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북아신문】수필로 보는 동포문인의 정감세계...

▲ 곽미란 grace_kwak@163.com. 수필가, 변역가, 숭실사이버대학 문예창작학과 졸업. 에세이집 '서른아홉 다시 봄' 출간. 미니시집 '찰나' 번역. 수필, 기행문, 시 수십 편 발표. , 동북아신문 기자, 재한동포문인협회 수필분과장. 

 

 

제1편 

나는 와인보다 막걸리가 좋다 

 

나를 알고 지낸 사람들은 대부분 첫 만남이 있고 나서는 나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다. “도도한 줄 알았는데 털털하네요.”

“네, 맞아요. 저는 겉모습을 보면 와인 같은데 알고 보면 막걸리 같은 여자에요.”

 

와인과 막걸리, 겉모습만 보면 전혀 다른 것 같지만 비슷한 점도 많은 술이다. 나이가 들면서 소주보다는 맥주, 맥주보다는 막걸리가 더 좋다. 비 오는 날에는 부추전을 구워서 막걸리 맛도 잘 모르는 남편과 권커니 작거니 하며 분위기를 내본다. 요즘은 술자리가 있으면 주로 막걸리를 마시고, 집에서는 와인을 가끔씩 한 잔 한다. 와인과 막걸리 모두 발효주라서 그런지 마시고 나면 이튿날에 속이 편하고 머리도 아프지 않아서 내 체질에 딱 맞는 술 같다.

 

처음으로 막걸리를 마셨던 건 어릴 때 고향에서 엄마가 만든 홈메이드 막걸리-탁주였다. 누룩과 찹쌀로 한 동이 만들어놓은 막걸리는 술이 아닌 음료수였다. 달짝지근한 막걸리는 먹을 것이 별로 없는 시골에선 별미였다. 집의 뒷문 처마 밑 음지쪽에 고이 모셔놓은 바께쯔 안의 막걸리를 나와 동생들은 심심하면 퍼다 마셨다. 음료수가 아니라 술이라고 어른들이 주의를 주었으나 달짝지근한 맛에 입맛을 들인 우리는 어른들의 말을 귓전으로 흘려 보냈다.

 

고등학교를 다른 현성에 가서 다닌 나는 방학이 되어 집에 가면 바로 고향친구들과 뭉쳤다. 어른들이 집에 안 계시는 날, 나는 서투른 솜씨로 여러 가지 반찬을 만들어내고는 엄마가 만들어놓은 막걸리를 가져와 친구들을 대접했다. 여럿이서 함께 마시니 반 바께쯔나 되는 막걸리는 금세 굽이 났다. 그렇게 알딸딸한 기분으로 우리는 청춘 드라마의 주인공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학창생활과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끝도 없이 떠들어대며 청춘의 한나절을 보냈다.

 

집을 떠나 사회생활을 하면서부터는 막걸리를 오랫동안 마셔보지 못했다. 주로는 맥주를, 그 후에는 소주와 빼갈, 와인을, 그러다가 소맥으로, 양주로 나의 술 인생은 서서히 진화과정을 겪었다. 목이 컬컬할 때면 어김없이 생각나는, 특히 더운 여름철에 마시면 뼛속까지 시원해지는 맥주, 부담 없이 꼴깍꼴깍 작은 잔으로 부어 마시는 소주, 한 모금만 마시면 입안은 물론 위장까지 따뜻해지고 뒤끝 또한 산뜻한 빼갈, 투명한 둥근 유리잔 속에서 찰랑이는 우아한 와인, 한 잔 마시고 나면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고 앞에 앉은 사람이 사랑스럽게 보이게 만드는 것이 와인의 매력이듯이 모든 술이 다 자기만의 독특한 매력이 있지만 막걸리에는 정(情)이란 요소가 추가되어있다. 그래서 그런지 언젠가부터 막걸리를 찾게 되었다.

 

요즘은 상하이에도 막걸리로 유명한 식당들이 꽤 있다. 허촨루에 있는 ‘사노라면’ 식당이며 즈텅루에 있는 ‘오두막’은 전국 각지에 여러 개 체인점이 있는 유명한 막걸리집이다. 이 식당들의 요리는 특별히 매운 것으로 유명하다. 메뉴는 몇 가지 안되지만 전부가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맵다. 막걸리 종류도 다양하여 한국 막걸리와 연변 막걸리를 골고루 맛볼 수 있다. 다만 홈메이드 막걸리는 유통기한이 며칠밖에 안되어 자주 술이 떨어지는 일이 있는 것이 유감이긴 하다.

