국의 백화점들에서는 고객이 버리고 가는 이런 포장쓰레기들때문에 여간 골치가 아프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고객이 버리는 포장쓰레기들을 백화점에서 안아서 처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만큼 새로이 인력, 물력을 투입해야 되기때문이다.

쓰레기종량제, 참 멋진 아이디어이다. 쓰레기종량제를 실시하니 재활용품쓰레기수거도 쉽게 되였다. 재활용품쓰레기는 재활용할수 있는만큼 규격쓰레기봉투를 사용하지 않고 그대로 문밖에 분류하여 내다놓으면 된다. 쓰레기종량제를 실시하기 전에는 이런 재활용품들을 아무 비닐봉지에다 다른 쓰레기들과 한데 마구 쑤셔 넣는 폐단도 있었으나 규격쓰레기봉투를 사용함에 따라 쓸데없이 재활용품들까지 봉투에 넣어 애꿎은 돈만 허비할 필요는 없다. 바꾸어 말하면 재활용품쓰레기들이 쉽게 눈에 띄이여 해빛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한국은 이 쓰레기종량제를 실시한 후 쓰레기배출량이 그 전 시기에 비해 절반 약간 웃도는 정도로 줄었다고 집계되었다. 물론 한국에서 쓰레기종량제를 실시하기 전에는 쓰레기를 담아버리는 봉투에 대해 규제가 없었다. 사람들은 대개 슈퍼같은데서 물건을 살때 물건을 넣어주는 비닐주머니에 쓰레기를 담아버렸다. 현재 우리 연길의 일부 지역에서 실시하고 있는 그런 방식들이다.

한국에서는 쓰레기수거원들을 환경미화원이라 한다. 참 멋진 말이다. 우리 여기의 청소공들을 이렇게 부르고 있다. 한국사람들은 대개 저녁에 하루사이에 생긴 쓰레기들을 규겨쓰레기봉투에 넣어 문밖의 지정된 곳에 내다놓는다. 쓰레기라는 것이 사람들 눈에 거슬리는 것인지라 낮에는 잘 내다놓지 않는다. 그러면 신 새벽에 미화원 모자를 쓰고 복장을 입은 환경미화원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이런 쓰레기들을 「쓰레기는 저를 주세요!」라고 쓴 글씨를 운전석양쪽문에 박은 쓰레기차에 싣는다. 이 쓰레기차는 특별제작된 지라 적재함부분에 장착된 회전 갈구리로 쓰레기를 올라오는 족족 끌어 모아서는 다져 넣는다. 이렇게 다져 실으니 보기에 그리 크지 않은 쓰레기차지만 쓰레기 네댓 톤은 쉽사리 제낀다는 것이다.

한국, 나아가서는 선진국에서의 쓰레기처리방식은 우리에게 많은 힌트를 준다. 그러나 물론 그것이 이상적인 최종 쓰레기처리방식은 아니다. 이상적인 최종 쓰레기처리방식은 아직 우리 모두에게 남아 있는 과제이다. 어쩌면 그것은 영원한 과제인지도 모른다. 인류는 끊임없이 새로운 소비를 개척해 왔다. 이것이 인류의 역사다. 소비와 쓰레기는 약과 독의 쌍둥이인 만큼 새로운 쓰레기가 항상 생겨나기 마련이다. 새로운 쓰레기의 새로운 처리방법의 끊임없는 추구, 여기에 우리 인간의 이율배반적인 숙명의 창조가 빛발치고 있는 것이다. 

 

5.신토불이 

 

‘신토불이, 신토불이, 신토불이로세…‘ 한국에서 너나없이 잘 부르는 노래이다. 거저 재미로 부르는 노래가 아닌 것 같다. 분명 그것은 호소이고 외침이었다. 개방화, 세계화의 물결이 들이닥침에 따라 이 노래는 신속히 퍼져나간 것 같다. 특히 한국이 WTO(world trade coopration의 약자로서 세계무역기구를 가리킨다)에 가담함에 따라 개방화, 세계화가 가속화되면서 그 노래의 톤도 한층 더 높아진 것 같다. 그리고 한국의 곳곳에서 신토불이의 프랑카트가 나붓긴 것 같다.

신토불이(身土不二),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나서 자란 지방의 풍토와 하나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 만큼 한국에서 자란 사람은 한국에서 나는 농산물을 사용해야 만이 건강에 좋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신토불이는 우리 농산물을 애용하자는 말로 통한다.

한국은 성공적인 88올림픽개최로 세계에 많이 알려졌고 89~90년 냉전이 종식됨에 따라 개방화의 템포도 빨라졌다. 그러다가 93년이후 김영삼집권시대에 이르러서는 「한국은 세계로, 세계는 한국으로」라는 멋진 구호를 내걸면서 전면 개방화의 길로 나아갔다. WTO가입도 이로부터 이루어진 것이다. WTO가입으로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그래도 농민들이다. 이제 중국과 같은 발전도상국의 값싼 농산품, 미국과 같은 선진국의 질 좋고 값싼 농산품의 대량적인 수입은 한국농산품이 발붙일 곳이 없게 된다. 그래서 한국은 쌀과 같은 주된 농산품의 전면 개방은 2020년이라는 유예기를 두었다. 한국은 이 유예기를 앞두고 전국민적인 우리 농산품애용캠패인을 벌리고 있다. 우선 각종 도경을 통해 신토불이의 도리를 설명한다. 우유, 빵과 같은 양식을 많이 하면 생김새자체가 서양사람을 닮아간다는 것, 그 례로 햄버거같은 양식을 즐기는 애들의 골격이 서양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한국사람의 고유한 육체적 특성을 지키자면 우리 몸에 가장 적합한 우리 농산품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토불이 즉 우리 농산품애용은 우리 개개인의 몸에 좋고 농민도 살리는 그야말로 누이좋고 매부좋은 노릇이라는 것이다. 다음 신토불이소비를 할수 있는 실제 가능성을 마련한다. 한국은 민주화운동의 성공과 더불어 로동력가치가 대폭 올라갔다. 그리하여 한국의 농산품가격도 상당히 비싼 편이다. 한국의 농산품시장에 가보면 중국산, 미국산 등 외국산농산품에 비해 한국국내산농산품의 가격이 월등이 비싸다. 어떤 것은 거의 배나 비싸다. 그리하여 국내산농산품이 외국산보다 좋으며 신토불이 도리를 알고 있다하더라도 많은 서민들은 실제로 그 소비가 불가능했다. 돈주머니사정이 그렇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토불이 캠패인을 벌리면서 농산품직거래를 마련한다.

