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포문학 8호 공모작품

▲ 황해암 약력: 서란시 조선족고등학교 졸업. 시/수필 수십편 발표. 동포문학 시부문 우수상 수상. 재한동포문인협회 시분과장.
[서울=동북아신문]지난해 겨울 한 서예가 선생님에게서 족자를 선물 받았다.

서남권 글로벌센터에서 주최한 <중국 동포 서예가 초대전>이 열리던 날은 평일이어서 나는 여느 때나 다름없이 현장으로 출근했다. 점심 무렵이 다 되어 지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늘 <중국동포 서예가 초대전>이 열리는 날인데 왜 오지 않았냐고, 그 말에 나는 풀이 죽어 대답했다. 요즘 시공기한이 얼마 남지 않아 급박하게 돌아가는 현장 상황으로 다른 일에 신경 쓸 경황조차 없다고. 통화를 끝내고 일손을 잡았지만 머릿속 생각은 진작 초대전으로 날아가 있었다.

내가 서화작품을 좋아하게 된 것은 중학 시절 과외로 본 당시 송사에서 기인했다. 맹호연 두목의 당시와 소식, 류영, 신기질의 송사를 보면서 제법 필묵과 벼루를 사서 신문지에 써보기도 했었다. 서예기초 하나 없이 서점에서 산 해서와 송체 습자본이 전부였다. 그러다 고향을 떠나면서 음풍영월의 취미를 차차 잊어버리고 생업에 몰두하게 됐지만, 서화에 대한 동경심은 늘 마음 한구석에 살아있었다. 그런 내가 이처럼 좋은 서예가초대전을 놓치게 된다니 마음 한구석에 짜릿한 아쉬움이 괴여 올랐다. 그런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오후에 친구에게서 또 전화가 왔다.

“야~ 지금 서예가 선생님이 우리가 원하는 가훈족자를 한 폭씩 선물로 써주신다 그러셔…”

“뭐 진짜? 대박…”

“걱정하지 마, 내가 선생님께 말씀드렸더니 네 족자도 흔쾌히 써주신 대, 어서 족자에 쓸 가훈 찾아봐.”

내가 그 귀한 선물을 받게 된 까닭은 두 가지 원인이 작용한 것 같다. 첫째 내가 그분의 서예작품을 좋아한다. 둘째 그 분이 나의 요청을 흔쾌히 들어주었다. 이 두 가지 조건 가운데 결정적 인 건 두 번째다. 내가 수석을 찾고 있는데 보석이 나왔다. 퇴근 시간에 맞춰 친구와 전철역 부근에서 만나 족자를 넘겨받았다. 난생처음 선물로 받아보는 질감이 느껴지는 족자였다. 내가 직접 찾아가서 인사드리고 청해서 받은 서예작품이 아니지만 분명 그것을 받아들었을 때의 기쁨이란 나 자신이 이과두주 한 병을 병탄하며 밤새 호쾌하게 뽑아낸 시들을 보고 느끼던 뿌듯한 성취감, 그것과 비슷하면서 또 다른 은은하고 깊은 레드와인의 맛 같은 것이다. 그것은 마치 어렸을 적 그토록 갖고 싶은 장난감을 마침내 얻어 가진 듯 그 순수하고 흐뭇한 행복과도 같았다.

길게 세로 내리 뻗은 족자는 강물 같았고 벽에 걸면 금세 폭포가 되여 쏴~ 하고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다. 친구가 보내 온 가훈이며 시 구절 중에서 내가 직접 찾은 글귀가 전통 한지위로 송이버섯처럼 귀한 향기를 풍기며 목이버섯의 색감으로 피여 난 것을 느긋한 마음으로 바라보노라니, 심신합일의 경지에서 솟구치고 휘두르고 감아올리고 끌어 내치는 붓의 조식이 마치 바람이 이끄는 대잎의 탈춤처럼 무아지경으로 나를 이끌었다. 석자 장대를 휘둘러도 거침없을 것 같은 시벌레의 방은 빨래거치대며 남원밥상과 옷장 테이블 책궤에 가로막혀 사이버공간의 거미줄 타기에는 제격이지만 실로 내가 좋아하는 선비의 허허로운 공간은 아니다. 족자의 형태로 봐서 세로로 걸어야 하나 딱히 걸 위치도 마땅치 않고, 억지로 걸어봤자 작품의 기가 집안을 탕평해버려서 진펄에 빠진 재규어 꼴이 될 것 같아서 벽에 걸 생각을 접었다.

한국에 온 지도 어언 십 년이 훌쩍 넘어 버렸다. 그동안 세파에 부대끼느라 묻어두고 가리고 살았던 문학을 향한 열망을 지천명의 언덕에서 다시 펼쳐보려고 오랫동안 놓았던 시 창작의 필도 들었다. 하지만 낮에는 땡볕이 내리쬐는 현장에서 일보다 더위에 지쳐 일하고 밤에는 샤워를 마치고 나서야 겨우 나만의 자유공간을 가지는 생활 속에서 문학 공부란 생각처럼 쉽고 재미나는 일은 아니었다. 가끔 책을 보다 핸드폰으로 시를 찾아 읽다가 눈이 까슬까슬하게 피곤이 몰려올 때면 비스듬히 누워 책꽂이 쪽을 바라보면 그분이 써준 족자도 그곳에 비스듬히 기대여 선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매경한고발청향>(梅經寒苦發淸香)

매향이 묵운(墨韻)으로 표구 되어 마치 박물관 깊은 곳에 은은히 앉아 있는 비취 원석처럼 넉넉해 보인다. 순응하되 굴종하지는 말라는 옛 현자의 말이 떠오른다. 뒤늦게 다시 시작한 습작의 길, 앞에 무지개가 있을지 험로가 나질지 알 수 없지만 이제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더라도 티 없는 옥처럼 받은 빛을 그대로 아니 더 현란하고 밝게 서로 주고받는 길을 가야 할 것 같다.

세월이 덧없이 흐른다 해도 족자의 힘찬 필치는 내 마음속에도 타투마냥 찍혀있을 것 같다. 우리가 진정 하얀 눈이 덮여 있는 막바지 겨울의 맵고 짠 칼바람 속에서 찾으려는 것 또한 아릿다운 매화의 자태도 자태거니와 바야흐로 찾아오는 봄의 향기를 들이쉬고 싶은 것 아닐 가 발볌발볌 다가오는 은밀한 봄의 정령을 맞이하고 싶어서가 아닐까.  

- 이 글을 서예가 신 현산 선생님과 서예를 사랑하는 모든 독자께 드린다.

  2018년 7월 29일 우주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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