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집트에서 이웃집 가족들과 함께. 오른쪽 세번째가 필자
▲ 강효선 지구촌 공동체들을 탐방하고 있는 공동체 운동가

[서울=동북아신문]이곳을 뭐라고 불러야할지 모르겠다. 이스라엘이라고 부를 수도 없고, 팔레스타인도 아닌 곳, 이스라엘 팔레스타인이라는 이름도 썩 편하지만은 않다.

그곳과의 인연을 설명하려면 아주 오래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미처 10대가 되기 전이었을까? 저어기 먼 나라 이스라엘의 ‘키부츠’에 많은 한국인들이 다녀왔다는 글을 어디선가 보았다. 왜인지 그 글은 이후로도 오랫동안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들은 그곳에서 자원 활동을 하며 숙식을 제공받고, 공동체 경험을 하며 자기 자신과 세상을 깊이 만났다. 내 인생의 첫 번째 계획 공동체에 대한 인상이었다. 그 때문인지 아닌지 나에게는 공동체들에 대한 궁금증이 계속 되었고, 한국과 유럽, 아시아의 여러 공동체들을 방문하고 살아보며 지내게 된다. 이스라엘은 그곳에서 2년간 지냈던 아름다운 처자(?)와의 만남, 그리고 이스라엘 짝지를 둔 독일 친구와 가까워지면서 ‘언젠가는 가야할 곳!’이 되었다.

마침내 작년 2017년 2월, 이집트에서 한 달간 지낼 기회가 생겼을 때, 육로로 국경을 넘어 이스라엘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사람들은 사막에 있는 공동체 네옷 사마달(Neot Samadar)을 추천해 주었고, 2주가 조금 안 되는 시간동안 키부츠 2곳과 농장 한곳을 방문하고 예루살렘에 도달하기로 했다.

▲ 살아 있는 닭을 머리에 이고 걷는 이집트 여인

이집트에서 지낸 한 달은 내게는 중동의 이슬람 문화와의 첫 만남이었다. 그들의 삶은 나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아름다움과 충격, 오랜 기억들을 끄집어내고 동시에 앞으로를 상상하는 선물 같은 나날들이었다. 그들의 삶을 관찰하며 나는 6,70년대 한국의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었다. 철저하게 보수적인 사회. 권력에 의한 억압이 당연시되기에 저항을 상상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그런 나날들. 정부의 의해서 대학 일부분이 폭파되어도, 어린 아이들은 하루 종일 자루를 매고 민트를 팔아야하더라도, 하루 16시간 공장에서 꼼짝없이 앉아 일을 해야 하더라도, 묵묵히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있었다. 살아가기 위해서. 살아남기 위해서.

어느 날은 한 중산층 가족집에서 지낼 수 있었다. 차가운 부엌 바닥에 앉아서 우리에게 음식을 해준 옴미(어머니)는 우리를 부엌에 발도 못 들이게 했다. 옴미가 건네는 오봉위에 올려 진 양푼에는 이집트식으로 지어진 밥에 숟가락이 여러 개 꽂혀있었다.

그들은 열심히 먹고 있는 나에게 쉴 틈 없이 음식을 건네고 또 건넸다. 그들이 건넨 아이쉬가 내 앞에 탑처럼 쌓여갔다. 옴미는 같이 먹자는 부름을 한사코 거절하시고는 나중에 남은 음식을 혼자 드셨다. 누가 보나 안보나 켜져 있는 아주 자그마한 텔레비전은 그들의 삶의 일부분이었다. 바바(아버지)는 소파에 앉아 티비를 보다 방으로 들어가셨다. 촌스러운 카펫과 벽지 패턴들, 눅눅한 냄새,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티비소리를 뚫고 들리는 동물들의 울음소리……. 모든 것들이 어린 시절 내가 지냈던 할머니집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가장 멀고도 먼 곳이라 생각했던 이집트에서 가장 가깝고 가까운 기억과 만나고야 만 것이다. 그렇게 나의 무슬림 사회와의 연결은 깊어져갔다.