그 주요 방식으로는 농촌의 어느 특정 지역과 도시의 아파트단지들 사이에 자매결연을 맺어 농산품애용을 촉구한다. 그리고 시내 곳곳에 농산품직판장을 설치하여 농민들이 자기가 생산한 농산품을 직접 시장에 선보일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가을걷이가 끝난 후나 추석, 구정 같은 명절을 계기로 옛날의 3일장, 5일장처럼 정기적으로 우리농산품 한마당 혹은 잔치 등 행사를 시내 한복판에 마련한다. 이런 다양한 형식들은 어디까지나 생산자와 소비자가 직접 대면하는 형식을 취하게 함으로써 중간 류통마진을 없애버려 농산품가격을 싼 가격에 출시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이런 형식은 국산농산품 홍보에도 크게 한 몫 한다.

이로부터 신토불이는 곳곳에 꽃핀다. 한국에서 신토불이는 단지 농산품에 국한되지 않고 일종 국민정신으로 확산되어 전반 국산품애용으로까지 뻩쳐나간 것같다. 국산품애용, 자본주의 시장경제룰을 무시하면서까지 소비자에게 일종 신성한 사명감을 부여한다. 이것을 애국의 경지에까지 끌어올린다. 이른 바 국산품애용으로 나타나는 한국사람들의 애국주의는 참 대단하다. 한국사람들은 유럽쪽에서 200~300년에 걸쳐 해낸 일을 짧은 30여년내에 해냈다. 이른 바 한강의 기적을 창조해 냈다. 이로부터 한국사람들에게는 전례없는 민족적 자신감, 자부심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도 하면 된다, 될뿐만 아니라 더 잘 할수 있다는 그런 자신감과 자부심이다. 멋진 자신감과 자부심이다. 한국의 애국심의 바탕도 바로 여기에 있는 듯하다. 그래서 국산품우월주의가 싹 트면서 한시기 성행했던 외제품숭배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이로부터 국산품애용주의가 절로 생겨났던 것이다. 국내브랜드, 국내메이크··· 무엇이나 국산이다. 먹고 자고 입는 것, 타는 것…모든 것이 우리산이다. 한국사람은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라는 말을 잘 사용하며 우리로 한 덩어리 되었다. 단일민족으로서 우리는 그 만큼 쉽게 단단히 뭉칠 수 있는 것 같았다. 외제품사용은 일종 랑비고 죄악시되었다. 그래서 맹목적인 우리우월주의가 팽배하면서 무조건 외제반대, 국산품만세식의 국수주의로 흐르기도 했다. 한국정부 차원에서도 알게 모르게 이를 부추긴 것 같다. 외제차보유자에 한해서는 가차없이 높은 세금을 때린 것은 그 한보기로 되겠다. 이것이 이른바 국내산업보호조치이다. 한국산업은 국민의 이 애국주의적인 국산품애용 및 정부의 보호하에 거족적인 성장을 가져 왔다. 그런데 문제는 온실에서 키우는 꽃처럼 보기는 그럴 듯 했지만 생기가 없었다. 외부적인 경쟁메카니즘 자극소가 부족했던 것이다. 이런 형세하에서 개방화, 세계화 그리고 WTO가입은 한국경제의 하나의 큰 시련으로 되었다. 이제 더는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소극적인 보호주의로는 어쩔 수 없다. WTO에서는 한국의 민간단체에서 조직한 신토불이캠패인에 대해서조차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다. 인위적인 소비 선택 및 촉진은 그만 두고 이제는 지구촌의 시장원리에 따라 놀자는 것이다. 나라마다 보호관세를 없애고 제품이 마음대로 국경을 넘나들며 공정한 조건하에서 시장경제의 공급과 수요률에 의해 선택받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세계 일류제품만이 통용되고 살아남는다는 말이 되겠다. 일류제품, 그것은 질적으로 세계최고여야 하고 가격 면에서는 세계최저여야 한다. 모순적인 가치의 조화, 실로 어려운 과제다. 이리하여 보다 적극적인 리드심을 나타내고 있는 한국의 김대중정부는 IMF를 계기로 국내기업구조조정을 통한 빅딜의 창출 및 벤쳐기업육성 등 일련의 근본적인 해결책을 강구하고 있다. 경쟁력이 없는 국내기업들을 과감하게 세계동종일류업체에 팔아 넘기기도 한다. 실로 개방화의 과감한 조치다. 이전 같으면 민족기업을 팔아먹는 매국역적으로 지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시대가 변했다. 말 그대로 지구촌의 시대다. 국경을 뛰어넘는 세계적인 업종분공이 우승열패(優勝劣敗)의 엄혹한 원리에 의해 숨가쁘게 진행되고 있다. 그러니 지금 민족기업이라 하여 맹목적으로 모든 것을 끌어안고 있을 때가 아니다. 부담거리로 되는 저질적인 민족기업들은 과감하게 처리하고 세계 일류가 될 수 있는 그런 민족기업들을 집중적으로 육성해야 만이 정녕 한 민족의 살길이다.

한국에서 현재 진행하고 있는 빅딜, 대기업지간에 중복되는 업종들을 가장 경쟁력이 있는 기업으로 집중시켜 역량을 강화하고 벤쳐기업-모험적이기는 하나 세계최첨단기술분야로 진출하여 최고가 되는 경제전략은 그 나름대로 매우 효과적임은 말할 것도 없다.

현재 중국도 WTO진출을 서두르고 있다. 세계시장에로의 전면적인 개방을 의미한다고 해도 좋다. 그만큼 우리에게는 큰 시련이 닥쳐온다. 우리도 이 시련을 이기고자 내부개혁의 발걸음을 다그치고 있다. 한국의 신토불이식 처방은 특정한 시기 일정한 효험이 있겠지만 근본적인 문제해결은 안 된다. 그럼 우리의 개혁은 구경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 김대중식 빅딜, 벤쳐기업? 아니면? 

 

6. IMF의 이모저모

 

아세아의 네마리 용은 떳다-한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 한국은 GNP 만불이라고 이제 선진국의 문턱에 가 닿았다고 샴페인을 터뜨리는 순간 샴페인 마개의 맛갈 좋은 팡 소리와 더불은 멋진 샴팡의 분출이 아니라 샴페인 병 자체의 박살이었어. 한국은 가짜 용이었어. 용은 중국사람에게 제격이고 어울리지. 중국사람은 자기네 스스로가 용의 傳人이라고 하며 용을 자기네들의 상징으로 내세우지 않는가? 대만, 홍콩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싱가포르만 해도 70%가 중국사람이고 경제명맥을 거의 다 중국사람이 잡고 있지 않는가? 그러니 그들은 까딱없는 거야. 진짜 용이야! 한국사람들이 IMF요 뭐요 하며 손이야 발이야 애걸복걸할 때 그들은 쾌재나 칭칭 나네를 불렀어.

한국 IMF 빵 맞았어. 뛸 때 없는 F학점이야. 머리는 좋았는데 너무 까불었어. 동방의 유태인이라는 말도 있잖아. 대만, 싱가포르, 홍콩은 중국사람 세상. 한국은 코리아 세상. 그럼 왜 한국만 IMF 맞았지? 다른 것은 다 제쳐 두고 소비성향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듯. 한국사람 돈 잘 쓰는 건, 못 말려! 대만, 싱가포르, 홍콩 중국사람 내일을 위해 꿍꿍 저축! 한국사람 에라, 모르겠다, 내일 어떻게 되든 오늘 써고 볼 판이다. 한치보기 기분파!

