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북아신문] 소설로 보는 한국문인의 정감세계...

▲ 박서영(湑泳) 약력 : 2004년 문단데뷔,동서문학 소설문학상. 한국근로예술문학대상 소설문학상, 미래에셋생명 소설문학상. 스토리소설동인 소설문학상. 한겨레문연 부회장. 샘터문학 편집국장. 글동네2002 작가회, (전) 회장. 소설작당동인 (현)사무국장. (현)서정문학 심사위원장

 

단편소설 
                          욕망의 혀
 
                                                                                
깊이 잠들어 있던 새벽녘이었다. 탁. 탁. 매우 둔탁한 소리였다. 집안 어딘가를 두들기는 것도 같았다. 탁. 탁. 가만히 귀를 열고 들어보니 지팡이로 방문을 두들기는 소리였다. 이봐요. 문 좀 열어봐요. 신 씨였다. 신 씨는 뭣엔가 쫓기는 듯 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떨림이 가미되어 있었다. 올 것이 왔구나 싶어 봉숙은 벌떡 일어났다. 이런 시간 신 씨가 정신 줄을 놓지 않고서는 남의 방문을 두들길 여자가 아니었다. 어둑한 허공에는 시커먼 보자기를 뒤집어 쓴 형상이 앉아 있었다. 휠체어에 앉은 검은 형상은 허공에 대고 지팡이로 노를 젓고 있었다. 왜요? 무슨 일 났어요? 봉숙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는 대신 검은 형상에 대고 질문부터 던졌다. 죽었나봐. 좀 가 봐. 신 씨는 남이 먼저 말을 걸 때는 반말로 대꾸를 하다가도 본인이 말을 걸 때는 어정쩡한 존댓말을 썼다. 상황 설명을 더 듣지 않아도 사태를 파악한 봉숙은 이불을 제치고 황 씨 방으로 내달렸다. 검은 허공에서 분리된 신 씨는 휠체어를 굴리며 봉숙의 꽁무니를 따라 붙었다. 얼굴을 벽 쪽으로 돌린 황 씨는 침대에 푹 엎어져 있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봉숙은 오렌지색 티셔츠를 잡아 흔들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아무 반응이 없었다. 어서 미화한테 연락을 해봐요! 신 씨는 휠체어를 굴리고 다니며 허둥대고 있었다. 119에 연락 안했어요? 답답하긴! 119에 신고부터 해야지. 황미화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헝클어져 있던 옷장의 옷들이 말끔하게 정돈된 것 같다고나 할까. 그러한 반응은 의외였다. 심호흡을 깊게 하고난 봉숙은 119를 눌렀다. 여기요. 사람이 쓰러졌어요. 빨리 도와주세요. 다급한 이쪽에 비해 저쪽에선 짜증날 만큼 침착했다. 7분 쯤 걸린다는 119구급대원의 말을 떠올리며 봉숙은 황 씨의 오렌지색 등판을 담담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바닥에 깔린 한쪽 볼은 보이지 않았으나 다른 한 쪽 표정은 확연히 눈에 들어왔다. 죽은 사람을 봤다는 사람들이 “꼭 자는 것 같더라”하고 한 결 같이 말하던 것이 생각났다. 황 씨는 정말 자는 듯 고요했다. 아파트 입구에 한 여자가 스쿠터를 몰고 나타났다. 여자는 시동을 끄더니 한눈에도 꽤 묵직해 보이는 장바구니를 가볍게 옆구리에 끼고 현관으로 들어섰다. 도어록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 안으로 들어 온 여자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교대로 불렀다. 안에서는 아무 기척이 없었다. 여자는 대꾸가 있거나 말거나 개의치 않는 듯 콧노래를 부르며 장바구니를 풀었다. 그때 신 씨가 휠체어를 밀면서 나타났다. 뒤이어 지팡이를 짚으며 황 씨가 거실로 나왔다. 어제 미화가 반찬을 한 보따리 해 갖고 왔는데, 장을 또 봐 갖고 왔어? 이렇게 카드를 긁어대면 무슨 수로 당해내? 황 씨가 볼멘소리를 했다. 여자는 눈을 흘기며 대꾸했다. 딸내미가 해 갖고 온 반찬이 한 보따리면 뭐해? 한 젓가락도 안 먹는데. 그 반찬은 할아버지만 먹잖아? 할머니는 내가 만든 반찬만 좋아 하신다고. 솔직히 할아버지는 먹성이 좋으셔서 매일 이만큼 씩 장을 봐와도 금방 없어지고. 감당이 안 되는 걸 잘 아시면서 또 잔소리를 해. 황 씨의 잔소리를 받아치며 주방으로 들어가는 여자의 머리에는 아직도 헬멧이 얹혀 있었다. 미화가 뭘 해갖고 왔는지 풀어봐 봐. 지들 안 먹는다고 여태 열어 보도 않아? 황 씨가 소파에 털썩 드러누우면서 말했다. 봉숙은 냉장고에서 황미화가 가져온 반찬들을 끄집어냈다. 그중에 하나를 들어내 뚜껑을 열었다. 푸른 것이 취나물 무침 같았다. 봉숙은 손가락으로 나물을 집어 고개를 젖히고 입에 넣었다. 아니 나물에도 설탕을 넣다니. 반찬들이 달아도 너무 다네. 이 양반 설탕하고 원수졌나? 달긴. 난 달아야 좋던데. 황 씨가 미화의 역성을 드는 동안 신 씨는 입을 삐쭉거리며 봉숙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할머니 입 좀 벌려 봐. 봉숙은 취나물을 집어 신 씨에게 내밀었다. 신 씨는 머리를 흔들며 손사래를 쳤다. 나 미화 반찬 못 먹어. 달아서. 단 것 좋아하는 저 영감이나 주라고. 휠체어를 굴리며 신 씨가 방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봉숙은 반찬통 뚜껑을 힘주어 닫고 냉장고 속에 집어넣었다. 봉숙은 뚝배기 된장찌개를 식탁에 올렸다. 나박김치도 유리그릇에 담아 내왔다. 여기에 은수저만 올려놓으면 신 씨의 상차림은 끝이었다. 입에 맞을만한 반찬이 아무리 많아도 신 씨가 찾는 것은 오직 나박김치와 일명 뽀글이 된장찌개였다. 주는 대로 그릇을 싹싹 비우는 황 씨에 비하면 신 씨의 식성은 까다로웠다. 먹성 좋은 봉숙은 황 씨와 식성이 척척 맞았다. 오늘처럼 식비가 어쩌고저쩌고 불평하는 날도 있기는 하지만 사실 돈 많은 황 씨는 식비 걱정할 입장은 아니었다. 봉숙도 그것을 알기 때문에 마음대로 카드를 긁었다. 오늘 교회 가는 날인 거 아시죠? 가야지. 신 씨의 대답은 간단했다. 언제나 고양이처럼 까만 눈동자만 깜빡거릴 뿐 말이 없었다. 신 씨가 밥알을 세고 있을 때 황 씨는 5분도 안되어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운다. 그리고는 찌그러진 담뱃갑을 들고 뒤뚱거리며 밖으로 나간다. 아파트 담벼락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던 황 씨가 꽁초를 풀밭에 휙 던지고 들어오면 그때쯤 신 씨가 빈 그릇을 주섬주섬 포개놓고 식탁을 떠난다.
