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신문 8호 작품공모작

▲ 배영춘 약력: 중국 서란시 출생. 재한동포문인협회 이사. 수필/수기 등 수 십편 발표, 수상 다수.
[서울=동북아신문]  2015년, 늦겨울이었다. 오전 9시25분 장춘발 인천행 비행기를 탑승하기 위해 나는 서란에서 새벽 4시경에 미리 예약한 택시를 탔다. 밤부터 내리는 눈은 가로등이 내뿜는 주황빛 불빛에 눈은 꽃잎처럼 흩어지며 수북이 쌓여갔다. 혹시 비행기가 연기되지 않을 가하는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나를 태운 택시는 미끄러운 눈길에 예정된 시간보다 훨씬 늦게 공항에 도착 했다. 아침 8시 50분쯤, 폭설로 인해 장춘 공항 활주로가 폐쇄되고 비행기가 이륙하기 힘들다는 방송 안내를 듣고 나는 속절없는 기다림에 잠시 머리가 복잡해졌다. 폭풍과 함께 눈보라는 점점 더 많이 쌓여갔다. 오후 2시가 4시로 연기되고 다시 6시로 연기되더니 오늘 비행은 취소된다는 방송에 나는 멘붕이 왔다.

십여 년의 한국 생활에, 가지고 있는 것이란 성한 몸과 멀쩡한 정신으로 손가락질을 받아가며 일을 하다 보니 이제는 몸도 성하지 않고 정신도 왔다 갔다 하는 것이 건망증 같아 꼭 뭔가를 잃어버린 것 같은 생각이 들곤 한다. 정말 부지런하고 치열하게 살아왔다는 자부심으로 나에게 휴식을 주고자 중국에 설 쉬러 와서 꿀맛 같은 시간을 보내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려는 중이었다. 답답함에 나는 여행 가방을 다시 풀었다. 정연하게 정리된 선물꾸러미와 차곡차곡 쌓여 있는 옷가지들 사이에 눈에 익은 열쇠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중국의 집 열쇠가 보기 좋게 여행 가방 안쪽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나도 모르게 흐뭇한 웃음이 나왔다. 그것도 잠시, 한국의 집 열쇠를 어디에 두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당황한 나는 부랴부랴 호주머니를 뒤졌고 여행 가방 안에도 샅샅이 뒤져봤다. 그렇게 실종된 열쇠는 조기 치매 환자의 기억처럼 열쇠의 정체가 희미해지다 뚜렷해지기를 반복하며 기억이 나지 않았다. 즐거웠던 분위기에 취하다 보니 가방을 정리 하면서 한국의 집 열쇠를 가방 안에 넣지 않았던 것 같다. 바보처럼 미련을 갖고 다시 한 번 한국의 집 열쇠를 찾아봤으나 나올 리가 없다. 한숨이 나왔다. 을씨년스러운 날씨같이 나의 가슴도 좌절의 빛으로 막막하게 채색되었다. 집게손가락만 하고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나의 손때가 묻은 열쇠다. 어쩌면 여태까지 중국의 집과 한국의 집, 이 두 열쇠가 나에게는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도록 마법이라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바라는 뭔가를 상징적으로 열어줄 의지를 갖춰있고 주머니에서 떠나지 않는 동반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국 집은 심신이 피곤한 몸을 감싸주는 아늑한 보금자리이고 바쁜 일상 속, 숨을 고를 수 있는 공간, 방전된 에너지를 충전해주는 공간이다. 비행기가 이륙할 수 없다는 소식에 나는 망설임 없이 집에 갔다 오기로 맘먹었다. 조급한 마음을 진정하며 여기저기 수소문 끝에 겨우 콜택시를 불렀다. 많이 내린 눈으로 택시는 3시간이면 갈 거리를 5시간 넘게 지나서야 집에 도착했다. 