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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기/박춘화]인생은 “새옹지마(塞翁之馬)”

기사승인 2019.04.22  10: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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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춘화 약력: 1971년 중국 훈춘시 출생. 중국 동북재정대학교 무역경제과 졸업, 일본 히로시마대학원 경제학 석사 졸업. 일본조선족문화교류협회 문학원 담당. '조선족문학창', '조선족경제교류플랫폼' 등 위챗계정 운영. 일본글로벌핸드주식회사 상품투자 온라인 운영. park20161218@icloud.com

[서울=동북아신문]]“새옹지마(塞翁之馬)”란 말을 우리는 흔히 듣는다. 그 이야기인즉 어느 국경부근에 사는 새옹(塞翁)이라는 한 노인이 기르던 말이 국경너머로 도망친 후 암말 한필과 돌아왔으며 또 그 말을 타다가 아들이 다리가 부러졌는데 그 이유로 전방에 나가지 않게 되여 세상만사란 새옹의 말(馬)처럼 화(祸)가 복(福)이 되기도 하고 복이 화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도 예외가 아니다.지나온 우리들의 인생을 돌이켜보면 모두 화와 복의 반복의 반복이 아니겠는가?하여 세상만사는 화가 되였다고 해서 너무 상심할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그 화를 복으로 만들어가는 것만이 옳바른 삶의 선택이 아닌가 싶다.그래서 노자는 "화는 복 가운데 있고, 복은 화 속에 있다. 그러니 누가 그 극한을 알 수 있겠는가"라고 했던 것이리라.

작년에 조선족연구학회에서 처음으로 조직한 제1차 글짓기공모에 나도 일본생활이야기를 쓰고 싶었지만 지금까지 문학에 줄곧 담벽을 쌓아 온 나한테는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기회라고 생각했었다.한편 나는 근 3년동안 '조선족문학창'이라는 위챗문학계정을 운영해오면서 글을 쓰는 것보다 편집하는 것이 나의 적성에 더 맞는다고 늘 생각해왔었다.
 
하여 이번에는 조선족연구학회의 제1차글짓기공모주제 <자화상을 그리다: 나의 일본생활 이야기>의 글쓰기후풍을 이어 '당신만의 소중한 이야기를 들려주세요'라는 타이틀로 계속 우리들의 일본생활이야기를 담아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서 이번 문화교류협회 글쓰기응모기획을 세우게 되였다.

작년에 상을 받은 세분의 수필을 읽으면서 아마 모두 일본에 금방 왓을 때로 돌아갔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요즘 나는 꿈을 꿔도 항상 히로시마에 있던 그 때의 꿈을 꾸게 된다.지금은 모두 일본이라는 이국생활에 적응하여 별로 소외감이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지만 금방 일본에 왔을 때의 이야기는 사람마다 천차만별일 것이다.

하여 다사다나했던 나의 일본정착 이야기를 들려주고저 이렇게 필을 들었다.

2001년 3월29일,나는 난생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대련공항에서 히로시마행으로 그저 책에서만 보고 말로만 듣던 일본이라는 땅에 발을 붙히게 되었다. 내가 탄 차를 따라오면서 그렇게 소리치며 울던 다섯살짜리 아들을 저 멀리 뿌리치고, 대련공항에서의 남편과 대학동창들의 당부와 기대를 한몸에 안고…어찌보면 드라마의 한 장면이기도 하다. 지금도 아련히 눈에 밟혀온다. 참, 그 때는 왜서 모든 것을 뿌리치고 그렇게 일본에 오고 싶었던지 지금 생각해봐도 그 때 그 시절의 용기에 다시 한번 탄복하게 된다. 나는 대학졸업 후 공무원으로서 어린 나이에 한 기관의 후비간부(后备干部)로 또 소수민족 여성으로서 앞길이 아주 창창했었다.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그 때는 직위가 올라가려면 여러가지 조건을 구비해야 하는데 나의 조건은 그 누구보다도 우월하였다.거기에  대학교전업도 마침하고 있는 일과 딱 어울리는 어찌보면 퍼즐이 잘 맞추어진 그런 공산당여간부였다. 내가 일본에 온다고 하니 모두 나서서 말렸다. 좀 더 노력하면 여성 국장도 될수 있을텐데 하필 거기 가서 무슨 고생을 사서 하느냐고, 그리고 또 국장이 직접 석사연구생으로 나를 주당정학교에 추천하겠다고 할 때였다.근데 나는 직위가 올라갈 수 있고 학위까지 한층 업그레이드 될 수 있는 그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일본이라는 섬나라에 추호의 주저심도 없이 한 걸음에 달려왔다.왜서 그렇게 오고 싶었던지?
 