 
신 씨는 옷을 다 갈아입고 지팡이는 휠체어에 대각선으로 올려놓고 앉아 있었다. 그건 외출준비가 끝났다는 신호였다. 봉숙은 앞치마를 벗어놓고 신 씨가 탄 휠체어를 현관 쪽으로 밀었다. 신 씨가 팔을 뻗쳐 현관문의 자동장치를 눌렀다. 늘 맡아 놓고 하는 신 씨의 몫이었다. 5층에서 1층까지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오전 9시는 여느 아파트와 마찬가지로 가장 한산한 시간이었다. 출근하는 사람들은 거의 다 빠져나가고 없었다. 이 아파트의 거주자는 대부분 황 씨 부부처럼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었다. 재개발을 기다리는 낡은 아파트였지만 입지가 좋아 시세는 비쌌다. 5분 쯤 휠체어를 밀면서 골목길을 오르니 곧바로 교회의 십자 탑이 보였다. 길이 끝나는 곳에 나오는 도로는 인도처럼 한산했다. 거기서 횡단보도를 건너고 다시 2분쯤 언덕길을 돌아가면 교회로 쓰는 5층 건물이 나왔다. 아유, 이쁜이 집사님! 오시네. 호호호. 유자차 한 잔 하세요. 탤런트 전원주를 닮은 중년의 여자가 신 씨를 반겼다. 수요일이면 마중 나오듯 빠짐없이 교회 입구에 나타나 공짜로 차를 권하는 여자. 몽둥이찜질을 당한 듯 전신이 아팠던 자신의 몸을, 거뜬히 낫게 해 준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모든 사람들에게 차를 대접한다는 여자였다. 앞니가 돌출되고 헤벌어진 입술에 립스틱을 벌겋게 떡칠한 이 여자가 보이면 아, 그래 오늘이 수요일이었어! 하고 새삼 깨닫게 된다. 오늘도 나오셨네요. 그럼요 나와야죠. 오호호호. 이렇게 할머니를 매번 교회에 모셔다드리고 좋은 일 하시네요. 비밀창고처럼 입술을 밀봉한 신 씨 대신 그 여자와 요란한 인사를 한바탕 나누는 일은 봉숙이의 몫이었다. 신 씨의 휠체어는 안내를 맡은 당번이 넘겨받았다. 점심 드시고 안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할머니. 얼굴빛이 밝아진 신 씨는 고개를 두 번 끄덕거렸다. 한 번이 아닌 두 번을 끄덕거렸다는 것은 적극적인 긍정의 뜻이었다. 집사님이 교회에 오니까 기분이 좋으신가 보네. 저 집사님은 교회에 오시면 표정이 달라져. 다른 데서 보면 영 아닌데 말이야. 전원주를 닮은 여자가 신 씨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봉숙이 실실 웃으면서 자기가 보기엔 똑같은데 뭐가 다르냐고 하자 여자는 정색을 하며 목소리를 낮췄다. 내가 저 집사님을 젊어서부터 아는데 어떻게 몰라! 에이고. 우리 집사님 할머니가 처음부터 저랬거니 했나봐. 아무렴 사람이 어떻게 처음부터 저렇게 말이 없고 반응이 없을 수가 있겠냐구. 여자는 아무나 보고 집사님이란다. 아니, 그럼 무슨 사연이 있었어요? 봉숙도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고 은근한 태도로 물었다. 여자도 덩달아 소리를 더욱 낮추니 거의 속삭이는 소리로 들렸다. 왜 있잖아, 그 딸. 미화. 걔가 글쎄........엄마를 밀었대잖아. 계단에서.
봉숙이 여자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이랬다. 실성한 황 씨의 전처는 젖먹이인 황미화를 두고 집을 뛰쳐나갔다. 이후에 정신이 돌아온 전처는 가끔 집으로 들락거리는 것만 허용됐다. 그 무렵 신 씨는 남편과 사별했다. 아들이 둘씩이나 됐는데 혼자서 키울 수가 없어 시부모에게 맡기고 혼처를 알아보다가 돈이 많다는 홀아비를 친척에게 소개 받아서 황 씨와 재혼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미화는 계모 신 씨를 당연히 엄마로 알고 자랐다. 하지만 생모가 따로 있다는 걸 알게 되자 신 씨를 거부했다. 자라면 자랄수록 미화에게서는 반발심도 커져갔다. 앞에서 거리낌 없이 퍼대는 미화를 볼 때마다 저런 것을 키워서 무얼 하나 싶어 신 씨 역시 정나미가 떨어졌다. 네가 싫다면 나도 네 어미노릇 할 생각 없다, 하고 신 씨 쪽에서도 선을 그었다. 두 여자의 갈등은 점점 더 깊어갔다. 하지만 신 씨는 한편으론 미화가 지금은 함부로 입을 놀려대도 철이 들면 또 달라지겠지 하는 기대를 버리지 않고 수모를 무던히도 참고 견뎠다. 허나 그것은 오산이었다. 미화의 태도가 공손해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미화가 중3때였다. 학교에서 호출이 왔다. 연락을 받고 가보니 미화가 후배들을 때리고 교사에게 난동을 부렸다고 했다. 신 씨는 퇴학만큼은 시키지 말라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비는 수밖에 없었다. 두 여자의 막장드라마 같은 결말은 신 씨가 이날 학교에서 막 돌아왔을 때, 아파트 비상계단을 무대로 벌어졌다. 아직도 귓가에 교사의 빈정거림이 선한 신 씨의 눈에 비상계단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는 미화의 모습이 들어왔다. 황미화는 연기가 솔솔 나는 담배를 손에 그대로 든 채로 신 씨에게 달려들었다. 학교 가서 뭐라고 했는지 말해 봐요! 퇴학시키라고 했어요? 그랬으면 가만있지는 않을 거야. 그래? 가만 안 있으면 어떻게 할 거니? 이 엄마가 그렇게도 미우냐? 엄마? 누가 엄마라고 그래요? 자기 맘대로? 분명히 엄마로 취급 안 한다 그랬죠?