한국사람, 대만사람 중국여행. 한국사람 봉, 대만사람 땡. 한국사람 앞에 가련하게 보이면 돈 나와. 더러운 거러지 앞에 와 돈을 달라 손 내밀면 깔끔한 한국사람 거절 못해. 다만 몇푼이라도 언저준다. 보편적인 인간동정심 발로. 여기다 조선족 거러지라도 만나면 민족애까지 발동하여 덤으로 팡팡. 그리 깨끗하지 못한 대만사람이건만 더럽다는 핑게로 코 싸쥐고 피하기가 십상. 민족적인 정보다는 일전이라도 아끼는 철저한 저축주의. 한국남자 무조건 사장님, 사장님 올리쳐주면 안 쓸 돈도 잘 쓴다. 그러나 대만남자 무조건 老板, 老板하면 이상한 눈길로 쳐다보며 경계의 신경을 곤두 세운다. 그리곤 쓸 돈도 안 쓴다. 한국여자 미인이라고 춰주며 미용에 좋은 이걸 사라고 하면 일단 사주고 보기. 그러나 대만여자 미인이라고 춰주며 미용에 좋은 이걸 사라고 하면 이상한 눈길로 쳐다보며 경계의 신경을 곤두 세운다. 그리곤 살 것도 안 산다. 한국남자, 한국여자 어쩌면 고리도 빼여 닮고 대만남자, 대만여자 어쩌면 또 고리도 빼여 닮았는지? 다리 뿌러진 노루 한테 모인다 하더니, 옛말 그른데 없더라. 그런데 제미난 건, 대만녀자 한국남자 좋대. 한국남자 돈 잘 써 좋대. 내가 있던 연구원만 해도 대만여자 네뎃 한국남자에게 시집.

한국 IMF사태 때 추태만발. 회사가 무너지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 손맥을 놓고 일을 팽개치는 한국의 직원들-자아중심. 회사가 내일 무너지더라도 오늘까지 내 할 일을 열심히 하는 일본의 직원들-敬業주의가 체질화된 일벌레들. 고지식하건만 일본직원들 쉽게 들떠는 한국직원들에게 힌트하는 바 없지 않아 있어. 그리고 회사가 무너졌을 때 한국사장들 소주방에서 소주병 기울며 저 새끼들 때문에 망했다고 한탄, 울분 토로. 그러나 일본사장들 눈물 코물 짜며 자기가 부실해 회사가 망했다하며 전 직원들에게 용서를 구함.

한국 IMF 한민족에게 병주고 약줬다. 한국 IMF 맞고 정신 버쩍. 그래 한강의 기적 신기루에 불과하던가? 한민족 또 한번 배달민족단기로 욱 뭉쳐 일어났다. 자구책 눈물겹다. 저 끝없이 느려선 줄들. 남여노소 할 것 없이 자발적으로 금모으기운동에 떨쳐나선 한민족.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 장수 반지 다 무엇이라, 나라가 망하는 판에 오래 살면 무엇 하나 말이다. 그리고 저 어린 아이 백날 돌반지 헌납. 그리고 저 새 각시 첫날 결혼 반지 헌납… 하루를 살아도 정녕 寧爲玉碎, 不爲瓦全, 구차하게 살고 싶지 않은 열혈민족들. 금을 단번에 너무도 많이 쏟아 부어 국제 금시세를 떨구어 버렸다는 한민족. 한민족은 민족위기 때마다 잘 뭉친다. 한민족의 저력은 여기에 있다. 어디에 자연재해가 들었소, 어디에 어떤 불행한 사람이 있소 하면 한민족은 한사람 같이 곧 잘 발 벗고 나서며 도와 준다. 남이 보는 앞에서 돈을 내는 것은 알게 모르게 과시욕이 가미되어 있는 것 같아 거저 그렇다 치더라도 남이 안 보는데서 의연금을 내는 것은 정말 갸륵하다. 장애자에게 매달 닉명의 돈 부쳐 주기 등도 감동적이지만 가장 대중적인 전화 모금도 참 나에게 인상적이다. 텔레비죤에서 사회자가 그 어느 곳, 누구의 구차한 사연을 얘기하며 다음의 전화 번호로 의연금을 받습니다 하면 곧 그 전화선은 핫라인이 되어 모금액이 기하급수로 막 올라가는 그 광경은 실로 이 세상에 가장 보귀한 눈물겹도록 고마운 인간의 정이다. 한국인에게는 아직 정이 많다. 냉혹한 자본주의 금전관계의 폭격을 안 맞은 것은 아니나 그래도 인간사랑의 정은 후덥도록 맥맥히 흐르고 있다. 하루아침에 쏟아져 나오는 실업자, 홈리스… 거의 이와 동시에 쏟아져 나오는 종교단체 혹은 여느 마음 좋은 사람들이 꾸리는 여기 저기 무료급식소. 무엇이나 돈 받고 주고받는다는 자본주의세상에서 무료급식소 나에게는 기상천외의 일. 그래서 언제인가 나는 서울 바닥에서 무료급식소만 찾아다닌 적이 있다. 사실 무료급식소는 일찍부터 꾸려진 한국의 전통적인 미풍양속. 길가는 나그네 배 굼기지 않는 것이 한국사람이 아니었던가? 김삿갓을 비롯한 많은 방랑시인들 배출될 수 있은 것도 이 미풍양속덕택. 무의탁 노인, 아이들을 위해 집 또는 학교까지 음식을 배달해 주거나 어느 특정 지점에서 공급하는 무료급식소. 음식뿐만 아니라 옷가지를 비롯한 다른 생활 필수품까지도. 누구든지 길을 가다가도 배만 고프면 거저 줄만 서만 상냥하게 넘겨주는 밥 한끼는 쉽게 차례진다. 여기에 후식으로 요구르트 같은 음료수도 준다. 무의탁 노인, 아이들은 무료급식 받어도 별 문제겠지만 사지가 펀펀히 살아 있는 사내들 그 알량한 자존 하나 때문에 마음 편하지 못하다. 그래서 신문지 하나만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줄을 서는 한국사나이들. 너에게서 대한민국의 희망을 본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순전히 인간적인 동정과 이해에서 출발하고 거저 남을 돕는 것이 좋아 자원적으로 동원되어 봉사하는 자원봉사자들. 너희들에게서, 아이니컬하게도 자본주의 너희들에게서 공산주의 경지의 미풍양속을 본다. 내가 살던 곳에서는 말끝마다 공산주의도덕품성 내걸지만 그 실천은 잘 안 되. 아무리 어디에 홍수요, 빈곤현이요, 돈 없어 공부 못하는 아이요 해도 끔쩍도 안 해. 明哲保身, 내 일신만 편하면 다야. 그러니 명목은 자원, 자각에 맡기는 의연금이라 하지만 월급쟁이 봉투에서 억지로라도 얼마, 얼마씩 해서 막 잘라 내기. 어떤 데서는 신성한 당비도 이렇게 한다니깐 더 말해 무엇하랴! 내 월급봉투도 의연금 투성이. 그러니 자연히 생기는 것은 의연금 불만 투성이.