인생에는 여러가지 선택의 길이 있다. 어느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인생은 달라진다. 내가 계속 그 기관에 남아있었더라면 지금 쯤은 모모국 혹은 모모기관의 모모인물이 되였을 수도 있었겠다. 허나 또 모른다. 무슨 정치를 한답시고 권력싸움에 휘말려 철창신세를 지거나 혹은 그저 한낱 사무실에서 차나 훌훌 마시면서 신문을 올리 훓고 내리 훓는 나중에는 광고까지 다 읽어본다는 그런 아주 평범한 공무원이였을수도 있었겠다.생각해보면 아주 흥미진진한 일이기도 하다.

혼자서 인생의 선택문제를 푼답시고 아름다운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도 결코 나쁘지만은 않다. 만약 내가 그 때 그렇게 했더라면…아마도 지금 쯤은…

하지만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일본이라는 나라에 모든 것을 걸고 왔다. 그 때의 생각은 아주 단순했다.한달 수입이 고작 400원이였는데 일본에서는 10배 ,20배  아니 30배 이상도 벌 수 있다고 하니 아들 가진 엄마로서 도저히 그 유혹을 물릴 칠 수가 없었다. 커가는 아들을 보면서 뭔가 해주고 싶은 마음이 불 같은데 고작 400원이라는 돈으로는 평범한 생활을 유지하는 데도 한참 모자랐다. 부부 둘 다 공무원이였지만 친척, 친구 그리고 동료들의 부조돈에, 그리고 간혹 어울려 하게 되는 술놀이, 마작놀이에 시간 가는 줄 몰랐으며 수입은 좀처럼 늘어날 줄 모르는데 지출은 계속 늘어나기만 했던 안타까운 현실, 그 현실속에서 헤여나오는 방법이 바로 출국이라고 나름대로 생각을 했었다.아마 90년대부터 일어난 출국의 붐이 그렇게 나에게 무한한 희망을 안겨주면서 출국이라는 선택을 하게 했던 것이다.

그렇다, 일본에라도 가보자. 그러면 모든 것이 변할 수 있지 않겠는가?

때마침 초중동창이 히로시마에서 고향에 놀러 왔다가 석사지도교원을 소개해주면 쉽게 일본에 석사공부하러 올수 있다고 했다.하여 나는 그 동창에게 어떻게든 지도교원을 찾아주기를 부탁하여 그 친구의 덕분에 '원폭의 도시' 히로시마라는 낯선 곳에서 나의 일본생활을 시작하게 되였다.

히로시마는 인류상 최초로 원자탄이 폭발된 도시이다. 1945년8월6일, 8시15분에 피폭(被曝)으로 거의 페허로 된 도시에 복구건설을 하다보니 거리는  넓고 깨끗하며 3면은 산에 둘러쌓여있고 한면은 세토내해에 접해있는 산 좋고 물 맑은 일본 중부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이다.일본은 섬나라로서 지진과 태풍이 많기로 소문이 났지만 히로시마는 상대적으로 지진대가 활발한 곳이 아니여서 지진도 크게 없었으며 또 태풍도 시꼬구(四国)의 산맥에 의하여 많이 막혀 자연재해가 거의 없었다.내가 있었을 때만도 자연재해가 적었는데 작년에는 비가 많이 내리면서 흙모래재해(土砂災害)로 곤경을 치르고 있다.이렇듯 자연이든 인생이든 막론하고 화와 복이 엇갈리는 수많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래서 세상에는 아마 영원이란 존재하지 않는가 보다.