그날, 신 씨는 비상계단 맨 위에서 굴러 떨어졌다. 신 씨는 큰 부상을 입고 생사를 넘나들어야 했다. 12시간의 수술이 끝나고 응급실에서 회복기를 거치고 일반 병실로 옮기던 날, 신 씨는 남편 황 씨에게 작심을 하고 그날의 진실을 말했다. 신 씨는 계단에서 실수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황미화에게 떠밀린 것이었다. 처음에 황 씨는 펄쩍 뛰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태도를 미묘하게 바꿨다. 내심으로는 신 씨의 말을 믿고 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해결하자니 괴롭기만 한 진실에서 눈을 돌리고 싶어졌다. 자기는 안 그랬다고 울고불고하며 믿어달라고 하는 딸의 거짓말을 믿는 쪽이 여러 모로 수월했다. 이후 둘 사이는 부부라고 할 수 없는 냉담한 사이가 되었다. 그 비상계단에서 있었던 일은 결국 미궁 속에 빠졌지만 신 씨는 솟구치는 울분을 삭이지 못하고 명치에 차곡차곡 쌓아놓았다. 전처 딸의 괘씸한 짓과 남편의 배신이 신 씨의 뇌리에 중요문서 파일처럼 고이 저장되었다는 것이 비극이었다. 황미화로서는 자기에게 썩 유리하지 못한 그 사건이 흉측한 소문으로 더더욱 각색되어 들판을 휘젓는 폐지처럼 동네를 떠다니는 것에 치를 떨었다. 에미를 계단에서 떠다밀어서 병신으로 만든 배은망덕한 년. 사람으로 취급하면 안 될 년. 봉숙은 전원주와 함께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이런 말들을 몰래 주고받았다. 신 씨를 교회에 데려다 주고 돌아온 봉숙은 현관문을 열었다. TV에 넋이 나간 황 씨가 등을 보이고 앉아 있었다. 사람이 들어오는 것도 모르고 있는 황 씨를 보니 건드려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할아버지, 도둑이 다 쓸어가도 모르겠네요. 황 씨가 그제야 고개를 약간 돌렸다. 도둑이 어떻게 들어온다고 그래? 다시 황 씨가 TV로 시선을 옮겼다. 뭘 저렇게 눈 빠지게 보고 있나 하고 봉숙이 들여다보니 남녀가 인적 드문 도로에 차를 세워두고 자동차 안에서 성행위에 열을 올리는 장면이었다. 봉숙은 실소를 흘렸다. 할아버지, 올해 몇이세요? 그건 왜 물어? 할아버지 연세에도 그게 되나 해서요. 나이는 상관없는 겨. 이구, 남자는 다 똑같아. 지금도 여자 생각이 난다구. 킥킥. 생각만 나면 다인가요? 거기에 힘이 들어가야지. 황 씨가 흥분하면서 말했다. 허, 허! 난 이래봬도 젊었을 때는 두 시간짜리였어. 봉숙은 깔깔거리고 뒤로 넘어갔다. 할아버지 또 허세 부린다. 하여간 노인네 못 말려.
 
말씨름이 끝나고 봉숙이가 주방에 잠시 갔다 돌아오니 황 씨는 TV 리모컨을 들고 다시 야한 장면을 찾느라 채널 돌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봉숙이 들어오는 기척을 느낀 황 씨는 리모컨을 내려놓고 손짓으로 봉숙을 불렀다. 봉숙을 옆에 앉힌 황 씨가 문갑을 뒤적거리더니 약병 하나를 꺼냈다. 그동안 때때로 보였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던 약병이었다. 이게 뭐에요? 어? 이거 비아그라잖아! 이거 어디서 났어요? 얼마 주고 샀어요? 봉숙이 신기한 듯 약병을 손 안에서 이리저리 굴리며 들여다보고 있을 때 황 씨가 만면에 웃음을 띤 채 말했다. 나 허세 아냐. 이거만 있으면 얼마든지 돼. 5만원 주고 친구한테서 샀는데 아직 할멈한테는 안 가봤어. 아줌마가 한 번 시험해 볼 텨? 할아버지하고 나하고 무슨 재미로 해요? 난 젊은 오빠가 아니면 안해요. 봉숙은 농담으로 받아치고 주방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뜻밖에도 황 씨가 절뚝거리며 주방까지 따라 들어오는 것이었다. 이봐, 아줌마. 아줌마는 내가 젊었을 때 돈을 어떻게 벌었는지 얘기 못 들었지? 글쎄요. 장사하셨어요? 황 씨는 답답하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엉거주춤 식탁 의자에 엉덩이를 걸쳤다. 내가 어렸을 때, 일본에 징병을 끌려갔어. 19살 땐데, 뒤를 돌아보니까 어머니가 사립문을 붙잡고 울고 계시더라구. 어머니가 그러는 걸 보니까 나도 눈물이 막 나는 거야. 살아서 다시 이 길을 못 돌아올 것 같더라구. 동네 형들도 많이 징병엘 나갔는데, 하나도 못 돌아왔어. 한 집 건너 전보를 받고 초상집이 되더란 말이야. 그런데 내가 죽을 명은 아니었나봐. 일본에 가자마자 이게 해방이 된 거라. 나랑 같이 온 사람들은 죄다 배타고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난 안 가기로 했어. 아니, 왜요? 어느새 이야기에 몰입하고 있던 봉숙에게서 질문이 자동으로 튀어나왔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 빈손으로 돌아가 봤자 별 수 있겠느냐 이 말이야. 일본에 있으면 돈을 벌 데가 많으니까 돈을 벌어서 고향에 가야겠다, 이 생각을 했지. 그래서 성냥 공장엘 들어갔어. 거기서 번 돈을 죄다 고향에다가 송금을 했는데, 그 공장에서 벤또를 싸갖고 오게 했거든. 벤또를 다 먹으면 그 안에다가 몰래 훔친 성냥을 가득 넣어서 가지고 나왔단 말야. 그리고 그걸 또 시장에 갖다가 판 거야. 그래서 돈 엄청 벌었다구. 그렇게 10년을 일하다가 고향에 와보니까, 사람들이 우리 집이라고 가르쳐 주는데 뭐 어마어마해. 