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포문학8호 공모작품] 기행수필/박연희

 [서울=동북아신문]하늘이 높아지고 바람이 가벼워지는 이 계절, 진한 가을을 따라 몇 년 만에 두 번째로 제주를 찾았다. 제주 서부에 있는 들불 축제로 유명한 새별오름이 여행의 첫 코스였다. 새별오름은 이른 저녁에 하늘에 떠 있는 샛별과 같은 오름이라 하여 새별오름이라는 이름을 가졌다고 한다.

▲ 박연희 약력: 수필가, 전동포모니터링단장, (사)조각보 공동대표, 재한동포문인협회 부회장. 수필/수기 백여편 발표. 수상 다수
제주 전역에 흩어진 360여 개의 오름은 비슷한 듯하면서도 저마다의 독특한 모양새를 지닌다. 덕분에 각각의 오름이 주는 색다른 풍광과 분위기에 빠져들 때 즈음이면 아마 자연스럽게 깨닫게 될 것이다. 제주는 ‘오름의 섬’이라는 것을. 예쁘면서도 외로운 이름을 지닌 새별오름은 오르막이 약간 가파르기는 하지만 20분 만에 정상에 오를 수 있다. 헐레벌떡 정상에 오르니 날씨 덕분인지 저 멀리에 있는 한라산이 한눈에 안겨 왔고 속이 탁 트이는 제주의 가을 풍광에 ‘아!’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체내에 쌓여있던 스트레스도 바람결에 다 날려가 버렸다. 파란 하늘들 속에 솜방망이 같은 흰 구름들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그림 같은 경치에 한 박자 쉬어 가기로 했다. 아직은 은색으로 변하지 않고 푸른 색을 띄고 있는 키 높은 억새밭에 무거운 몸을 한껏 던졌다. 한참을 누워서 풀냄새를 음미하면서 해마다 새별오름에서 있을 들불 축제를 상상해보기도 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 쫓기어 차에 올랐다. 두 번째 코스인 한담해변에 이르렀다. 한담의 바다를 따라 구비구비 길이 나 있는 이 산책로에서 바닷물이 이처럼 예쁜 파란 색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양말과 신을 벗어 던지고 긴 치마폭을 손에 걷어쥐고 무작정 바닷물에 발을 담그었다. 제주의 바람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차지도 따듯하지도 않은 적당한 온도이면서도 뭔가 감싸주는 느낌의 바닷물이었다. 바다에 구멍이 숭숭 뚫린 바위들이 여기저기에 들쑥날쑥 끼어있어 파란 색깔의 바닷물을 더 돋보이게 했다. 다시 태어난다면 한 마리의 물고기가 되어 이 파란 물속에서 평생 살고 싶다.  세 번째 코스는 파란색 파도가 물결치는 오설록 녹차 밭이었다. 녹차 밭의 푸른 내음도 좋았지만 녹차 색 아이스크림도 제법 맛있었다. 어쩐지 제주는 파란색과 너무도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구명조끼와 우비까지 챙겨입고 제주의 바다를 무한 질주할 수 있는 제트보트에 탑승했지만 마구 흔들어대는 보트에 눈조차 뜰 수 없었다. 비릿한 바닷물이 눈과 얼굴 그리고 입속에까지 마구 들어왔다. 정신 줄 찾아보라고 주상절리에서 보트가 잠깐 멈추었던 생각만 난다. 역시 스릴과 스피드는 젊은이들의 전용인 것 같다. 
 
바다가 바라보이는 횟집에서 포식하고 지친 몸을 이끌고 어둠이 깃든 호텔에 들어섰다. 샤워를 마치고 창가에 다가갔는데 뭔가 검은색 동물이 창문으로 들여다보는 느낌이 들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고라니였다. 동행자들을 불러 차창 밖으로 나가보니 저 멀리에 어미 고라니 한 마리도 있었다. 보듬어보고 싶어 고라니에게 다가가니 저 멀리로 피해 달아났다. 때마침 라이브카페에서 근사한 노래가 들려왔다. 주섬주섬 옷을 걸치고 라이브카페로 행했다. 신나는 노래와 맥주, 동행자들과의 이야기에 안주하여 밤이 깊어지도록 우리는 제주를 만끽했다. 제주도는 바다만큼 숲도 푸르다. 섬 안에 숨어있는 숲길인 ‘사려니숲길’은 이름처럼 신비로웠다. ‘사려니숲길’은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사방이 푸르러 삼림욕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 특히 키가 큰 나무들로 가득해 마치 다른 세상에 와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했다. 전형적인 온대산림지역으로 졸참나무, 서어나무, 산딸나무, 때죽나무, 단풍나무 등의 천연림과 조림된 삼나무, 편백나무 등이 다양하게 서식하고 있다. 우충충한 숲에 들어서니 조금 으스스한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공기는 한층 맑고 시원했다. 오붓한 숲속을 홀로 걸어가노라니 만감이 교차되었다.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삶에서 벗어나 조용히 사색할 수 있는 시간도 때로는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했다. 쭉 이대로 하늘 끝까지 걸어가고 싶도록 ‘사려니숲길’은 메리트가 있었다. 사계절 내내 꽃이 피어있는 제주 허브동산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곳에는 150여 종의 허브와 제주의 야생화들이 채워진 각양각색의 정원과 작은 동산들이 조화롭게 조성되어 있어 해외 유명 허브공원만큼이나 아름답다. 허브동산은 꽃 내음이 끊이지 않아서인지 번잡한 일상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하기에 제격이다. 아기자기한 조형물들과 허브향기에 취해 꽃 속을 걷다 보면 일상의 피로는 달아나고 마음에 쉼이 찾아온다. 아로마 황금 족욕을 하려고 진분홍 물속에 발을 담그었다. 얼마 만에 호사인지 모르겠다. 앞만 보고 달리다 보니 그동안 몸을 혹사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다른 사람이 눈이 아니라면 아로마 황금 물에 몸 전체를 담그고 싶었다.  따사롭게 내리쬐는 가을 햇살이 자꾸만 길 떠나기를 부추긴다. 길 위에서 우리는 또 다른 자신을 만나고 새로운 인연을 맺으며 몸과 마음을 가벼이 비워낸다. 이 시간은 자기 안의 참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이 아닐까 싶다.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