히로시마는 인류 최초로 원폭(原爆)의 피해를 입었으며 유네스코는 1996년에 히로시마 원폭돔을 세계유산으로 선정하였다. 그로 하여 히로시마는 해마다 140만명의 세계인이 찾아 오는 일본에서의 유명한 여행지로 변신하였다.지금도 히로시마라고 하면 '원폭의 도시'임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세간에 잘 알려지고 있다.히로시마의 로면전차에는 '자랑스런 세계의 유산-원폭돔'이라는 광고도 붙어있어서 참으로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경지에 처하기도 한다.어찌보면 원폭이 있었기에 히로시마는 자랑스런 세계유산인 원폭돔이 생겼으며 또 일반도시로부터 세계평화의 유명도시로 탈바꿈을 하지 않았는가?그럼 이것이 구경 자랑거리가 되여야 한단 말인가?바로 원폭이라는 인류의 재난으로 지금의 히로시마는 평화의 상징으로, 해마다 8월6일은 일본총리대신이 어김없이 찾는 평화를 위해 묵도하는 도시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친구네는 히로시마공항에서 좀 동떨어진 한적한 교외에 살고 있었다.나는 마중나온 친구와 함께 공항리무진버스와 전차를 바꿔타며 한시간반만에 겨우 친구집에 도착하였다.친구집에 도착하기전까지만해도 일본집들은 다 작고 다다미방밖에 없는가 했는데 생각외로 친구네 집은 널직하고 칸이 여러개 달린 1층짜리 일본전통가옥이였다.집앞 정원도 꽤 컷던것 같다.일본에서도 이렇게 큰 집에서 살수도 있구나 하고 생각하니 잔뜩 긴장햇던 탕개도 확 풀리는 것만 같았다.여기로 오기전에 얼마나 많은 것을 상상했던가? 헌데 생각과 달리 전혀 다른 풍경이여서 다소 안심을 할수 있었다.

4월1일의 히로시마는 벚꽃이 한창 만발 할 때였다.하여 친구의 일본인지인가족과 함께 처음으로 벚꽃구경에 나섰다.그 때 갔던 곳이 바로 유명한 히로시마성이였는데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너무 황홀하여 할 말을 잃었었다.일본이란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였구나, 오기를 잘 했다고 속으로 엄청 쾌자를 부르면서…근데 모두 일어로 대화하는지라 뭐가 뭔지도 모르고 그냥 그 들의 말을 듣기만 했다.간혹 웃거나 하면 그저 따라서 웃기도 하는 귀머거리, 벙어리 신세가 되여버렸다.어딘가 어색했다.하긴 금방 도착해서 그 일본인가족과 대화가 될리 만무했다.그들의 대화를 나는 한글자씩 일어단어를 떠올리며 우리 말로 번역하여 또 들은 말들을 구슬처럼 꿰매서 그 전체내용을 이해하느라 한창 여념이 없었다.그렇게 열심히 들어도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통 알 수가 없었다.그러다가 일본인 친구가 "어디에서 왓느냐", "결혼은 했느냐"…등 물어봐서야 겨우 알아듣고 나름대로 얼굴 붉히며 대답을 했던 것 같다.대학까지 일어를 줄곧 배워서 자신이 있었는데 실제로 일본인들과 대화를 하니 또 달랐다.하지만 그 날 일은 지금까지 잊을 수 없다.지금도 벚꽃구경이라고 하면 그 때의 그 정경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에 선히 떠오른다.아마 일본에 와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였기도 했다.

벚꽃구경 한 이튿날부터 나는 친구의 도움으로 홀로서기를 시작하였으며 일 찾기에 동분서주했다.마침 옆집에서 사는 연변대학에서 온 부부가 도시락공장을 소개해 준 덕분에 일은 바로 할 수 있었다. 神保라는 바다가 부근에 있는 도시락공장이였는데 매일 왕복 두 시간이상 자전거를 타고 다녀야 해서 무척 힘들었지만 너무 신바람이 났다.하루에 보통 8~10시간씩 일할 수 있었는데 시간당 알바비가 750엔이였다.그 때 히로시마최저임금이 시간당 640엔였는데 그 나마 괜찮다고 생각했다.그렇게 하루에 8시간 일하면 6000엔을 벌 수 있다.그 때는 환율이 높아서 하루당 인민페로 400원이상이 되었다.날 듯이 기뻤다.내가 하루 일해서 한달 공무원공자보다 더 벌 수 있다니?돈이 넝쿨 채로 굴러오는 것 같았고 이렇게 하다간 인차 부자가 될것 같았다.그렇게 나는 알바와 학교생활을 병행하게 되였다.

일본에서는 석사시험치기전에 연구생이라는 자격을 준다.나는 그 때 히로시마대학원 교육학부 연구생으로 수속이 되였기에 한 주에 한번 씩 학교에 가서 지도교원의 세미나(ゼミ)에 참가하고 그 나머지 시간을 자유시간으로 석사시험준비를 하면 되였다.한 주에 한번만 학교에 가고 나머지 시간은 다 알바를 할 수 있었으니 난 공부는 아예 뒤전이고 알바만 열심히 뛰였다.하루에 10시간씩 줄곧 서서 이미 만들어 놓은 밥과 채소를 그려놓은 그림대로 열심히 도시락에 채워 넣는 단순 노동이였다.그렇게 한달이 지나고 또 한달이 지났다.그렇게 알바를 하니 갖고 왔던 돈도 별로 필요 없게 되여 집에 보내기까지 했다.내가 여기서 잘 벌고 있으니 근심하지 말라며 큰 소리까지 땅땅 치면서…