아버지는 내가 보낸 돈을 한 푼도 허투루 안 쓰고 죄다 논밭으로 사들인 거야. 가보니까 뭐, 그 동네에서 제일 큰 부자가 되어 있는 거지. 이야, 그 할아버지도 참 대단하시네요. 그럼 그 돈이 지금은 다 어떻게 됐어요?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 돼. 황 씨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부모님 모시고 형제들한테 한 몫 주고 나도 젊었을 때 좀 쓰고 했지만 또 땅값이 펑펑 오르고 해서 몇 배가 됐지. 나, 이 집 말고도 다른 집도 있고 상가도 있고 안 팔고 남은 땅도 꽤 돼. 황 씨는 이런 얘기들이 봉숙에게 영향력을 점점 끼쳐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름대로 절박한 심정의 황 씨는 헤벌어진 봉숙의 입을 주시하고 있었다. 어쩜, 그러셨구나, 하는 말만 되풀이하는 봉숙에게 황 씨가 제안했다. 그러니까, 아줌마. 아줌마한테도 내가 큰 것을 집어줄 수 있어. 내가 아파트 하나 줄게. 황 씨는 자신의 말이 봉숙에게 반응을 일으킬 때를 기다렸다. 봉숙은 어쩔 줄 몰라 하는 것 같았다. 어떻게요? 대뜸 이런 말이 나왔다. 황 씨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 봉숙의 호빵 같은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거야 내가 마음먹기 달린 거지. 내가 주고 싶을 때는 언제든 줄 수 있는 거고. 할망구하고는 몸은 완전 남남이야. 그래도 할망구가 집에 있을 때는 안 되니까 교회 가는 날 있잖아, 그때 하면 되는데 한 번 생각해 봐요. 먼저 있던 가사도우미가 허리가 안 좋다고 해서 그만 두게 하고 1년 전에 새로 들인 도우미가 봉숙이었다. 으레 그놈의 스쿠터를 타고 나타난 거구의 봉숙을 처음 봤을 때 황 씨는 대놓고 혀를 찼다. 술통 같은 체형에 머리는 남자처럼 깎았고 얼굴에는 점이 빼곡해서 흡사 별자리 지도 같았다. 이제는 보는 낙도 글렀다고 체념한 황 씨였지만 며칠이 지나지 않아 봉숙을 새로운 각도에서 보게 되는 일이 생겼다. 거동이 불편한 마누라를 목욕시키고 땀이 났다면서 자기도 바로 목욕을 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수건 한 장만 걸친 채로 욕실에서 나와서 황 씨의 눈앞을 거리낌 없이 지나다니는 것이었다. 의식하지 않아서 하는 행동이었지만 그것은 어쨌든 황 씨의 관심을 끄는 계기가 되었다. 하루 종일 같이 있다 보니 이런 저런 얘기도 하고 농담도 하는데, 봉숙은 야한 농담도 잘했다. 자기 말로는 “늘씬”했다는 처녀 시절, 부모님이 정해 준 착실한 약혼자와 육군 장교 사이를 오가던 얘기가 즐겨 꺼내는 소재였다. 부모님이 결혼 날짜까지 잡아 놓고 윽박지르자, 반발심에 육군 장교에게로 가서 1주일 내내 여관에서 뒹구는 것을 부모가 머리채를 잡아끌고 와서 지금의 남편과 결혼시켰다고 한다. 황 씨가 웃으면서 1주일씩이나 무얼 했냐고 묻자, 봉숙도 웃으면서 “어디가 어떻게 좋았는지” 과장을 해가며 질펀하게 넌덕을 부렸다. 결국 결혼하고 난 뒤에도 그 장교를 못 끊어서 몰래 만났더랬다. 그 장교가 몇 년 있다 결혼을 했는데, 남편 몰래 혼수를 100만 원을 들여 선물하면서 많이 울었다고 했다. 그 외에도 스쳐 지나듯 만난 남자들 얘기를 많이 했는데, 아무래도 몸이 그 모양이다 보니 봉숙에게는 연애 경험이 무엇보다도 각별한 의미인 것 같았다. 그런 얘기를 남한테 하고 나면 자기가 섹시하게 여겨지고 자부심이 생기는 것 같았다. 지금 남편하고 사이가 좋지 않으냐 하고 물었더니, 봉숙은 빨래를 개다가 말고 한숨을 쉬면서 사이가 안 좋은 건 아닌데 피차 늙어서 그런지 그런 건 이제 재미가 없어졌고 다만 돈이 걱정이라는 말을 남겼다. 수증기가 자욱한 욕실 안에 옷을 전부 벗은 황 씨와 반팔에 반바지를 입은 봉숙이 들어갔다.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서 온 체중을 봉숙의 몸에 싣는 황 씨를 붙잡아서 뜨거운 물을 가득 채운 욕조에 눕혔다. 오늘은 1주일에 두 번 있는 목욕시키는 날이었다. 황 씨는 봉숙이 비누칠을 할 수 있도록 등을 돌렸다. 황 씨는 물이 뜨듯하고 노곤한 것이 막 눈이 감기려고 하는 찰나에 봉숙이 말을 걸어 흠칫 놀랐다. 아파트 말이에요, 언제, 어떻게 주실 거예요? 왜. 생각해 봤어? 생각해 봤는데요, 할머니도 있고 딸도 있는데 할아버지가 주실 수 있겠어요? 황 씨는 다시 혀를 찼다. 아무도 모르게 줘버리고 명의이전까지 다 해버리면 그때 와서 누가 뭐라고 하나? 약속 안 지키기만 해 봐요. 아, 25평짜리 아파트가 무슨 개 이름이여? 내 말 안 듣는다면 별 수 있어? 욕실엔 다시 침묵이 흘렀다. 황 씨는 노인답지 않게 피둥피둥한 허벅지를 내밀며 여기도 좀 마사지를 하라고 종용했다. 봉숙은 물속으로 손을 넣어 황 씨의 성기를 지그시 쥐고 당겼다. 오븐에서 막 꺼낸 풋가지처럼 물컹한 그 물건이 봉숙의 손 안에서 자유자재로 모양이 바뀌었다. 할아버지. 여기도 마사지 해드릴까요? 황 씨는 잠자코 있다가 한 마디를 꺼냈다. 문갑에서 비아그라 꺼내 와. 황미화는 집안을 서성거리면서 씩씩거렸다. 아버지한테 하나 밖에 없는 사위가 사업 자금이 모자라는데 이자 드릴 테니까 좀 빌려주십사 했던 요청이 매몰차게 거절당한 터였다. 분노와 동시에 한탄도 나왔다. 어째서 애비라는 저 화상은 쓰지도 못 할 돈을 싸 짊어지고 들어앉아서 내가 고통당하는 걸 즐기고 있는 걸까. 