그 한 달간 다음 행선지가 이스라엘이라고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유를 물어보면 덤덤한 목소리로 1967년도에 있었던 전쟁에 대해서 이야기 해주었다. 그들이 우리를 침공했고, 우리 국민들을 죽였다고. 빼앗겼던 시나이 반도는 15년 뒤에 찾아왔지만 그들은 그 순간을 영원히 잊을 것 같진 않았다. 그래도 그곳을 내 눈으로 보기로 했다. 아름다운 공동체 키부츠는 정말로 존재하는지, 아니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정말로 미움 받아 마땅한 나라인지 엇갈린 말들 속에서 진실은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 골목에서 노는 이집트 아이들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국경을 넘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갑자기 온 세상이 깨끗해지고, 단정해지는, 고작 몇 미터 걸었을 뿐인데 인도에서 유럽으로 이동한 것만 같았다. 의자에 앉아 허허 웃으며 내 여권을 대충 쳐다보고는 나를 보내주던 이집트 국경 초소의 아저씨는 온데간데없고, 경직된 얼굴로 지시를 따를 것을 명령하는 이스라엘의 경찰들이 있었다.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도 비슷하고 생긴 것도 비슷한데 모든 것이 달라졌다. 다행히 나는 금방 통과했지만 내 바로 앞에 있던 독일인은 이스라엘인 동행이 있었음에도 초소 경찰에게 어디로 와서 어디로, 왜가는 것인지 1시간 가까이 설명해야만 했다.

그렇게 이스라엘 여행이 시작되었다. 나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히치하이킹을 하며 만난 트럭 아저씨는, 영어를 한 톨도 할 줄 모르셨지만 용케 아랍차는 히치하이킹 하지 말라는 말을 전하는데 성공하셨다.

한 키부츠에서 만난 요리사는 우리에게 아랍인들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인종차별적인 말을 쏟아냈다. 키부츠 네옷 사마달(Neot Samadar)에서의 며칠은 정말 내가 상상하던 것 이상으로 감사하고 싶은 아름다운 경험이었다. 고요함속에서 내면을 들여다보고 자신과 대화할 시간을 충분히 가질 수 있는 하루하루는 내가 만났던 그 어느 공동체보다 특별했다. 사막 한가운데를 농장으로 가꾸어낸 그곳의 숲 부스탄(정원이라는 뜻의 히브리어)에서 텐트도 모기장도 없이 비박을 하며 지냈다. 

▲ 히치하이킹 한 유대인 트럭 아저씨와.

해는 하늘을 오렌지 빛으로 색칠했고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의 노래는 자장가였다. 아름답고 감사할수록 나는 마음이 아팠다. 내가 경험한 혐오와 평화의 간극은 깊었고,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마음껏 여행하고 누릴 수 있는 나의 자유를 위해서 누군가는 세워진 높은 벽의 그림자속에서 고통받아야했다.

내가 감사하고 행복해하는 이곳의 평화와 안전 뒤에는 무시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모순이 있었다. 그 흘리는 피와 눈물로 만들어진 감사함과 행복을 인정할 수 없었다. 무너져 내리는 가짜 같은 현실에서 단단히 서 있으려면, 고통을 통과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나의 방식대로 이 모순을 마주하기로 했다.

그리하야 나는 이 여정을 친구들과 준비하기 시작했다. 나의 여정 메이트는 캐나다에서 온 로비(Robbie)와 스위스에서 온 플로라(Flora). 로비는 유대인이다.

진짜 사람들의 진짜 삶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두 가지 진실에서 혼란스러워하기보다 내가 보고 내가 느낀 것만 믿기로 했다. 다양한 사람들을 편견 없이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 듣기로 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한 겸손하고 존중하는 태도로 그들의 땅에 들어가고자 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동할 수 있는 자유에 대해서 숙고하고, 할 수 있는 한 최고의 방식으로 특권을 사용해보고자 했다.

어쩌면 터무니없어 보이는 우리의 여행을 사람들은 응원해주었다. 두 달 반 동안 이스라엘 북단 국경지대에서부터 서안지구를 통과해 남쪽 사막지대까지 걸어보기로 했다. 그렇게 클래스룸 얼라이브 이스라엘-팔레스타인(Classroom Alive Israel-Palestine)이 시작되었다.

(1)키부츠 ; 1900년대 초반 시오니즘과 함께 시작 된 무소유 공동체이다. 초창기 키부츠들은 철저하게 사유재산 없이 공동생산 공동소유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 아이쉬

(2)아이쉬 ; 이집트에서 주식으로 먹는 납작한 빵. 아이쉬는 아랍말로 ‘삶’이라는 뜻이다. 2011년에는 아이쉬의 가격이 올라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었다.

(3)클래스룸 얼라이브 (Classroom Alive) ; 2013년 전 세계에서 모인 청년들이 스웨덴에서 그리스까지 6개월간 걸으며 배움을 이어간 프로젝트로 시작한 배움 공동체이다. 지난 6년간 유럽, 북미, 북아프리카 등에서 진행되었다.

▲ 물드는 저녁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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