그러다 어느 날 나의 건강에 이상이 생겼음을 알게 되였다.서서 일할 때에는 크게 감각이 없었는데 집에 와서 눕기만 하면 이상하게 복부가 아파나며 탁구공만큼 뭔가 생겨난 것이였다.후에야 알았지만 일어로 헤르니아(ヘルニア)라고 하는 병이라고 한다.병원에 가니 당장 수술하라고 했다.온지 두달 밖에 안되는데 수술을 하라고 하니 이 아니 청천병력이 아닐수 없었다.눈 앞이 캄캄해났다.수술을 안 하면 점점 커질 위험이 있으며 이 수술은 아주 간단하기에 전혀 근심을 하지 말라며 의사선생님은 오히려 나를 위로해주었다.방법없이 수술을 받았으며 수술을 받고 침대에 누워있는데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는 것이였다.그제야 후회막급이였다.이 두달동안 돈을 버느라 밥도 제때에 챙겨 못 먹고 알바에만 전념하고 건강을 아예 뒤전으로 해왔었던 자신이 너무 원망스러웠다.수술하고 하루만에 마음대로 걸을 수도 있어서 의사선생님과 언제 퇴원하면 되는가 하고 물어보니 언제라도 괜찮다고 하는 것이였다.나는 일본의 수술비와 약값이 엄청 비싸다는 소리를 들었기에 하루빨리 퇴원하고 싶어서 3일만에 퇴원수속을 했다. 의사선생님은 북경의 협화(协和)병원에 출장의사로 간혹 다니신다고 하시면서 사진도 함께 찍고 선물도 여러가지로 챙겨주시는 것이였다.너무 친절하게 대해주셔서 수술의 아픔보다도 이런 대우, 서비스에 감동이 되여 목이 메였다.이건 일본이라서 받을 수 있는 환자로서의 특별 대우이구나 하며 내가 오기를 참 잘 했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가령 중국이라면 이렇게 모두 친절할수 없겠지?겨우 이렇게 마음의 평형을 잡고 나는 병원문을 나섰다.

집에 오니 집안은 휑뎅그레하고 반겨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마음은 더 없이 쓸쓸하였다.이렇게 병이 나서 사지가 나른하고 아픈데 관심해주는 사람도 없고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그저 혼자서 흐느끼면서 신세를 한탄하며 아픔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에어컨도 없어서 선풍기를 돌려가며 하루 빨리 수술자리가 완쾌되기를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수술 후 한 주동안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하지만 이 한 주동안 다행히 나는 일본에 와서 겪은 일들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게 되였다.구경 내가 일본에 온 목적은 무엇인가?가령 내가 돈을 벌어서 가지고 간들 중국에서 무엇을 할수 있단 말인가?돈이냐 학문이냐를 선택하게 된 한 주이기도 하였다.나는 남들이 그렇게 부러워하는 국장자리까지 뿌리치고 여기에 와서 이렇게 고생하며 살고 있다.이것이 정녕 내가 바랐던 것이였을까?

그리고 내 전업은 경제학인데 지금 교육학부에서 1920년대 한어고문을 읽으며 중국근대의 교육학을 배워야 했다.전혀 모르는 분야여서 너무 힘들었다.일본에 와서 일어도 더 배워야 하는데 중국의 한어고문도 배워야 하는 상황이라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내가 배우려던 전업이 아니였다.하여 경제학공부를 하려고 경제학부 선생님한테 나의 연구계획과 함께 메일을 보냈다.몇명 선생님한테 보냈는데 그중 경제학을 연구하시는 마쯔다선생님한테서 한번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날 듯이 기뻤다.하여 마쯔다선생을 만나서 나의 의향을 말했더니 처음으로 받는 중국 류학생이라며 자기 연구실에 나같은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시면서 선뜻 받아주셨다.하여 교육학부 유학생사무실에는 경제학부에서 시험공부를 한다는 서류를 내고 경제학부로 옮기게 되였다.내가 대학교 때의 전업이 바로 무역경제였으며 대학 일학년때에는 체계적으로 경제학을 배웠기에 경제학전업은 나한테는 가장 어울리는 전업이기도 하였다.마쯔다선생님은 아주 인자하셨고 무척이나 나를 관심해주셨다.