이건 내가 박복한 탓이 아니라 저 노인네가 터무니없이 욕심이 많고 어리석어서 이 딸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탓이다, 라고 말하면 남편이 코웃음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얼마 전, 생활비가 모자라니 한 달에 백여만 원이라도 보태달라고 아버지께 조아렸는데, 줄 돈은 없으니 이거나 가져가서 살림에 보태라 하고 황 씨가 통장 하나 던져 주기에 뭔가 하고 열어 보니 한 달에 칠만 사천 원 나오는 노령연금 통장이었다. 그 후로 남편은 부부싸움을 할 때마다 그 노령연금 통장을 들고 나와 눈앞에서 살랑살랑 흔들며 니 애비가 나를 칠만 원짜리로 취급했다며 욕설을 늘어놓고, 그걸로 황미화의 뺨을 툭툭 치기도 했다. 그럴 때면 황미화도 참지 못했다. 죽여라 이 자식아, 하고 고함을 치며 달려들어서 옷을 찢어버리고, 의자를 휘두르다가 형광등을 깨버렸다. 깨진 형광등에서 후두둑하고 잔해가 이부자리 위로 떨어져도 아랑곳하지 않고 싸우다가 싸움이 끝나면 냉정을 되찾고 이불을 베란다 밖에 털어버렸다. 그런 황미화가 매주 토요일마다 반찬을 만들어 갖고 황 씨 집을 들락거리기로 결정한 것이다. 황 씨는 탐탁지 않게 여겼다. 내가 시커먼 그 속셈을 모를 줄 알아? 나 죽을 때만 기다리고 있지? 이건 자식이 아니라 도둑년이여. 도둑년. 황씨가 황미화를 무시하는 것을 보면서 봉숙도 자연히 황미화를 무시하게 되었다. 그런 봉숙의 태도를 알아챈 황미화는 시도 때도 없이 들이닥쳐 봉숙을 잡았다. 나이로 치면 5살이 위기는 하지만 그 광기를 참아내기 역겨웠다. 당신 뭐하는 사람이야? 우리 아버지 하나 똑바로 못 모시나?”로 시작하는 황미화의 호통은 순전히 자기 기분에 의한 것이었다. 봉숙의 태도는 시종일관 못 알아듣는 척이었다. 사실 황미화는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 아버지 앞에서만 생각해 주는 척 연극을 하는 것이다. 봉숙은 속지 않았다. 봉숙은 황미화가 어떤 부류의 인간인지 알고 있었다. 큭큭큭. 저것이 유산 상속자라고 까불고 있지만 나도 유산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알면 어떤 표정이 될까. 최근에 황미화를 대하는 봉숙의 입가에는 의문의 웃음이 박꽃처럼 번져 있었다. 커다란 엉덩이를 좌우로 흔들며 주방으로 들어간 봉숙은 정수기에서 얼음냉수를 받아 입에 넣고 와작 와작 깨물며 폭발직전의 웃음을 억눌러야 했다. 황 씨는 담배를 태우며 미화를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고 있었다. 주말마다 반찬을 싸 갖고 와서 부모 안부나 살피고 가정부 군기나 잡으러 오는 것이 아니었다. 황미화는 돌아가시기 전엔 돈을 달라고 하지 않을 테니 대신 유언장을 쓰라고 날마다 조르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귀마개를 한 듯 들은 척도 않고 버티면 되는 일만도 아니다. 슬슬 이제 저 년을 어떻게든 해야 되겠다는 판단이 서고 있었다. 미화가 펄펄 뛰기 시작하면 도무지 시끄러워서 살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저녁, 황 씨는 느닷없이 황미화를 불렀다. 소식을 듣자마자 다음 날 새벽 댓바람에 달려온 황미화는 아버지가 이제 기운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모양이라고 짐작했다. 봉숙도 사태가 조금 이상하다는 게 느껴졌는지 물건을 찾는 척 하면서 안방으로 슬그머니 발을 들여놓았다. 왕방울만하게 눈을 치켜 뜬 황미화가 너는 여기 왜 있냐는 뜻으로 봉숙을 쳐다보았으나 곧 돋보기를 끼고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는 황 씨에게로 눈을 돌렸다. 나 죽으면 나누어들 쓰면 되지, 뭔 유언장을 쓰라고 사람 못살게 들들 볶는지 모르겠구먼. 아버지는 참말, 그러다가 아버지 아프시면 재산 싸움 난다구요. 건강하실 때 명확하게 선을 그어 놓아야 한다고요. 저 어머니도 그걸 바랄 거예요. 황미화가 신 씨를 흘긋 곁눈질하면서 말했다. 언제부터인지 황미화는 신 씨를 ‘저 어머니’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물건 찾을 때를 빼고는 황 씨 방에는 얼씬도 않던 신 씨가 언제부터 들어와 있었는지 휠체어에 앉아 무릎 위에 성경책을 펼쳐 놓고 있었다. 거, 임자도 할 말 있으면 해 봐. 됐어요. 나 신경 쓰지 말아요. 유언장에 대해서 의견이 있으면 한 마디 해보라는 황 씨의 배려였는데 신 씨는 한마디만 쏴대고는 입을 다물었다. 황미화가 아버지 생전에 한 몫 받아내지는 못하더라도 나중에 재산 분배 할 때 계모보다 적은 몫을 받는 불상사는 방지하자고 생각해 낸 것이 유언장이었다. 황 씨는 유언장에 뭐라고 끼적거렸는지 설명도 없이 볼펜을 신경질적으로 턱 놓더니 담배를 빼들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유언장을 집어 든 황미화의 쩍 벌어진 입을 보고 봉숙은 가슴이 철렁했다. 할아버지 재산 전부가 황미화한테 돌아간 게 틀림없었다. 이 아파트도 10억 정도 가니까 저 어머니도 서운하시진 않으시죠? 휠체어를 밀고 거실로 나가는 신 씨의 뒤통수에다 대고 황미화가 느물거렸다. 황미화는 주체 못 할 기쁨에 유언장을 가슴에 끌어안고 몸을 떨었다.