한국사람 정 많다. 동정심 많다. 그런데 내가 사는 곳은 대륙사람들이라 해서 그런지 덤덤해. 좀 무표정해. 너네는 좁은 땅덩어리에 한 민족끼리 똘똘 뭉쳐 살아서 그런지 정 하나로 찰찰 넘쳐. 우리는 가도가도 끝이 없는 넓은 땅덩어리에 많은 민족 부대끼며 살아서 그런지 자기도 모르는 사이 무뚝뚝해 졌어. 서로 잘 모르는 남같이 느끼는 때가 많아. 그러니 내하고 상관없는 귀찮은 일인 듯 느껴질 때가 많아. 너네 그 IMF 때 더 꽃핀 인정, 인간 사랑의 정 하나 후덥다. 훈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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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한국사람과 외래어

 

얼마 전에 관광국의 위탁을 받고 가이드훈련반의 한국어 강의를 하게 되었다. 한국에 오래 있었는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한국사람들의 외래어에 대해 집중강의하게 되었다. 우리 중국조선족이 한국에 가서 가장 어리뻥뻥해 나는 것 중의 하나가 한국사람의 외래어 사용이다. 서울 한복판에 서서 동서남북 그 어디로 보아도 외래어 간판투성이다. 여기서 무슨 민족동질성이요, 한 민족이요 하는 신성스럽고 맛갈스러운 뉴앙스가 싹 가셔지고 만다. 물론 여기서 문제시하는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사용되어 고유어되다시피 한 한문차용 외래어는 그만두고 주로 일본어와 영어 차용의 외래어이다. 그런데 여기서 일본어 차용은 한국사람들의 36년 간 일본식민지 치욕의 청산과 더불어 많이 소실되고 말았다. 한국사람들의 일본거부감은 거의 본능에 가깝다. 민족의 자존심을 키우고 지키느라고 그런지 한국대학교의 심볼인 서울대학교조차도 일어과를 설치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전부터 내려오던 일본어 차용의 외래어는 식민지시대 일본어교육이 몸에 배인 극히 제한된 일부분 노인들에 한에서 사용되고 젊은이들 사이에는 일절 무시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니 새로운 일본어차용외래어는 극히 제한된 특정 분야의 전문용어들에 국한되었다. 필자가 한국에 있을 때 무의식간에 일본어를 사용하다가 큰 코 다친적이 있다. 나는 평시에 우리가 보통 입에 자주 올리는 식사(食事)라는 말을 아주 잘 쓴다. ‘식사하러 갑시다‘, ‘식사했습니까?‘··· 나는 이러루한 말로 알게 모르게 남들에게 유식하고 례절바른 이미지를 주려 했던 것 같다. 사람들은 나의 이루러한 이미지에 호감을 느끼는 듯 했다. 그런데 어느 한번은 한다하는 한 언어학 교수를 찾아갔다가 점심때가 되어 또 이 말을 꺼냈다. 그랬더니 그 교수님은 정색을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우선생, 앞으로 다시는 식사라는 말을 쓰지 마십시오. 그것은 일본말입니다. 우리 말이 아닙니다.‘ 순간 나는 어리뻥뻥해 났다. 나는 이때까지 줄곧 ‘식사‘를 한문차용의 중국어 외래어로 간주했던 것이다. 내가 중국어 외래어라고 항변하자 그 교수님은 식(食), 사(事)는 확실히 중국어 한문기원설이 맞지만 그것이 일본에 들어가 일본사람들의 상투적 수법에 의해 새롭게 조합되면서 ‘밥먹는 일‘이란 새로운 의미를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훗날 이것이 일본식민지시대에 한국에 들어와 유행되면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마치 한국어 행세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 절대 이런 일본어 외래어를 쓰지 말라는 것이다. 쓰면 친구로 상대해주지 않겠다는 것이다. 나는 그러마하고 대답은 하면서도 속으로 나 같은 문외한이 그런 깊숙이 들어박혀 있는 외래어를 어떻게 집어낸단 말인가고 하는 우려심이 앞섰다. 갈라질 무렵, 그 교수는 한국의 종로(鐘路), 대전(大田)하는 많은 유명한 지명들도 일본식민지시대 붙여놓은 이름이므로 한시바삐 뜯어 고쳐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기는 둘도 없는 국수주의자로서 현재 일제식민지흔적청산의 일환으로서 언어분야에서 충분한 고증을 진행하며 범국민적 궐기를 촉구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당시 그 교수님의 말을 심드렁하게 들었으나 훗날 보니까 진짜 범국민적, 범국가적으로 궐기하여 소학교를 ‘국민학교‘라 부르는 것은 일본식이라 하여 ‘초등학교‘로 갈아치웠다. 그리하여 나는 그 사회를 리드해 나가는 교수님을 얼마나 우러러 보게 되었는지 모른다. 실로 교수님의 한 귀감을 그 교수님에게서 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이니컬하게도 국수주의자라고 자칭하며 외래어 사용을 탐탁케 생각다못해 반대해 나선 그 교수가 영어외래어를 남발하는데는 경악치 않을 수 없었다. 사실 한국사람들은 영어에 대해 남다른 친밀감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45년 광복 후 미군정하에 놓여지고 미, 소로 대표되는 세계 이데올로기 대립에서 미국측에 가 붙다보니 자연 언어 면에서 영어의 절대적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모국어인 한국어는 몰라도 괜찮지만 영어를 모르면 무식에 가까운 촌놈으로 취급받기가 일쑤인 때가 있었다한다. 이런 결과가 영어차용의 외래어 남발로 나타났다. 한국어에 없는 TV, 비디오, 테이프…같은 영어외래어는 더 말한 것도 없고 한국어에 상응한 고유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어차용외래어를 마구 잡아 써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를테면 칼라, 스푸, 스카프…등 부지기수다. 이런 것들은 사실 순전히 한국어를 좀 먹고 흐지부지하게 만드는 암적 병독이다. 언어학자들이 아무리 이렇게 설명을 가해도 언어 현실은 언어 현실대로 매 한가지다. 그것은 가치판단을 떠나서 이런 외래어를 쓰면 상응한 한국어고유어를 쓰기보다 이색적이어서 사람들의 눈을 끌기가 쉽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자기를 나타내기 위해서도 그리고 상술이 깃든 상표나 간판에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서도 고집스레 이런 영어차용외래어에 집착한다. 실로 이런 영어차용외래어는 일종 도금이다. 이로부터 한국에서는 영어에 대한 일종 맹목적인 숭배가 팽배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영어는 세계어라는 명목아래 영어를 배우기 위한 배움의 붐이 일었다는 것이다. 조기영어교육이니 천재영어교육이니…

