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련 본지 칼럼니스트. 흑룡강성 상지시 조선족중학교, 2002년 흑룡강성 문과수석. 북경대학 경제학원 국제경제무역학과 02학번, 학부 졸업.업무경력 : 2006년 9월 ~ 2010년 9월 우리에프앤아이(우리금융그룹 자회사, 현재 대신에프앤아이), 투자팀2010년 10월 ~ 2014년 6월 동양증권(현재 유안타증권) IB부문 기업금융업무2014년 6월 ~ 현재 유안타증권 기획팀, 비서팀 팀장, 중국변호사
[서울=동북아신문] 작년에 처음 글을 쓸 때, “나는 열심히 살고 있는 척 하고 있다”가 시작이었다. 긴 시간은 아니지만, 좁고 긴 터널을 빠져나온 것 처럼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나는 참 열심히 살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냐?”라는 질문에 늘 당당하게, “네!”라고 대답했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도 그보다 더 열심히 살 수는 없고, 그러하기에 그렇게 만들어진 지금이, 항상 베스트라고 생각해 왔다. 

 

 간만에 다시 글을 쓰고 싶어졌다. 

 현실을 비관하고 싶거나, 대충 살고 싶은 넉두리로 이렇게 글을 시작한 것은 아니다. 그냥, 세상은 모름지기 더불어 사는 것이고, “노력하여 나아지는 것”이 하나의 필연적인 편도는 아니었음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보면서, 스칼렛의 “내일은 또 다른 해가 뜨겠지. “라는 멘트에, 용기와 열정을 느꼈던 시절이 있다. 두번 세번 읽어보면서, 무지막지한 더 나은 내일이 아니라, 스칼렛이 겪었던 수많은 일들과 그 속에서의 스칼렛의 모습이 진정한 주인공이고 진정 나를 매료시켰던 그 무엇이라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주관 속에서 살게 되고, 그 주관 속에는 애정과 이해와 포용도 있고, 편견과 오해와 원망도 있을 것이다. 그런 주관적인 오해가 자칫 하나의 시대에 대한 기억이 되고, 여러 사람의 인생인 것 처럼 떠들 게 된다. 그러다 보면 나처럼, “나아질 꺼야”라는 것을 나를 위한 그리고 모두를 위한 정의인 것 마냥 당당하게 강요하고 요구하던 사람들에게 주관적인 정당성과 함께, 노력과 그 결과를 주게 되고 그 속에서 누군가는 환호하고 누군가는 좌절하며 또 하나의 짤막한 시대가 만들어 진다. 

 

 나는 공부를 좋아한다. 공부는 내가 들인 정성에 가장 솔직한 보답을 항상 주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의감”을 가지고 고집을 부리기에 아주 적당한 곳이 “회사”이기도 하다. 아주 작은 표준편차를 가지고 큰 공통적인 지향점을 바라볼 수 밖에 없는 곳이 회사다. 그냥 바라보는 척 하고 있더라도, 대놓고 아니라고 하기는 어려운 살벌한 곳이다. 각자 원하는 것이 다르고, 각자 성향이 다를 지언정, 이 속에서 원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 합의 도출을 위한 가장 훌륭한 점이다. 원하는 것이 있어야 곁을 내줄 수 있고, 곁을 내주면 누군가는 들어갈 수 있게 되는 법이니까. 설득의 지혜란 모름지기, 적당한 시기에 적당한 이야기를 공감하는 것으로, 원하는 것과 지금 있는 곳을 존중해주면, 언젠가 이루어 낼 수 있는 조금 복잡한 산식일 뿐이다. 

 

 학교에서, 회사에서, 그리고 가정에서,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과 소통을 겪다 보면, 나 또한 다양한 감정을 느끼며 이를 표현하거나 숨기거나 선택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 와중에, 가장 어렵다고 느끼는 관계는 과연 무엇일까. 

 “나아지기” 참 어려운 것이라는 표현이 적정할 것이다. 

 나에게 원하는 것이 없는 관계인 듯 싶다. 또는, 원하는 것을 표현하기 어려운 관계가 더 적정할 지도 모르겠다. 정확히 주고 받는 것이 없는 관계.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을 현실화 시키고, 지켜나가는 것에 많이 성공 해봤다.결국 서로 원하는 것이 있는 사람들의, 타이밍과 흐름을 잘 조율하여, 내가 원하는 것을 그려내는 일이었고, 그것이 그런 사람들의 공통의 이해관계에 공통의 “발전”에 우리가 “나아지기 위한 일에” 맞다고 해석한 것은, 사전적인 일의 당위성이었는지, 사후적인 자기합리화인지, 알바는 없다. 한 차례의Deal도, 한번의 조직개편도, 한번의 이동 또는 제도의 변화도 대체적으로 이런 부류에 속한다. 