봉숙은 소파에 앉아 있는 황 씨 앞으로 다가갔다. 마침 신 씨는 교회에 가고 없었다. 추리닝 바지 속으로 들어간 황 씨 팔뚝에 근육이 꿈틀거렸다. 할아버지! 지금 뭐 해요? 화통을 삶아 먹은 것 같은 봉숙의 고함에 놀란 황 씨가 바지 속에 있던 손을 뽑았다. 그때 축 늘어진 살덩이가 따라 올라왔다. 그것은 황 씨 손에서 해방된 노인의 그 물건이었다. 푹 들어간 황 씨의 눈언저리 안에서는 광채를 잃은 눈동자가 멀뚱히 봉숙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뭐하는 거예요? 그리고 왜 약속 안 지켜요? 뚱딴지 같이 무슨 말을 하는 거여? 유언장이요, 유언장! 25평 아파트를 준다고 했잖아요! 아, 딸하고 마누라가 지켜보고 있는데, 그럼 어쩌? 그래요? 그럼 지금은 아무도 없으니까 되죠? 그렇지 않아 고쳐놓으려고 했구먼. 그럼 잘됐어요. 말 나온 김에 지금 고쳐놓으세요. 그제야 봉숙은 어조를 조금 누그러뜨렸다. 지금은 이 노인의 비위를 맞추고 달래는 것이 상책이란 판단이 들었다. 자신에게는 일언반구 말도 없이 어제 느닷없이 황미화를 불러 놓고 유언장을 쓰는 것을 보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던 터였다. 배신감에 잠을 이루지 못한 봉숙은 자기도 당장 유언장을 받아낼 거라고 작심했었다. 미리 준비한 A4용지를 황 씨 앞에 갖다 놓고 볼펜을 손에 쥐어주었다. 어제 썼던 그대로 쓰시라고요. 내참, 알았어. 황 씨는 혀를 차며 볼펜을 바로 잡았다. 은행에 있는 적금을 비롯해서 고향의 땅과 8층짜리 상가는 황미화에게 주고, 25평짜리 아파트는 봉숙에게 준다고 적었다. 지금 살고 있는 이 아파트는 신 씨의 몫이었다. 날짜를 쓰고 서명까지 하는 것을 보자 봉숙의 마음속에도 어제 황미화가 느꼈던 승리감이 차올랐다.
황 씨는 요즘 수요일만 기다리는 것 같았다. 그게 황 씨가 사는 낙이었다. 한편 봉숙은 유언장에 자기 몫을 약속받기는 했지만 그래서 자기 처지가 달라진 게 뭐가 있느냐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할아버지 생전에 미리 받을 수도 있었을 아파트를 유언장을 빌미로 먼 훗날로 미뤄버린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황 씨 역시 유언장을 써 준 이후론 아파트의 ‘아’자도 꺼내지 않고 있었다. 이건 봉숙이가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유언장은 언제 개봉하고 아파트는 어떻게 넘어오는 것인지 답답했다. 봉숙은 더 이상 기다리고 있을 수가 없었다. 봉숙은 세상이 공평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같이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돈이 없고 돈이 필요 없는 저런 늙은이에게는 돈이 많다는 것은 비극이 아닐 수가 없었다. 저 늙은이를 어떻게든 꼬드겨서 그때그때 필요한 돈이라도 손에 넣자는 생각이 들었다. 돈 좀 주실래요? 돈? 만원이면 돼? 아니요. 많을수록 좋죠! 많은 돈이 왜 필요한 거여? 황 씨는 지력이 다된 황량한 논배미 같은 눈동자를 내리깔더니 한숨을 쉬었다. 아파트면 됐지 뭔 돈을 또 달래? 그건 나중이고 지금 필요해서요. 황씨의 말은 거기에서 단절되고 그야말로 인분 씹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봉숙의 예측이 딱 맞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래도 기다려 보기로 했다. 결국 황씨는 돈 얘기를 꺼내고 나서 며칠을 궁리하는 척 하더니 입을 닫아버렸다. 봉숙은 황씨를 향해 웃음을 머금은 입술로 아까우면 그만두라. 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다.