 

작년 여름에 전라북도 전주에서 지인들과 함께 마셨던 밤막걸리는 밤 특유의 고소한 맛이 가미되어 한층 더 깊고 그윽한 향이 배어있었다. 아, 그 맛이란 첫사랑처럼 한 번 겪고나면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맛이다. 아쉽게도 내가 자주 다니는 서울의 편의점에서는 아직 밤막걸리를 본 적이 없다. 전주행차를 한 번 해야 할까 보다. 전주의 막걸리골목에서 제대로 된 막걸리를 마시기 위하여, 막걸리를 핑계 삼아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지인들과 회포를 풀기 위하여.

 

술이란 것이 효능보다는 분위기로 마시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막걸리는 다른 술에 비해 대단한 효능을 갖고 있다. 일일이 꼽지 않아도 면역력을 향상시켜주고 칼로리가 낮으며 포만감을 금방 느낄 수 있어 많이 마실 수 없기 때문에 다이어트에도 좋으며 피부미용에도 좋다고 한다. 그리고 이튿날 뒤끝이 깔끔하다. 한 마디로 마무리가 아름답다.

 

막걸리는 뭐니뭐니해도 우리 민족의 정서가 슴배어있는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술이라는 점에서 더욱 정감이 있다. 나라마다 그 나라를 대표하는 술이 있다. 예를 들면 독일의 흑맥주, 중국의 모태주나 오량액,  프랑스의 레드와인, 러시아의 보드카 등등, 그렇다면 한국의 막걸리 또한 “한국식 와인”처럼 한국을 대표하는 술이 아니겠는가? 매 끼니마다 먹는 입쌀밥에 누룩을 넣어, 우리 민족의 한과 얼을 버무려 발효를 시킨 막걸리, 구수한 그 맛은 어느 민족보다도 정이 많은 우리 민족을 닮았다. 격식을 차릴 필요 없이 우아한 글라스가 아닌 그릇에다 떠서 마시는 막걸리는 후한 인품도 나타낸다. 막걸리는 넉살 좋은 아낙네를 닮았고 인심 후한 할머니를 닮은 술이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막걸리가 좋아지는 걸까? 화창한 봄날에 난데없이 막걸리타령이라니, 사람이 그리운가 보다. 

 

 

 

제2편 


밥을 먹는다는 것


                                                       


  내가 어릴 적, 우리 시골집은 식사 때마다 시끌벅적했다. 우리 마을에서도 보기 드문 큰 밥상에는 늘 사람들로 꽉 찼다. 가족끼리 오붓하게 식사를 한 기억이 별로 없다. 집이 큰길 옆에 있다 보니 매일 오고 가며 드나드는 거지들도 한 둘이 아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는 거지도 귀한 손님처럼 대해주셨다. 쌀이 귀한 그 시절에 쌀을 국그릇에 찰찰 넘칠 정도로 수북이 담아내 와 거지들이 들고 온 자루에 담아주셨고 밥이 있으면 꼭 밥을 먹여서 보냈다. 맏며느리인 어머니는 손이 커서 늘 밥을 넉넉하게 지으셨다. 이웃들도 집에 갑자기 손님이 오면 우리 집에 밥을 얻으러 오군 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늘 상대가 원하는 것보다 곱절씩 담아주시곤 했다.