그런데 잘 뒤집어 보면 한국사람들은 분명 영어에 대해 불경스러운 마음가짐도 가지고 있다. 이른 바 이율배반적이다. 한국사람들은 섹스, 섹시, 바스트, 팬티, 브라자, 히프… 그리고 여자의 신체 부위에 관한 용어들은 예외없이 영어차용외래어를 사용한다. 이에 많은 미국사람들이 의아해 하며 한국사람들은 왜 이런 경우에는 꼭 영어를 사용하는가하며 반문하군 했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한국어로 성교, 성감, 젖가슴, 속곳, 젖가슴띠, 엉덩이… 하면 어쩐지 속되보여 좀 게면쩍어 지는 듯하다. 그것은 한국인들 무의식 속에는 알게 모르게 한국어 신성감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사람들이 항상 한국어를 우리 말, 우리 언어, 우리 글하며 우리를 내세우는 것은 그 무의식의 단적인 한 보기로 되겠다. 유교적 환경에서 많이 다듬어진 한국어야말로 점잖고 신성한 말로서 양반들의 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자극적이고 점잔치 못한 그런 말들은 한국어에서는 유야무야(有耶无耶) 즉 있는 둥 마는 둥 기피하는 언어로 전락되고 말았다. 이로부터 영어는 아무 것이나 막 주어 넘기는 양놈들의 무지막지한 언어인 만큼 신성한 한국어에서 꺼리는 말과 표현들을 차용하여 나타낼 수 있다는 앙큼한 언어시비론이 곁들여진다. 그리하여 한국사람들은 섹스, 섹시 소리를 거리낌없이 해댄다. 그것은 이런 말이 신성한 한국어가 아니라 미천한 영어라는 바로 이 무의식 때문이다. 영어는 바로 이런 무의식 속에서 폄하되어 속된 표현의 담당자가 된 셈이다.

영어에 대한 이런 이율배반적 의식세계, 이것은 어쩌면 미국에 대한 한국사람들의 이중적 태도를 단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국은 냉전시기 미국의 동반자가 되어 알게 모르게 그 혜택을 많이 입었다. 미군정시기 춘황을 넘기게 한 미국밀가루로부터 국산품들의 미국시장에로의 무관세 내지는 저관세의 대량적인 진출… 그래서 한국은 미국말을 잘 들었다. 그래서 영어도 한국사람들의 몸에 알게 모르게 배이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한국을 미국 식민지로까지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한국은 미국을 싫어했다. 미국은 너무 코대가 높다는 것이다. 박정희대통령이 이승만대통령의 미국노선을 거부하고 강한 민족주의 기치를 들고 나온 거창한 얘기는 그만 두고라도 현재 급진적 대학생들이 쩍하면 집회나 데모를 갖고 「미군철수」, 「미국사죄」와 같은 구호를 웨치고 있는 것은 이를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그래서 미국 것은 무엇이나 거부반응이 일어났던 것이다. 영어, 그것도 예외는 아니었다. 영어차용외래어를 많이 쓰는 사람들이 눈에 거슬리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영어는 어디까지나 언어교제 도구, 방편인 만큼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이 세계어가 별도로 있다고는 하나 분명 세계어 행세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로도 영어는 해야 했던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이중언어사용자로서의 우리 중국조선족의 언어사용실태와도 상통하는 바가 있다. 이런 언어사용실태는 앞으로 사회언어학적인 연구의 좋은 테마가 될 줄로 알고 있다.  

8. 홍도야, 울어라

    오빠가 달려간다 

 

‘홍도야 울지 말아. 오빠가 있다···‘ 이 노래에 대해 나는 잘 모른다. 그저 막연히 이 노래는 옛날, 아니 일제시대 삶의 비운에 빠진 여동생의 순정을 지켜 주려는 오빠의 굳은 약속만으로 알고있다. 그런데 그날 그때로부터 어쩐지 자주 이 노래가 떠올려진다. 나의 죄책감을 씻자고, 아니면 나의 떳떳함을 나타내자고 에라, 나도 모르겠다. 홍도야, 울어라 오빠가 달려간다.

내가 퍼그나 나이를 먹어 싱겁게 박사 공부를 한답시고 한국에 건너간지도 몇 년 전의 일이었다. 그때 나는 자본주의 요정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내 스스로에게 강심제를 놓고 공부에만 전념했다. 그런데 돈, 섹스, 자본주의의 가장 강유력한 핵폭탄들이 어느새 나의 몸 속 깊이에 시간 폭탄처럼 도사리고 앉아서는 수시로 폭발의 탕개를 조이고 있었다.

그때 나는 종종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서 강의를 듣고 저녁 버스를 타고 산 속에 있는 연구원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런데 저녁에 약속이 되어 한 잔 하고 나면 저녁 버스를 놓치기가 일수였다. 그럴 때면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내 중국월급의 3분의 1 가량을 들여가면서 여관에 드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날 술이 거나하게 되여 발가는 대로 분명 아무 여관이고 찾아갔다. 밤이 퍼그나 깊었다. 여관으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 좀 두려운 감이 들기도 했다. 연구원에서 외박을 절대 금하고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로 나는 어정쩡한 속에 써빙(아줌마였다. 아니 아가씨였던가?)을 따라 내 방으로 들어갔다. 방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고 TV에 전화까지 갖추어져 있었다. 나는 먼저 TV를 켰다. 순간 나는 입을 딱 벌리고 경악실색하고 말았다. TV화면에 홀딱 벗은 한 쌍의 젊은 서양 남녀가 찰거머리처럼 한데 어울려 열심히 열을 올리고있는 장면이 안겨왔다. 세상에 이런 것도 남한데 보여 줄 수 있는가고 나는 자문해 보았다. 그런데 나의 이 자문이 끝나기도 전에 이번에는 네댓 쌍이나 되는 홀딱 벗은 젊은 서양 남녀들이 한데 어우러져 즐거운 비명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정말 성의 난무였다. 나는 술기운이 어느새 싹 가셔지며 거의 본능적으로 TV를 죽였다. 자본주의는 자본주의로구나, 나는 온 몸에 식은땀이 쫙 흘러 내렸다. 노공산당원이고 사회주의사상으로 무장한 나로서는 이런 것에 대해서는 거의 본능에 가까운 조건반사로 거부 반응을 일으키며 절대로 접수할 수 없는 금물로 되었던 것이다. 방안이 좀 조용해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그 즐거운 비명소리가 또 들려 왔다. 나는 순간 머리칼이 쭈빗해났다.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그 비명소리는 도를 더 높이며 간단없이 들려왔다. 나는 오돌오돌 떨리는 속에서도 정신을 가다듬고 귀를 기울이며 그 비명의 출처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옆방에서 흘러 나왔다. 한참 있을라니 ‘좀 살살…‘하는 애교성도 한데 흘러나왔다. 나는 그 소리가 역겨워 그만 복도로 나오고 말았다. 그런데 복도에 나오니 그 소리는 더 요란하였다. 옆방뿐만 아니라 여기저기 여러 방에서 쏟아져 나왔다. 나는 그만 도로 방으로 들어오고 말았다. 나의 신경은 뒤집혀졌다. 그러나 전화를 보는 순간 공안국에 보고해야지 하는 의식이 살아났다. 그런데 바로 내가 전화를 잡으려는 순간 전화벨이 요란스레 울렸다. 나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와이, 와이…‘, ‘아저씨, 아가씨 안 할래요…‘ 부드러운 여자의 말이 들려오는 순간 나는 이것이 사회주의 중국이 아니라 자본주의 한국임을 알았다. 나는 그만 수화기를 탁 놓아버렸다. 그런데 얼마 있지 않아 또 ‘아저씨··‘하는 전화가 울렸다. 그리고 또··· 나는 그만 화가 동해 전화선을 뽑아버렸다. 그날 저녁 나는 싱숭생숭한 잡생각에 거의 뜬눈으로 밤을 보냈다. 이튿날 일찍 여관 문을 나서는데 그 써방 아줌마가 이상한 눈길로 나를 깐깐히 훑어보는 것이었다. 나는 기분이 좀 언짢았다. 자본주의에 무얼 배우러 왔다는 것이 허무맹랑하게 느껴지다 못해 피씩 웃음이 나왔다.  