 

 그럼에도 일이 이루어지는 타이밍이 내가 원하는 타이밍과 다르거나, 변수가 튀어 나올 때마다 인내심이 필요하고 소주 한잔이 생각날 만큼 수월하지는 않지만, 대승적으로 “잘 가고 있어. “라는 위로가 스스로 먹힌다. 

 

 다만 어려운 관계란 그러하지 않다. 

 가장 쉬운 예가, 직계 존비속을 제외한 가족이거나, 나를 알고 있으나 알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 또는 나는 알고 있으나 더 알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그런 부류인 것 같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요. “

 “좋은 환경이 좋잖아요. “

 “내가 욕먹는 것이 싫어요. “

 이러루한 희망사항들이 좌초되기 가장 쉬운 이유는, 원천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관계 일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이 또는 이러루한 사람들이 라고 보편화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내가 진저리 나게 싫어하는 부분이기에, 쉽게“나 같은 사람”으로 이야기 해본다면, 나만의 콤플렉스 때문에 원칙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관계에 필요 이상으로 노력하다가 상처 받기 딱 쉬운 부류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는 늘 관계에 노력하고, 나는 알아서 꿇고 맞추고, 게다가 나는 징징거리지도 않으며 내가 보게 되는 손해에 한 없이 쿨하고, 내가 아픈 것은 참고 남이 아픈 것은 지나치게 아는 척 한다. 마냥 대인배 같은 자랑처럼 거북하게 들리겠지만, 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나는 괜찮아, 나는 잘 하고 있어”의 연막 속에서, 나를 한 없이 약하게 만드는 무기력함을 만들어내기가 얼마나 수월한지. 

 

 그냥, 물과 기름같은 관계가 있다면, 이런 저런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을 뿐이다. 

 

 우리 두 딸만 놓고 봐도, 첫째는 발랄하고 에너지 넘치지만 자기 중심적이고 둘째는 살갑고 엄마 마음을 귀신처럼 알고 따뜻하지만 생각이 많아서인지 늘 피곤하다. 첫째는 글을 읽는 것을 즐겼기에 한달 사이에 한글을 떼고 책을 소리 내어 읽었지만, 둘째는 글을 읽는 것보다 자기가 원하는 말을 쓰는 것을 원하고 따라서 책을 읽지는 못하지만 그림을 그리는 마음으로 마음의 소리를 늘 글로 쓰기를 원한다. 얼마나 경이로운 모습인가. 이렇든 사람이 다르기에, 각자의 행복도 있고 각자의 고충도 있지만, 단촐한 네 식구에게도 퍼즐같은 관계와 고리가 생겨나면서, 2대2의 이런 네모가 아니라, 서로서로 끼워 주는 그런 관계가 생겨났다. 물론 트러블 또한 다면적이겠지만,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이러한 트러블을 해결하려고 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함께 살아가기를 택한다. 우리에게는 “더 잘” 함께 살거나 함께 살지 않거나는 선택지가 아님을 인정하고 가기 때문이 아닐까.

 

 가족으로서의 나는 딱히 열심히 살지 않는다. 그들의 감정을 읽고 생활을 케어해주려는 노력은 하지만, 딱히 열심히 산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는다. 하지만 잘 살고 있다. 

 그리고, 나아지려고 노력했었지만, 나아질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는, 내가 지치지 않을 정도의 노력으로 한 발 빼볼까, 또는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예의 바른 쪽을 선택하여 노력해볼까, 생각을 바꿔보는 중이다. 

 

 모든 것은 나의 삶의 태도이자 나의 생각의 습관에 달려있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것이 나의 감정을 지배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본다. 

 

 “내가 왜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는 건지, 그냥 웃으면서 이겨내다가도 한번씩 스스로가 무너져요. 편하게 살고 싶어요.”라는 이야기를 듣고서, “나 답지 않게” 단칼에 짤랐다.

 

 “그렇게 못하실꺼예요. 그 어디를 간들, 대충 넘어가며 시키는 일을 대충 할 수 있는 그런 사람 아니잖아요. “

 

 그냥 시기별로 내가 속해 있는 사람들의 나이와 생각과 경험들이 달라지다 보니, “설득”의 방법과 “나아짐”에 대한 생각들이 달라지기에, “나 같은 부류”의 사람은, 그냥 내 마음을 바꿔가면서 그들을 또 다시 이해하고 기다리며 또 다른 여정을 시작할 수 밖에 없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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