  물물교환이 가능했던 그 시절, 마을에 가끔 내려오는 타래떡(麻花) 장수나 빵(麵包) 장수들의 빵이 너무 먹고 싶어 쌀과 바꿔먹자고 하면 어머니는 절대 허락하지 않으셨다. 빵 하나를 사려면 쌀 한 공기는 줘야 하는데, 빵은 사면 기껏해야 간식거리밖에 안되지만, 쌀 한 공기로 밥을 지으면 여러 사람이 먹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차근차근 도리를 설명해주셨다. 그러면서도 크고 작은 행사 때는 떡을 푸짐하게 만들어 앞집, 뒷집, 옆집 이웃집들에 꼭 갖다 드리곤 하셨다. 어머니의 마음은 시골의 가을햇살만큼이나 넉넉했다. “쌀독에서 인심이 난다”는 속담을 어머니는 몸소 실천해 보여주셨다. 가을 햅쌀이 나오기 전까지 묵은 쌀이 동나지 않게 살림을 돌보는 건 쉽지 않았다. 그때쯤이면 끼니마다 밥을 몇 공기씩 먹어야 성이 차는 아들을 여럿 둔 어느 집에는 벌써 쌀이 떨어졌다느니 하는 소문이 아낙네들의 입소문을 타고 우리의 귀에도 흘러 들어왔다. 하지만 내 기억 속에 우리 집에는 한 번도 쌀이 떨어져 본적이 없었다. 끼니마다 하얀 쌀밥이 밥상에 어김없이 올랐다. 끼니마다 우리 집 밥상에는 사람들이 넘쳐났고 웃음이 넘쳐났다. 그랬다, 사람을 좋아하고 나누어 먹는 걸 좋아하시던 어머니에게 누군가와 밥을 같이 먹는다는 건 어쩜 그 시절 어머니가 세상에서 베풀 수 있는 가장 큰 호의였는지도 모른다.


  서울로 이사를 온 지 2주째다. 새 보금자리는 아직 어수선하고 식기들도 부족하다. 그러다 보니 여직 내 집에선 밥을 한 끼도 못 해먹었다. 그 동안 동생네 집에서 얻어먹고 가끔은 패스트푸드를 사먹기도 했다. 내가 가져온 쿠쿠밥솥은 중국에서 쓰던 걸 들고 왔더니 전원코드가 맞지 않았다. 그걸 핑계로 아직도 쌀을 안쳐보지 못했다.  집밥을 지어먹지 않은 집은 집 같지가 않다.


  이틀 전 서울 한쪽 끝에 사는 고모네 집에 갔다. 고모는 일찍부터 버스 역에 나와 기다리고 계셨다. 우리가 온다고 일찍 퇴근을 하신 것이었다. 저녁엔 나와 딸애가 좋아하는 조개찜 먹으러 갔다. 양이 얼마나 푸짐한지 서울에 와서 간만에 맘껏 먹은 셈이었다. 고모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근처 공원에 들러 산책을 하며 소화를 시켰다. 집에 들어서기 바쁘게 고모부는 어느새 계란을 한 그릇 수북이 삶아 내와 상을 차리신다. 김치에, 여러 가지 밑반찬에, 삶은 계란을 안주로 해서 고모부와 맥주를 마셨다. 전에, 서울에 와서 살기 전에 일 년에 한 두 번 꼴로 서울에 출장을 오게 되면 고모네 집에 들렀는데 늘 이랬다. 끊임없이 먹을 것을 내오고 시도 때도 없이 밥상을 차려서 하루에도 몇 끼를 먹는지 모른다. 맥주를 마시며 나와 고모, 고모부는 고향에 있을 때의 추억을 이야기한다. 맥주와 함께 끝없는 향수에 젖어 든다.


  이튿날 아침, 전날 먹은 음식이 소화도 채 안되었는데 아침밥상은 이미 차려져 있고 밥 먹으라는 고모의 독촉이 노랫가락처럼 경쾌하게 들려온다. 고등어자반에, 멸치볶음부터 해서 갓김치, 배추김치, 영채김치 등 각종 김치에 가지찜, 고향에서 갖고 온 고추떡튀김에 오이, 상추, 거기다가 해장국으로 콩나물과 시래기를 넣고 빨간 고추를 송송 썰어서 끓인 담백하고 얼큰한 된장국까지...... 수십 가지의 밑반찬이 딸려 나오는 한정식도 아니요, 눈처럼 새하얀 테이블보 위에 올려진 스테이크도 아니요, 한 입에 쏙 들어갈 만큼 정교하게 만들어진 일식집 초밥도 아니다. 고모의 밥상은 격식을 차릴 필요 없는 시골밥상이다. 반찬을 담은 그릇의 크기부터가 다르다. 무슨 반찬이든 듬뿍듬뿍 담긴, 시골의 넉넉한 인심이 그대로 묻어나는 정겨운 시골 밥상이다. 이런 풍성한 아침밥상을 마주한 적이 언제였나 싶을 정도로 까마아득한 내겐 수라상이나 다름없는 상차림이다.