이날 여관에서의 그 비명소리는 나에게 있어서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그 내막을 알게 되자 그 충격은 점점 더 무디어 가며 자연스러워지기도 했다. 그래서 그 후에도 심심찮게 여관에 들었다.

그런데 나에게 있어서 실로 충격적인 사건은 그 뒤에 벌어졌다.

나는 유학오기 전 중국에 있을 때 일본노인 한분과 어쩌다보니 친한 사이가 되였다. 그런데 바로 이 일본노인이 그 여관 사건이 있은 지 얼마 안되어 한국에 나를 보러 왔다. 나는 매우 기뻤다. 술이 거나하게 되었다. 노인은 나에게 아가씨 맛이나 보았는가고 물었다. 나는 좀 어정쩡해하다가 머리를 가로 저었다. 그러자 일본노인은 그럼 좋지 하며 오늘은 진짜 자본주의 맛을 보여줄 거야 하면서 나를 잡아끌었다. 우리가 간 곳은 미아리였다. 아니, 나는 그때 분명 메아리, 되울려 오는 메아리로 기억했었다. 그런데 후에 들어보니 분명 미아리였다. 6.25동란 때 민족상잔의 비극이 얼룩진 그 유명한 미아리고개의 미아리였다. 그것이 현재는 한국의 유명한 사창가로 되어 있다. 한국에는 사창가가 많았다. 무슨 청량리요, 용산이요, 천호동이요··· 열거하기에 벅찰 정도로 많다. 우리에게 홍등가로 더 잘 알려진 이런 사창가를 나는 줄곧 전형적인 자본주의 시궁창의 하나로 여겨왔었다. 그때 나는 이런 자본주의 시궁창으로 빠져 들어간다고 생각하니 그만 겁이 더럭 났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 일본노인의 묘한 얼굴표정을 접하는 순간 그 어떤 신비감이 감도는 호기심에 끌려 알게 모르게 발을 옮겨 놓고 말았던 것이다.

미아리는 온통 핑크색 천지였다. 홍등가, 홍등가하니 붉은 색천지였는가 했는데 온통 그 섹스의 정열을 자극하는 핑크색 천지였다. 나는 그 일본노인을 따라 어리뻥뻥한 속에서도 백화점의 진열장에 놓여있는 물건들을 구경하듯이 줄지어선 매 가게들의 투명한 통유리 뒤에 진한 화장에 화려한 옷차림을 하고 인형처럼 살포시 앉았으되 욕정이 뚝뚝 떨어지는 아가씨들을 구경하였다. 핑크빛에 물 젖은 아가씨들의 얼굴은 발가우리했다. 그런데 그 진한 립스틱을 바른 육감적인 입술들은 정육점의 고기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자기도 모르게 짐승고기를 파는 정육점이 떠올랐다. 거기에도 온통 핑크색에 물 젖어 있지 않은가?