볼일 다 봤다는 식의 황 씨의 태도는 생각할수록 분했다. 담배 심부름을 시키고 조금 늦게 잔돈을 꺼내 놓아도 우수리 돈 왜 안주는 거여? 하고 그새 의심을 품는 늙은이였다. 단 한 번도 거스름돈을 심부름 값으로 가지라고 한 적이 없는 늙은이였다. 영감탱이. 돈을 못 주겠다? 흠.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생각이 있소이다. 봉숙은 인터넷을 검색했다. “유언장은 유언을 한 사람이 사망하고 난 후라야 비로소 효력이 발생하고 상속인들이 법원의 검인을 받아 집행한다.”라고 되어 있었다. 예상대로 아파트를 가지려면 이 영감탱이가 죽어야 한다는 얘기였다. 유언장 작성자가 죽고 나서야 유언을 집행할 수가 있다면 황씨는 봉숙을 위해 죽어줘야 하는 것이다. 이 영감탱이. 어떤 방법으로 목숨을 끊어줄까. 귀신도 모르게 감쪽같이 단축시키는 방법은 없을까. 황씨는 지금 혈압도 높고 당뇨병을 앓고 있다. 그때 마침 요즘 황미화가 만들어 오는 음식들에 생각이 미쳤다. 황미화는 캐러멜을 통째로 쏟아 부은 것 같은 약밥을 만들어오고 기름진 통닭에다가 곰국도 냉장고에 가득 채워 놓았다. 하나같이 당뇨병 환자가 먹어선 안 되는 음식들이었다. 그 화상이 당뇨병에 치명적인 음식들만 만들어 오다니. 아무리 무식해도 그 정도는 상식으로 알고 있어야 하지 않나? 하지만 생각해보니 봉숙에게는 잘 된 일이었다. 가족들은 어느 누구도 황씨의 식단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밥상을 차리는 봉숙에게 이건 안 된다, 저건 안 된다 하고 지시하는 사람도 없었다. 돌팔매질 하는 무리에 섞여 돌멩이 하나를 던지는 것에 불과하다. 기울고 있는 수수깡 집에 손가락 하나를 무심하게 툭 갖다 대는 것에 불과하다. 말만 안 하면 귀신도 모른다는 게 봉숙의 생각이었다. 봉숙은 인터넷을 열어 당뇨병에 나쁜 음식을 검색했다. 당뇨병 금기 식품이 줄줄이 나왔다. 콜레스테롤이 높은 전형적인 음식은 장어, 계란노른자, 곱창, 피자, 치즈, 패스트푸드, 분식, 쌀밥이었다. 거기다가 식후 30분의 운동을 하지 못한다면 치명적이었다. 봉숙은 황씨가 걸어갈 황천길을 닦아놓고 기다리기로 했다. 그날부터 봉숙은 식전에 먹는 당 수치 떨어지는 약을 소화제와 바꾸어 놓았다. 아침식사는 보리밥이 아닌 백미로 밥을 지어 황미화가 갖다 놓은 반찬을 식탁에 올렸다. 점심에는 국수나 빵 같은 탄수화물을 먹이고 합병증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간식은 설탕을 듬뿍 넣은 호떡을 만들어 주고, 엿장수에게서 호박엿을 사갖고 들어와 나누어 먹었다. 피자도 사다가 냉동실에 잔뜩 넣어 두고 전자레인지에 덥혀서 먹였다. 저녁식사는 내장탕을 끓여서 백미 밥을 한 그릇 말아 먹였다. 식후에 해야 하는 운동은 배가 아플 수 있다는 이유로 만류했다. 황씨는 주는 것마다 싹싹 비워냈다. 돈은 그렇게도 따지는 양반이 신기하게도 자기가 먹는 것엔 아무 자각이 없었다. 황씨의 몸은 눈에 띄게 비대해져갔다. 바람 든 풍선처럼 전신은 팽창되어 걷기조차 부자연스러웠다. 그쯤 되자 봉숙에게 하던 짓도 그만 뒀다. 이봐! 연고 좀 사와! 연고는 뭐하게요? 발가락에 바르려고. 황씨가 아침댓바람부터 연고를 사오라고 악다구니를 썼다. 양말을 벗겨보니 황씨의 발에서는 검붉은 핏물이 스멀스멀 나왔다. 봉숙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 이제 반응이 왔구나 싶었다. 봉숙은 모르는 척하고 연고를 발라주었다. 검은색 양말은 안에서 일어나는 비밀을 감추는 베일처럼 다시 황씨의 발에 씌워졌다. 걸음을 내딛는 황씨의 발자국마다 붉은 피로 도장이 찍혔다. 신 씨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바닥에 찍힌 핏자국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신 씨가 눈치를 챘다고 생각한 봉숙은 움찔했다. 하지만 신 씨는 아무 말 없이 밀대를 가져다가 핏자국을 닦아냈다. 병원으로 가자고 조른 사람은 황 씨였다. 팅팅 불어터져 피고름이 나는 발가락을 보면서도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자, 황 씨는 덜컥 겁이 났다. 특히 통증이 없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했다. 이봐요! 당신 뭐 하는 사람이야? 당 수치가 400이래. 400! 진찰실에서 의사를 만나고 나오던 황미화는 봉숙을 보자 다짜고짜 목소리를 높였다. 봉숙은 펄펄 끓는 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깜짝 놀랐다. 자신도 모르게 큰소리의 기세에 압도당한 봉숙은 뒤로 움찔 물러났지만 마음속에서는 반발심이 용트림을 쳤다. 아버지 발가락을 잘라야 한대! 이거 다 당신 책임 아냐? 몰랐어요. 봉숙은 기가 죽은 척 움츠러들며 고개를 조아렸다. 하지만 입으로는 기가 죽은 것이 아니었다. 이제까지 드시던 것을 드렸어요. 미화 씨가 가지고 온 반찬을 드렸구요. 봉숙은 교활한 눈빛으로 황미화의 얼굴을 살폈다. 황미화는 표정의 변화 없이 말했다. 다른 건 해드리지 말고 내가 해 온 반찬만 드시게 해요. 많이 드시게 하니까 이런 일이 생기잖아. 과식하지 못하게 하고. 그리고 과일 좀 사 드려요. 황씨의 장례식은 조용했다. 남의 이목 때문에 억지로 하는 곡소리 같은 것은 들리지 않는 상갓집이었다. 신 씨는 어떤 상황에서도 흐트러짐 없는 담담한 모습을 유지하기로 결정한 것 같았다. 