  어릴 적 고향에 있을 때의 상차림이 이랬다. 둥근 밥상에는 늘 여러 가지 반찬으로 한 상 가득 찼고 갓 지은 쌀밥에선 구수한 냄새가 났다. 상하이에 나와서 객지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나의 아침식사는 사라진 지가 오래되었고 어쩌다 먹는다고 해도 최대한 간편한 것으로 대충 떼우곤 했다. 고작 밥 한 끼니인데 뭘 하는 생각으로 대충대충 지내왔다. 고모가 차린 아침상을 마주하고 앉으니 고향생각이 절로 난다. 고향에 연고가 없어진 지도 이젠 십 수년,  고모네 집에서 집밥을 먹을 때가 고향에 온 것 같다. 고모가 직접 담근 고추장이며, 된장이며, 젓갈을 적게 넣어서 담백한 배추김치며, 주방 한켠에 줄느런히 세워져 있는 각종 절임통에서 고향냄새가 난다. 그렇다, 집밥이 있는 곳이 집이고 한솥밥을 먹는 식구들이 있는 곳이 고향이다.


  아침밥을 먹고 집으로 가겠다는 나에게 고모는 바리바리 싸 주신다. 김치부터 해서 말린 채소, 다시마, 멸치, 과일에 봉다리 커피까지. 그 옛날 어머니가 그러셨던 것처럼 고모는 있는 것 없는 것 다 꺼내서 주시려고 하신다.


   나보다 불과 11살이 많은 고모는 내겐 고모라기보다는 언니같은 존재다. 콩 한 알도 쪼개먹었다는 어려운 그 시절에, 고모는 학교에서 어쩌다 과자 한 조각이라도 얻게 되면 먹지 않고 잘 챙겨두었다가 집에 와서 내게 주었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 고모인들 과자가 얼마나 먹고 싶었으랴. 하지만 고모는 조카를 위해 용케 참았다. 조카가 과자를 맛있게 먹는 모습을 지켜볼 때가 젤로 행복했다고 하신다.


  나와 16년을 한 집에서 같이 살면서 늘 고모역할에 익숙했던 고모, “고모가 해줄게”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던 고모는 결혼하여 딸을 낳고서도 이 말이 입에 붙어서 가끔 실수를 하신다고 한다. “엄마가 해줄게” 해야 하는데 자기도 모르게 “고모가 해줄게” 라고 해서 고모의 딸애가 “엄마 방금 뭐라고 했어?” 하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한다. 나나 동생에겐 이런 존재였으니 우리가 어쩌다 한 번씩 고모네 집에 가게 되면 고모는 우리에게 맛있는 것을 다 해 먹이지 못해서 안달이시다. 고모가 우리에게 베푸는 가장 큰 호의이다. 


  서울에 이사온 후 아직 마음이 안착이 되지 않아서 그런지 오랫동안 책을 읽지 못했다. 어젯밤엔 손세실리아시인의 시집과 백학기시인의 시집을 머리맡에 두고 읽다가 잠이 들었다. 오늘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백학기시인의 시집을 펼쳤다. “밥”이라는 제목의 시가 눈에 들어오며 내 가슴에 그대로 팍 꽂혔다.



 
이 세상에서 사람에게 베풀 수 있는
가장 큰 호의는
더불어 밥을 나누는 일이거늘,
 
古今
 
오메, 이 지상에서 내가 그대와
저녁 한 끼를 나누네.

 

  쌀알이 귀한 시대를 살아와서 그런지 지금도 나는 먹다 남은 반찬은 버려도 밥은 쉬이 버리지를 못한다. 밥을 나눈다는 것은 같이 살아서 숨쉰다는 것, 아무런 이해타산 없이 굶주린 자의 허기진 배를 따뜻하게 채워주는 인간의 기본행위이다.


  우연의 일치인지 어제 교회에서 목사님의 설교 또한 밥과 연관된 것이었다. 누구나 권력자, 유명한 사람과 친구하고 싶어하는 세월에 예수님은 세리나 사마리아인들과 친구로 사귀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먹는 것을 베푸셨다고 한다. 설교의 마지막 즈음에 목사님은 말씀하셨다. “오늘 어떤 분이랑 친구 하고 싶다면 당장 약속을 해서 같이 밥을 먹으십시오. 같이 밥을 먹는 일은 친구로 되는 가장 빠른 길입니다.” 더 이상 밥이, 쌀알이 귀한 시절은 아니지만 누군가와 같이 밥을 먹는다는 일은 여전히 소중한 일이다.