그런데 팔자 걸음을 하며 한가하게 구경하기가 쉽지 않았다. 매 가게를 지날 때마다 그 가게의 마담들과 한바탕 싱갱이질을 해야 되니 말이다. 자기 집 쇼도 좋고 아가씨들도 어리니 서로 자기네 집에 들어가자는 것이다. 그런데로 구경을 하다가 우리는 어느 한 아가씨들이 첫날 각시처럼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다소곳이 앉아 있는 가게로 들어갔다. 일본노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에 백화점에서 물건을 아무렇게나 하나 골라 잡듯이 한 아가씨를 손가락질하며 골라잡았다. 그리고는 나보고 하나 골라 잡으란다. 이때 나는 속이 어지간이 얼어 있었다. 그 아가씨들을 코앞에서 정작 대하는 순간 나는 어쩐지 그들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나는 그래도 남자인체 하느라고, 남자의 자존을 세우느라고 일본노인의 흉내를 내며 어망결에 손을 들어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듯한 한 아가씨를 가리켰다. 아가씨는 좋아라고 벌떡 일어서더니 냉큼 나한테로 달려와 나의 팔짱을 끼고 2층 계단으로 향했다. 일본노인과 나는 2층 넓은 방으로 안내되었다. 우리가 중간에 놓여 있는 상 주위에 좌정하고 앉자 우리에게 뽑혀 우리에게 육체를 팔 아가씨들은 좋아라고 우리들에게 착착 감겨들었다. 이윽고 남자 뽀이 하나가 작은 병 맥주 네 병에 보기 좋게 차린 과일 구럭 하나를 들고 들어왔다. 우리 옆에 앉은 아가씨들이 약삭 바르게 술을 따랐다. 내 옆에 앉은 아가씨는 미화라 한다. 술이 한순배 돌았을가 하는데 키가 껑충한 쇼아가씨가 들어와 알은체를 했다. 밖에서 마담들한테서 쇼니 뭐니 말은 많이 들었지만 쇼가 도무지 뭔지 잘 몰랐다. 쇼는 영어로 출연이라는 말이 되겠다. 그러니 그 쇼아가씨는 출연하는 아가씨란 말이 되겠다. 다리가 늘씬한 쇼아가씨는 들어서자 바람으로 옷을 훨훨 벗어버렸다. 사실 옷이라기보다는 잠옷 같은 옷을 하나 걸치고 들어 왔는데 이것을 팽개치니 순 알몸이 드러났다. 여자의 신비한 부위들이 한 눈에 안겨왔다. 나는 결혼한 몸이라 여자에 대해 모르는 것은 아니나 이렇게 생전 처음 봐서는 안될 다른 여자의 성숙된 육체를 접하는 순간 나는 말할 수 없는 그 어떤 죄책감에 사로잡히며 몸은 사시나무 떨듯 했다. 쇼아가씨의 그 신비한 부위들은 눈앞에서 아물아물 거리다가 결국 하나의 점으로 되어 사라져갔다. ‘우상, 자, 기분 좋은데 한 잔 하기요‘ 일본노인의 말에 나는 극력 진정을 찾으며 몸을 가다듬었다. 그런데 이때 미화가 내가 추워서 그런가 해서 그런지 나를 꽉 껴안았다. 그녀의 뭉글한 젖가슴이 내 가슴에 와 닿는 순간 나는 또다시 사시나무 떨듯 했다. 한 여름에 이렇게 떠는 내가 우스운지 미화는 케드득 웃어버렸다. 술을 한잔 얻어 마신 쇼아가씨가 쇼를 시작했다. 참 그 쇼는 희기했다. 나로서는 기상천외의 것이었다. 나는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여자의 신비한, 우리 모두를 탄생시킨 그 부위에서 담배 연기가 몰몰 피여 오르는가 하면 그 담배를 총알 맞잡이로 쏘아 고무풍선을 터뜨리며, 그 부위에 꽂은 맥주따개로 맥주병마개를 척척 따 제끼는가 하면 계란 두개를 밀어 넣더니 닭이 알을 낳듯이 거침없이 도로 사발에 내 쏘아 깨뜨려 우리 보고 마시라 한다. 여자의 음기가 서려 더 없이 좋은 보약이라는 것이다. 그리고는 마지막에 그 부위에 붓대를 꽂더니 일본손님, 중국손님 만사형통하라는 한문족자를 버젓이 써 준다. 내가 어리뻥뻥해 있는데 일본노인이 얼굴에 묘한 웃음을 띠우며 쇼아가씨에게 팁을 주라고 나에게 한국돈 만원짜리를 길쭉하게 똘똘 말아 넘겨주는 것이었다. 나는 어망결에 그 돈을 받아 쥐기는 쥐었으나 어떻게 줄지 잘 몰라 머뭇거리다가 그냥 그 쇼아가씨에게 넘겨주었다. 그러자 나를 끼고 앉았던 미화와 일본노인의 파트너가 어줍게 웃었다. 분명 이런 촌놈이라구야 하는 식이었다. 그런데 그 쇼아가씨는 내가 넘겨주는 돈을 손으로 받을 념을 않고 나한테로 다가오더니 바로 나의 눈앞, 코 높이 수평선에서 그 신비한 부위를 갖다대며 바레무아가씨들이 춤이 끝났을 때 하는 식으로 두 다리를 약간 아래로 굽히고, 밖으로 벌리며 몸을 뒤로 젖히는 동작을 해보였다. 그리고는 손으로 그 확연히 드러난 신비한 부위를 가리켰다. 그제야 나는 일본노인이 똘똘 말아준 그 의미를 알만했다. 나는 시키는 서방노릇이라 그 돈을 그 신비한 부위에 꽂아 넣어주었다. 일본노인과 옆의 아가씨들이 박수갈채룰 보냈다. 쇼아가씨가 표현을 잘했다고 그런지 아니면 내가 돈을 잘 밀어 넣었다고 그런지, 아니면 이 두 가지 뜻이 다 있는지 여하튼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 그러자 그 쇼아가씨는 자세를 바로 잡고 방긋이 웃고는 물러갔다. 나는 쇼아가씨가 문으로 사라진 그 순간까지도 멍하니 그 어떤 이상한 상념에 사로 잡혔다. 내가 어찌 그 돈을 그 신비한 곳에 밀어넣을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어떻게 그 신비한 부위의 장난을 받아줄 수 있단 말인가?

‘자, 우상, 우리 마지막으로 한 잔 하지! 아가씨들이 안달아하는 것 같은데···‘ 일본노인의 말에 나는 제 정신으로 돌아섰다. 다음에는 무슨 절목이 벌어질지 나는 호기심반 두려움반에 맥주 잔을 쭉 비웠다. 모두들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나는 좀 알딸딸해났다. 이제 술기운이 오르는 모양이다. 미화가 나를 잡아끌었다. 자기 방으로 가자는 것이었다. 나는 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그녀를 따라갔다. 그녀의 방은 두 사람이 겨우 누울 수 있을 정도의 비좁은 공간이었다. 방안에는 역시 작은 핑크색 전구가 희미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미화는 자기 방이라고 해서 그런지 스스럼없이 옷고름을 풀며 ‘아저씨, 중국에서 왔지요?. 나도 중국에서 왔어요. 내 잘 해줄게요. 빨리 옷을 벗어요.‘라고 말했다. 나는 순간 놀랐다. 나는 풀어진 그녀의 옷고름을 다시 매주었다. ‘미화, 이거 무슨 짓이람?. 뭘 못해서 이런 짓을 한담?‘그녀는 눈이 동그래서 나를 쳐다보았다. 다음 순간 그녀는 시무럭히 웃으며 눈을 새초롬하게 뜨고 ‘아저씨, 그 뭘 그렇게 고상한 체 하세요? 옛날 경읽던 소리는 작작 하세요. 나도 한때는 아저씨보다 더 정인군자였단 말이예요. 그런데 그게 무슨 소용 있단 말입니까? 그것이 돈을 줍니까? 밥을 줍니까? 지금은 돈이 있어야 된단 말입니다. 알아요? 그러니까 이것은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직업이다 말이예요.‘라고 뇌까렸다. 나는 밸이 왈칵 치밀었다. ‘상놈의 계집애, 옳게 가르쳐 주면 듣기나 하지. 그래 무슨 말대꾸란 말이냐? 그래 한번 죽어봐라! 이 추화야!‘ 나는 바지를 끌렀다. 그 남자의 심볼로 요 상놈의 계집애를 혼내주고 싶었다. 안 그래도 언젠가 내가 청량리역을 찾아가느라고 어느 골목길에 들어서니 어느 할머니 한 분이 걸상에 앉아 있다가 일어나더니 영계가 있으니 하나 제끼고 가라는 것이었다. 나는 통 그 할머니 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 무슨 말인가고 되물었다. 그랬더니 그 할머니는 촌에서 온 사람 같은데 젊은 계집아이가 있으니 놀고 가라는 것이다. 내가 놀라는 기색을 나타내며 부랴부랴 내 갈 길을 재촉하니 할머니는 뒤에서 저것이 다 남자라고 하며 쯧쯧 입을 다셨다. 나는 그때 알게 모르게 기분이 몹시 상했었다. 나의 남자의 자존심이 무참히 짓밟히는 듯 했다. 나는 이날의 모욕을 미화한테 앙갚음하려 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나의 그 남자의 심볼이 말을 잘 듣지 않았다. 나는 오금에 힘을 꽉 주었다. 그래도 소용이 없었다. 미화는 꼴 보기 좋다는 듯이 히죽이 웃었다. 그러면서 자기의 재간을 과시할 때가 되었다는 듯이 저고리고름을 풀며 나의 심볼을 향해 다가왔다. 순간 나는 그녀를 탁 밀쳐 버렸다. 더러운 네년이 보기 싫어나니깐 나의 심볼은 일부러 안 선다는 자기 위안 비슷한 자호감이 살아났던 것이다. 나는 미화가 넘어진 채로 웬 정신병자인가고 멍하니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을 그대로 놓아둔 채 바지의 지퍼도 제대로 채우지 못한 채 부랴부랴 밖으로 뛰쳐나왔다. 나는 내 분에 못이겨 씩씩거렸다. 나는 오늘 내가 여기에 온 것이 얼마나 한스럽고 후회스러웠는지 몰랐다. 이윽고 일본노인이 얼굴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나왔다. ‘우상, 어떤가? 그래, 잘해 주던가?‘ 순간 나는 그 웃음기 먹은 얼굴에 침을 탁 뱉고싶었다. 요, 쪽발이새끼들, 언젠가는 서양물을 먼저 좀 먹었다고 은인도 못 알아보고 행패를 부리더니 이제는 돈깨나 있다고 무슨 섹스관광을 온다구? 나까지 자본주의 구렁창에 끌어들이면서··· 에익! 그러나 나는 결국 어쩌지 못하고 치미는 밸을 꿀컥 삼켜버렸다. 그래 돈이 없어 꼼짝 못하던 내가 그래도 일본노인 덕에 잘 먹고 잘 놀고 눈을 ‘틔우지‘ 않았는가? 순간 나는 일본노인을 향한 감지덕지한 마음에 사로 잡혔다. 마치 주인 없는 강아지가 먹을 것을 주는 새 주인을 만났듯이. 그러나 나는 다시는 일본노인을 안 만나도록 했다.