황미화 역시도 이리저리 설치고 다니며 문상객들에게 참견하는 걸 보면 슬픔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폭죽을 터뜨리는 것 같이 요란하고 거슬리는 황미화의 웃음소리가 빈소를 간간히 뒤흔들었다. 며칠 전만 해도 돌아가실 것 같지 않았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겨? 두 살 터울의 황 씨 남동생이 문병을 다녀간 지 일주일 만에 문상을 왔다. 봉숙은 자신의 몸이 긴장하는 것을 느꼈다. 자기도 모르게 두 사람의 대화에 신경을 집중했다. 의사도 그랬어요. 원래 대수술을 받으면 회복하는 도중에 잘못될 수도 있대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당뇨병이 그렇게 무서운 병이냐? 아휴, 아버지는 보통 사람들보다 더 심했어요. 처음엔 발가락만 잘랐는데 나중엔 발목까지 절단해야 될 지경이었다니까요. 불어터진 발가락 같은 인상을 한 영정사진 앞에서 두 사람은 문답을 주고받고 있었다. 황미화는 아버지 잘못 모셨다는 말을 들을까봐 연막을 치고 있었다. 봉숙은 두 사람의 대화를 더 듣고 싶었지만 때마침 신 씨가 가보라고 하는 바람에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수고 많았어요. 이제는 자네가 할 일이 없으니까 집에 가서 쉬어요. 곧 연락을 하겠네. 봉숙은 문상객들을 지나쳐 장례식장을 빠져나왔다.황 씨의 장례가 끝났지만 봉숙은 언제쯤 나서야 좋을지 알 수 없어 초조했다. 신 씨나 황미화에게서는 그 후로 아무 연락이 없었다. 분명 황미화는 아버지를 화장한 재가 식기도 전에 재산 분배에 대해서 말을 꺼냈을 것이다. 상 치르고 경황이 없겠거니 하고 지레 짐작해서 안일하게 있다가 지들끼리 다 나눠 갖는다면 자신은 꼴이 우스워질 것이다. 그렇게 되기 전에 움직여야 한다. 갑자기 솟구치는 불안감에 봉숙은 경황없이 황씨의 집으로 향했다. 문 앞에 도착해서 벨을 눌렀다. 비밀번호는 알고 있었지만 이제는 번호를 눌러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관문을 연 황미화는 봉숙의 넓적한 얼굴이 거기 있는 것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곰 같은 년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뒤에서 이런 일을 꾸민 것을 알고 나니 어찌나 기가 막혔는지 모른다. 아파트 받으려고 왔어? 황미화가 조롱기 가득한 말로 선수를 쳤다. 그래요 맞아요. 봉숙의 태도는 당당하고 뻔뻔했다. 할아버지 생전에 정성껏 해드릴 만큼 해드렸어요. 할아버지가 고맙다고 저도 좀 챙겨줘야겠다고 생각하신 거죠, 유언장에 써놓으셨으니. 저도 법적으로 권리가 있는 거 아닌가요? 그런데 황미화의 태도가 좀 이상했다. 봉숙의 당돌한 말에 화를 내기는커녕 으레 그 폭죽 같은 웃음을 터뜨리며 한참을 웃는 것이었다. 하하하하! 유언장? 유언장은 쓸모가 없어! 유언장으로 나눠 가질 재산이 한 푼도 없는 걸 어쩌나! 처음부터 두 늙은이들이 짜고 가짜로 유언장을 써주는 척 한 거야. 저 늙은 년이 이미 옛날 옛적에 재산을 친아들들한테 다 빼돌려 놨더라고. 세상에! 땅이고 집이고 아버지 명의로 된 재산이 하나도 없어! 이미 재산을 다 빼돌렸는데 공증도 안 받은 유언장을 가지고 뭘 하겠어? 나한테도 가짜로 유언장을 써 줬는데, 그깟 유언장. 백 장이든 천 장이든 못 써? 그쪽이나 나나 완전히 속은 거야. 봉숙은 몸이 떨리는 것을 참으며 간신히 한마디 물었다. 그럼, 유언장은 아무 소용이 없는 건가요? 황미화는 허공에 대고 소리쳤다. 나! 소송 걸었어! 우리 아버지 재산 다 찾을 거야. 나 이 집에서도 절대 못 나가! 사태가 어떻게 돌아갈지 예감한 봉숙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현관문으로 나가는 봉숙의 귀에다가 황미화가 믿을 수 없는 말을 또 한 번 던졌다. 그 교활한 늙은 년이 목사 아들 내외를 지척에 두고 못된 짓거리를 하고 다니는 것도 몰랐어? 옆모습이었지만 신 씨가 틀림없었다. 언제나 입을 굳게 다물고 웃음에 인색하던 신 씨였다. 지금 신 씨의 모습은 자목련같이 고고한 모습이 아니라 개천가에 흐드러진 개나리 같은 모습이었다. 같은 것은 언제나 무릎 위에 얌전히 펼쳐져 있던 성경뿐이었다. 용머리형상의 지팡이가 없는 대신, 중년의 남자가 휠체어 옆에 쭈그리고 앉아 신 씨의 팔을 쓰다듬고 있었다. 어머니, 고생 많이 하셨어요. 이제 저희들 곁으로 돌아오셨으니 편히 모실게요. 신 씨는 잔잔한 미소를 입가에 띠고 황 씨의 인감도장이 들어 있는 작은 지갑을 만지작거렸다. 휠체어에 앉아서 기다리고 기다리며 전 재산을 손에 넣기까지의 일들이 떠올랐다. 미화가 만들어 가지고 온 달아 빠진 음식이 생각났다. 방바닥에 찍힌 핏자국을 밀어낸 일이 떠올랐다. 미화가 당뇨에 치명적 음식을 해다 먹이는 속셈을 알고 있었다. 잘 되었구나, 손을 안 대고도 코를 풀 수 있다니, 하늘이 도와주는구나 싶었다. 단지 봉숙이가 거기 끼어든 것이 예상 밖이었다. 결국은 미화와 봉숙이 덕택에 이 같은 날이 앞당겨지게 된 것이다. 신 씨와 목사가 서 있는 나무 밑으로 전원주를 닮은 여자가 다가왔다. 목사와 전원주를 닮은 여자는 휠체어의 손잡이를 잡았다. 세 사람은 이내 자리를 옮겼다. 높고 큰 웃음소리가 그들이 사라진 뒤에도 한동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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