  오늘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전기밥솥에 맞는 코드를 사서 집에서 밥을 해야겠다. 그런데 누구랑 더불어 먹지? 또 고민거리가 하나 생겼네.


                                                            2015년 8월 말에 씀

 

 

 

▲ 딸애와의 여행은 언제나 행복, 그 이상의 무엇이 있다. 

 

 

제3편 

 

외딴 방은 외롭다

 

 

 

요즘은 책을 통 읽지를 않는다. 이래저래 읽을 새도 없고 읽을 책도 없다. 그러다가 문득 책장에서 꺼내 들게 된 것이 신경숙의 "외딴 방"이다. 신경숙 작가의 모든 작품 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책이다. 책을 통째로 필사하고 싶을 만큼.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은 그날은 출장 가는 날이었다. 비행기가 두 시간 넘게 딜레이 된 덕분에 나는 낯선 사람들로 가득한 공항에서 완벽하게 나 혼자가 되어 책 읽기에 몰두할 수 있었다. 픽션과 소설 그 중간쯤 어디에 있을 것 같다는 이 글을 읽으며 작가의 내면을 엿본다. 많은 부분이 공감이 간다. 저도 모르게 작가가 쓴 책과 내가 쓴 책을 비교도 하게 된다. 사실 내게도 외딴 방이 있었다.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의 외딴 방이 있었다. 나도 어쩌면 신경숙작가처럼 오랫동안 그 외딴 방을 마음속에만 품고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처녀작 "서른아홉 다시 봄" 에세이집에서 상해생활을 잠깐 언급하긴 했지만 그것은 그냥 수박 겉핥기 식의 표현이 되고 말았다. 내 맘속에는 외딴 방에 대한 추억이, 아니 기억이 그토록 세밀하게 자리를 틀고 앉아있다. 그 외딴 방에서 나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고 비 온 뒤에 하늘에 영롱하게 떴다가 곧 사라지는 희미한 무지개처럼 흐릿하게나마 빛나는 꿈을 꾸고 있었다. 

 

내가 살았던 집, 훙메이루 쪽에 있던 그 방, 일년 내내 햇볕이라곤 비쳐 들지 않던 그 어둡고 침침하고 좁은 방. 그곳에 20대의 내가 있다. 처절한 비바람 속에서 흔들렸지만 꺾어지지 않은 나의 푸르름과 고단함이 숨쉬고 있다. 몇 년 전 차를 타고 지나면서 보니 어느새 그곳은 사라지고 없었다. 이제는 내 마음속에만 존재할 그 곳, 나의 외딴 방. 그 외딴 방에서 나온 지 십여 년이 지난 지금, 나는 세상물정 전혀 모르는 처녀애로부터 이제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애를 가진 엄마가 되었고 처녀작 수필집을 한 권 출간하여 작가라는 타이틀을 갖고 사는 사람이 되었다. 

 

엄마의 부재. 책을 쓰고 나서 그 열정을 그대로 유지하며 꾸준히 더 열심히 글을 쓸 줄로 알았던 나는 엄마의 병이 위중해지면서 글쓰기와 책 읽는 일을 거의 놓다시피 했다. 엄마는 그래도 나의 곁을 떠났고 엄마의 부재는 늘 사소한 일상에서 불쑥불쑥 나타난다. 설거지를 하다가, 빨래를 널다가, 책을 읽다가 문득 이 세상에 안 계시는 엄마가 떠올라 눈물이 제멋대로 떨어진다. 그때 알았다. 한 사람의 부재는 그가 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 고통이 한꺼번에 다가오는 게 아니라 늘 이렇게 일상에서 시도 때도 없이 몰려온다는 것을. 이 느낌을 신경숙작가는 "외딴 방"에서 똑같이 쓰고 있다. 그래서 나는 낯선 사람들이 가득한 공항에서 바보처럼 울고 말았다. 외딴방과 엄마가 떠올라 한없이 슬펐다.