그런데 경제학석사시험을 치려면 또 하나의 난관을 넘어야 했다.즉 영어시험이였는데 영어로 된 비즈니스기사를 일어로 번역해야 했다.영어기초가 별로 없는 나한테는 넘을 수 없는 하나의 큰 장벽이였다. 일본에 와서 또 영어공부를 해야 하다니? 어떻게 해야 할지 앞이 캄캄하였다.울며 겨자 먹기로 영어사전을 사서 영어단어를 외우느라 했지만 긴 영어문장을 읽어낼 재간이 없었다.하여 이 상황을 원 교육학부의 나의 츄다(チューダー:류학생을 도와주는 일본학생) 사와즈(沢津)상한데 말했더니 인차 연락이 와서 이마이(今井)상이 영어를 잘 하기에 이마이상한테 부탁하면 될 것이라고 했다.마침 사와즈상과 이마이상은 중국어를 배우는 중이라 나보고 중국어를 가르치고 대신 영어를 배워주겠다고 했다.사와즈상과 이마이상은 원 교육학부의 박사연구생이였는데 평소에도 나와 우스개도 곧 잘 하군 했었다.매번 세미나가 끝나면 몇이 남아서 이것저것 이야기 꽃을 피우게 되였는데 두 분 다 중국어를 배우기에 나한테 곧 잘 질문을 하기도 했었다.하여 우리는 함께 공부하기로 약속하고 매주 화요일이면 공부하는 타임을 가지게 되였다.사와즈상은 오까야마(岡山))에서, 이마이상은 후꾸야마(福山)에서 동히로시마에 있는 히로시마대학까지 자가용으로 통학을 했는데 매주 화요일이면 두 분이 엇갈아가며 나를 마중하러 왔다.그리고 점심시간에 함께 점심을 먹고는 음식가게에서 책을 펼쳐들고 나는 중국어를 ,이마이상은 나한테 영어를 배워주기 시작하였다.이렇게 나의 영어는 조금씩 늘게 되여 석사시험을 무사히 통과할 수가 있었다.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고마운 분들이였다.그리고 또 나의 석사입학식 날에는 두 분이 정장을 받쳐입고 꽃까지 사들고 진심으로 나의 석사입학식을 축하해주기도 하였다.그 날 먹은 점심이 셋이서 함께 먹은 마지막 점심식사였다.그 후 셋이서 만나기를 여러번 시도하였지만 좀처럼 시간을 맞출 수가 없었다.그 분들은 박사공부로 ,나는 석사공부로 매일 바삐 보낸 것도 있지만 학부가 달라 캠퍼스가 서로 달랐기에 더 만나지 못했다.
 
사와즈상은 원래 40대가정주부였는데 박사공부를 마치고 지금은 오까야마의 어느 여자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으며 이마이상은 와까야마대학을 졸업하고 모회사에 다니다가 교육학에 관심이 생겨서 박사공부를 시작했는데 지금은 기다큐슈의 모 대학에서 중국근대교육을 강의하고 계신다.이 분들 덕분에 나는 무사히 석사에 입학할 수 있었으며 나의 외로운 일본생활에 그 나마 한줄기의 단비가 되여 나의 마음을 적셔주었다. 일본사람들은 사람을 도우려면 정말 진심으로 적극적으로 잘 도와준다.남의 어려움을 언제 한번 가볍게 지날 때가 없이 계속 물어보며 이것저것 어드바이스도 잘 해주었고 나의 튼튼한 버팀목이 되여 주었다.덕분에 나는 무사히 학업을 마칠 수 있었으며 그 후에는 일본회사에 취직을 하게 되였고 상해, 하문, 복주 등지에도 자주 출장을 다니게 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일본에 금방 왔을 때 내가 겪었던 일 들,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건강을 잃게 되니 생각이 바뀌게 되였으며 그 생각이 화를 복으로 전환하게 끔 하였다.인생은 어느 순간 난관이 생겼다 하여 크게 낙심할 필요가 없다. 마치 <새옹의 말>처럼 그 난관이 또 새로운 희망과 기회를 가져다 줄지도 모른다.인생은 화와 복의 무한한 반복이며, 이런 반복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성장하며 각자 인생의 희노애락을 느낄수 있지 않는가?

일본에서의 생활은 나에게 무한한 기회를 가져다 주었다. 
지금도 나는 그 기회를 성공의 키로 전환시키기에 매일을 분주히 보내고 있다.

[편집]본지 기자 pys04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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