나는 어쩐지 내가 가련해 보이고 불쌍해났다. 아니, 괜히 내가 쓸데없는 정의감, 쓸데없는 사회도덕적 양심에 들떠 있는 듯 했다. 내 자신이 싱거워나다 못해 피씩 웃음이 나왔다.

나의 미아리 행적이 있은 지 얼마 안되어 한국의 <중앙일보>인지 <동아일보>인지 하는 유명한 신문의 한 기자가 창녀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했었다. 그 설문내용은 주로 왜서 창녀질을 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결과 설문에 응한 창녀들 90%이상이 자기가 좋아서, 하고 싶어서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 누구도 관여 말라는 것이었다. 자포자기, 될 대로 되라는 자포자기, 아니 그런 것 같지 않았다. 미아리의 창녀들은 분명 환하고 즐거운 웃음들을 짓고있지 않았는가? 여기에는 물론 미화 같은 조선족여성들도 포함되었다. 성의 타락, 아니 성의 현대적 난무, 말세기적 난무라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홍도야! 울지 말라, 오빠가 있다. 이것은 확실히 흘러간 옛 노래다. 그러니 이제는 새 노래를 불러야 한다. 홍도야! 울어라. 오빠가 달려간다. 그렇다. 홍도는 울어야 되고 오빠는 달려가야 한다.

(연재 다음에 계속)

 

<禹尚烈 简历(우상렬 약력>

姓    名:禹尚烈,教授,韩国精神文化研究院(现韩国学中央研究院)博士,博士生导师,延边作家协会理事
研究方向:中朝日文学研究
主讲课程:写作基础, 文学概论,美学概论,文学批评方法论等
学习经历:
1981年-1985年延边大学朝文系 学士
1987年-1990年延边大学朝文系硕士
1993年-1998年 韩国精神文化研究院(现韩国学中央研究院)
1998年-2005年延边大学朝文系副教授
2000年 朝鲜金日成综合大学访问学者
2005年 韩国培材大学客座教授
2006年-至今 延边大学朝文系教授
2006年-2008年四川大学中文系博士后过程
2010年3月-9月韩国延世大学访问学者
近五年科研成果(2010—至今):
论文:
2010年 朝流,韩流比较文化考察 统一人文学  2010.2
2010年 李湟、李珥与中国古代文论的关联研究 中韩文论关联研究 2010.2
2010年 作为中国少数民族语言文学的朝鲜族文学研究   延边文学 12期
2010年  語訥  南汉江文学 2010.4
2010年 女性励志篇:朝鲜电影和韩国电视剧的社会文化比较 统一人文学 2010.2
2010年 民族性与理念 中韩人文科学研究 第29辑
2010年 打破境界 延边文学 第10期
2010年 中国新时期文学与宗教 国际言语文学 4期
2010年 战争的伤痕与diaspora 东方文学 10期
2010年 中国朝鲜族与汉族民间故事比较 图们江论坛2010  2010.11
2010年 韩国电视剧当中的朝鲜族形象  朝鲜-韩国研究 第8辑
2011年 朝鲜电影《洪吉童》与韩国电视剧《快刀洪吉童》中韩人文科学研究  2011.4第32辑
2011年 在美diaspora的文学形象化  西太平洋韩语教育与韩国学国际学术会议 中国文化大学
2011年  李白流放时期诗论 流放文学学术会议  韩国南海文学馆  2011.8.16
2011年  表现欲与文学  延边文学2011.2
2011年  平凡的日常之真实  延边文学2011.1
2011年  爱情是什么  延边文学2010.12
2011年  中国朝鲜族小说文学研究  自由记者2011.9
2011年  柳然山人物评传  长白山2011.5
2011年  悲剧美  艺术殿堂2011.5
2011年  传统文学的现代意义  文化时代2011.3
2011年  金学铁的鲁迅文学的翻译研究  鲁迅与金学铁2011.6
2011年  鲁迅与金学铁  鲁迅与金学铁2011.6
2011年  金学铁与中国当代“大墙文学”  鲁迅与金学铁2011.6
2011年  从文艺心理学看金学铁的创作    鲁迅与金学铁2011.6
2011年  从民间故事看中国朝鲜族    人文研究2010.12
2012年 中国改革开放后新时期朝鲜族文学的宗教倾向研究  韩国文学论丛  第8期
金学铁与鲁迅比较研究, 鲁迅研究月刊,2013.4
中国古代女性英雄小说研究-兼论韩国古代小说 东亚古代学, 2015

著作:
2009年 韩流汉风互动研究  bookkorea  2009年12月10日
2010年 文学概论 延边大学出版社 2010.11月
2010年 人文学关联论文集 韩国学术情报2010.5
2010年 孔子新译 韩国学术情报 2010.3
2010年 中国古代白话文文学与朝鲜古代国文文学比较文学 韩国学术情报 2010.3
2011年 父亲种下的树(译著)  文学江出版社
中国主流文学视域下的朝鲜族文学,黑龙江朝鲜民族出版社,2012.9
朝鲜民族故事研究,黑龙江朝鲜民族出版社,2013.4

项目
2009年朝流与韩流的比较文学研究  韩国学中央研究院  2009年7月~2009年12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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