중국에서 살고 있는 아파트는 넓은 녹지로 답답함이 없고 조망권은 물론 쾌적한 환경으로 조성된 보금자리다. 여생을 아무 탈 없이 여유자적하고 행복하고 편안하게 살아갈 집이다.  ‘딸각’ 자물쇠와 열쇠가 맞물리며 열리는 순간, 답답함이 사르르 녹으며 마음의 자유로움을 느껴졌다. 우리가 살면서 부딪히는 인생 문제가 모든 열쇠소리처럼 명쾌하게 풀어진다면 얼마나 좋으랴? 열쇠를 찾아 챙긴 나는 바로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되돌아왔다. 왕복으로 평소의 두 배가 넘는 택시비가 나왔으나 열쇠를 챙겼다는 안도감에 마음이 편했다. 그때까지도 공항에는 직원들과 싸우는 사람, 항의하는 사람, 자는 사람, 먹는 사람들로 공항은 북적거리고 아수라장이다. 나는 그 와중에도 방송에 귀를 기울였다. 오후가 돼서야 눈은 완전히 멈췄고 비행기가 이륙할 수 있었다.    1997년 한국이 IMF 터지던 해, 나는 처음 한국 땅을 밟았다. 그때의 생활은 나의 인생과 영혼을 송두리째 흔드는 혁명의 시작이었고, 생활방식부터 시작해 처음 접하는 외래어와 자본주의 사고방식에 적응이 되지 않았고 모든 것이 생소했다. 언어가 통하고 얼굴빛만 같은 것이 다행이라 할까? 한국에 와서 유일하게 느끼는 동질감이었다. 나는 많은 고민과 모순 속에서 살아오며 하나하나씩 한국의 정서에 맞춰 나가며 적응하기 시작했다. 중국의 정서와 생활 습관이 배어있던 것이 하나 둘 지워지며 나는 완전한 한국인으로 변해가고 있음을 느꼈다.  폭풍우와도 같은 IMF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자 사고방식도 많이 개선되었다. 2003년 한국 정부의 배려 정책으로 나는 불법체류자 꼬리를 지울 수 있었고 지금까지 취업 비자로 일하고 있다. 덕분에 나는 잘 살고 있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낯익은 한국에서 가끔 어색한 동거를 하고 있다는 느낌도 들 때가 있다. 중국과 한국의 문화가 가미되어 나도 모르게 불분명한 소속이 되어 있었다. 중국인이냐 한국인이냐 매운 고추에 버무린 춘장처럼 고유의 한국의 맛도 아니고 중국의 맛도 아닌 그 무엇이 된 것이다.  표현하기조차 힘든 복합적인 기형아로 되어가는 나를 보면서, 괴상한 내가 거울 앞에 서 있을 때가 있다. 달라진 나의 습관, 착각으로 구성된 이상야릇한 그림이 그려지게 진다. 나는 누구일까. 긴 세월 속에서 기형아가 되어버린 나의 실체는 무엇일까. 도대체 내 영혼의 국적은 어디일까.   어쩌면 제 둥지를 지키지 못하고 오랫동안 사라졌던 집시였는지도 모르는 생각이 들었다. 기회 있을 때마다 눈 너머로 배운 주방 기술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어 내 것 인양 휘두르고 있다. 나야말로 고향을 두고 방랑하는 집시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세월 속에서 나 자신의 실종은 내 삶에 대단한 사건이다. 격한 정체성의 혼돈을 거치며 오늘도 또 다른 나는 실종된 ‘나’를 찾아 끝없이 방황하고 있다. 낙엽귀근(落葉歸根)인 나의 종착역-중국에 갈 때까지, 온 힘을 다해 열정을 쏟아내고 기분 좋은 인생을 여는 열쇠와 함께 열심히 뛰어 다닐 것이다. 계획한 일이 눈앞에 보이는 그 너머에 또 다른 열쇠가 놓여 져 있다. ‘딸깍’하는 자물쇠 여는 소리는 명랑하고 명쾌하게 강한 울림으로 나를 맞이한다.  2018년 1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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