 

"이젠 제발 마음 다 잡고 글 좀 써봐"하는 주위 지인들의 각별한 충고에도 내 마음은 줄 끊어진 풍선처럼 허공을 날아다니며 종내 내려앉을 곳을 못 찾고 여기저기 떠돌고만 있다. 도저히 글이 씌어지지 않는다. 작가들 모두가 자신만의 글 쓰는 환경과 타입이 있듯이 나에게 글쓰기 적합한 환경이란 이런 것이다. 밤늦게, 식구들이 모두 잠이 들었을 때, 스탠드가 아늑하게 비춰지는 책상 앞에 마주앉았을 때, 혹은 음악이 흘러나오는, 손님이 적은 커피숍 혹은 도서관, 또 혹은 낯선 사람들로 가득 찬 공항에서. 그런데 나는 올해 내내 이런 환경을 만들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요즘은 그냥 모멘트에 가벼운 문자기록만 하는 정도다. 그 정도는 할 수 있는데 에버노트를 열고 글을 쓰려면 왠지 진지한 글을 써야 한다는 것 땜에 아예 시도조차 못하고 포기하게 된다. 

 

이번에 출장 길에서 잠깐 얼굴을 본, 20년 만에 만난 고등학교 동창들. 저녁식사를 마치고 헤어지기 전에 그들은 이런 얘기를 했다.

 

"미란이 넌 우리랑은 전혀 다른 삶을 사는 것 같아."

 

좀전까지도 즐겁게 저녁식사를 하고 학창시절의 추억으로 이야기 꽃을 피우며 딸내미들의 학교문제로 열심히 삶에 대한 고민을 하던 친구들이 아닌가. 그 친구들이 나를 보며 자기네와는 다른 삶을 살고 있다고 한다. 나는 갑자기 머리가 뗑 해난다. 갑자기 나와 그들 사이에 커다란 강이 가로막고 있는 것 같다. 신경숙의 "외딴 방"에도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 신경숙이 첫 책을 내고 나자 여고에 같이 다녔던 친구 하계숙이 전화가 와서 했던 말, "넌 우리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더구나." 공항에서 읽은 책에서 본 구절을, 그 말을 내가 이튿날 나의 친구한테서 들을 때의 그 감정은 참으로 뭐라고 형용하기 묘하다.  좀전까지도 "학창시절에 넌 순대도 못 먹었니? 학교 밖 가게에서 팔았잖아." 했던 친구들이 아닌가. 나는 학교 다닐 때 한 번도 순대를 먹어본 적이 없다고, 그냥 저녁자습 끝나고 학교식당에서 사먹은, 대파를 숭숭 썰어서 끓인 라면이 최고로 맛있는 줄 알았다고 했는데. 그 친구들이 갑자기 180도로 바뀌어 나보고 자기네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산다고 하다니. 나는 갑자기 그들이 낯설어졌다. 

 

이런 낯설음, 이런 거리감을 작년에도 만났다. 동창모임에서 만난 서울에 있는 친구, 소학교와 중학교를 나랑 같이 다녔던 친구다. 국내 B시에서 좋은 직장에 다니다가 어느 날 사직서를 내고 한국에 가서 노가다 판에 뛰어든 친구다. 꼬박꼬박 돈 모아서 결혼하고 국내의 대도시에 아파트를 두 채나 산 똑 부러지는 친구다. 내가 서울에 갈 때마다 꼭꼭 밥을 사주던 친구다. 그 친구가 미안해하며 말한다.

 

"미란아, 니 출판기념회 때 못 가서 미안해. 가려고 했는데 그런 장소에는 왠지 나 같은 사람이 가는 곳이 아닌 것 같아서. 가서 축하해주고 싶었는데, 못 가서 미안하다."

 

그는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있었다. 못 와서 미안한 건지, 자신이 그런 곳엔 못 오는 처지의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미안해하는 건지 그의 얼굴엔 정말로 미안함이 잔뜩 묻어나 있었다. 이번엔 내가 오히려 미안했다. 책 한 권 냈을 뿐인데 뭐가 달라진 거지?

 

스무 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뿔뿔이 헤어진 내 친구들, 그 뒤로 각자는 연해도시로, 해외로 나가 자신만의 "외딴 방"을 가졌을 것이다. 모두들 외딴 방에 대한 추억을 한 보따리씩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외딴방도 나의 외딴방과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살았던 외딴 방으로 걸어 들어 가고 싶다. 말해주고 싶다. 그 외딴 방이 있었길래 오늘의 내가 있는 것이라고. 너희도 마찬가지라고.

 

외딴 방은 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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