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연희 수필가, 전동포모니터링단장, 재한동포문인협회 부회장, 수필/수기 백여편 발표. 수상 다수
[서울=동북아신문]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이는 미당 서정주의 대표 시 <국화 옆에서>이다.

미당 서정주는 1915년 5월 18일(음)에 태어나서 2000년까지 살았던 시인으로서 현대의 시인들 중에서 만해, 소월, 지용 등과 함께 가장 많은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시인 평가에 대한 각종 자료에서 한국 최고의 시인으로 인정받고 있다. 지금까지 해외에 번역된 한국문학 자료 중 가장 많은 나라의 가장 많은 언어로 번역된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생전에 노벨문학상 후보로 다섯 번이나 추천되었지만 수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많은 이들의 가슴속에 서늘한 그리움만 남긴 미당 서정주, 국화꽃 향기로 홀연히 떠나가신 시인의 문학관을 찾아가던 날은 <미당문학제>가 닷새가 지난 11월 초가을이었다.

2001년 가을에 개관된 미당시문학관은 서정주 시인의 고향이자 영면지인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읍 선운리 마을에 세워졌으며 폐교된 선운초등학교 봉암분교를 새롭게 단장해서 만들어 진 것이다. 문학관 바로 앞에는 미당시문학관이라 새겨진 네모난 돌비석과 겨울이라는 시로 새겨진 둥근 돌비석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담쟁이덩굴로 덮여있는 거대한 정문이 운치 있게 버티고 서있었고 넓은 마당에는 흐드러지게 피어난 노오란 국화꽃이 여기 저기에 피어있었다. 이곳의 국화꽃 향기와 빛깔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것은 미당의 시가 함께 하기 때문일 것이다.

20세기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으로서 창작 활동 기간만 70년에 이르는 장수 시인인 서정주의 문학관은 그 어느 문학관보다 아름다운 자연풍광을 자랑하고 있었다. 산과 바다, 변산반도와 곰소만, 그리고 이들을 배경으로 아름답고 넉넉하게 자리 잡은 질마재 마을. 그 한가운데 시문학관이 있었으며 미당의 시 5천여 점을 보관전시하고 있었다. 우리말을 가장 능수능란하고 아름답게 구사해 한국어가 도달 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를 보여 준 서정주시인의 문학관은 전시실 2동, 세미나동, 전망대로 구성되어 있다.

전시실에는 시와 사진, 미당이 평소에 입었던 옷가지와 펜과 종이, 신발, 지팡이 등 유품을 전시하고 서재를 재현했으며 미당의 친필시 액자, 육필원고, 서정주 연구논문과 대표시들이 전시되어 있다. 미당의 서정어린 '국화 옆에서', '화사', '귀촉도', '동천' 시를 비롯하여 미당이 바라보던 뒤뜰, 시를 쓰다 달이 비치는 밤이면 튕기곤 했다는 거문고, 평생을 사랑의 손때로 다루던 소중한 물건들, 특히 파이프와 베레모는 미당의 생전 모습을 생생하게 그리게 한다. 옥상으로 연결되는 계단 난간에는 전시한 30여점의 설산 사진이 있었다. 이는 미당이 1977년 11월부터 십년간 정부의 후원으로 세계 100여 개국으로 문학여행을 다니면서 직접 찍은 사진이었다. 초인적 자연의 혼에 닿으려는 시심을 표현한 듯 사진 속 설산은 계단을 오르며 점점 고도를 높여간다. 1천여 편에 이르는 방대한 양의 시를 남기며 천부적인 언어 감각으로 한국적이고 원초적인 서정을 담아낸 순수서정시의 주인, 해방 이후 젊은 제자들을 문단으로 이끌며 역어낸 시인, 이것이 한국 문학사에서 미당 서정주를 빼놓을 수 없게 하는 명백한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시인에게 아쉽게도 부끄러운 행보가 있었다. 4층 한 칸엔 미당도 지우고 싶고, 그를 아끼는 이들도 감추고 싶어하는 친일작품 7점을 걸어놓았다. 역사적 인물을 기리는 거의 모든 기념관이 찬양일색인데 비하면 진일보한 모습이다. 시인이 친일시를 썼다는 것이 충격이기도 했지만 시인에 대한 평가까지 관람객의 몫으로 남겼다는 점에서도 미당문학관은 의미 있는 공간이었다. 전망대에는 미당의 시구가 타일에 박혀 있어 더욱 눈길을 끈다. 전망대에 서면 화려한 풍광이 눈앞에 펼쳐진다. 앞쪽으로 변산반도의 울퉁불퉁한 산자락과 함께 곰소만 갯벌을 메워 만든 드넓은 평야가 시원스럽게 열린다. 뒤로는 바다에 면한 산으로는 높이가 만만치 않은 소요산이 병풍처럼 감싸 안고 있어 어머니 품처럼 포근한 느낌이다.

전망대에는 각기 다른 모양으로 뚫린 창이 있다. 그 창 자체가 고창의 아름다운 풍광을 담아내는 액자가 되어주며 고요한 평화로움이 흐르는 마을의 모습을 담은 한 폭의 그림을 선사한다. 저 멀리에서 바라보이는 안현마을의 산등성에는 미당내외의 묘소가 국화꽃밭에 가지런히 모셔져있었다. 안현마을은 마을 전체가 아름다운 벽화로 장식돼 있다. 미당의 대표작품인 ‘국화 옆에서’를 소재로 ‘누님’의 얼굴과 노란 국화, 형형색색의 꽃과 나비를 벽돌담과 슬레이트 지붕에 그려놓았다. 벽화 속 인물은 모두 이 마을 주민들이어서 소박하고도 정감이 넘친다. 아름다운 꽃과 푸르름이 있는 이 시 같은 마을에 미당이 잠들어 계신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문학관을 나와 왼쪽으로 작은 미당교를 지나면 서정주의 생가가 있다. 생가까지 가는 길은 미당의 시가 새겨진 노란 프랑카드들이 즐비하게 늘어져있었다.

생가 초가집은 안채와 바깥채가 있고, 그 사이에 우물과 장독대가 있었다. 초가집주위에도 어김없이 작은 국화꽃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생가에서 내려다보이는 마당가에 ‘다섯살 때’라는 미당의 시와 함께 목침을 베고 누워있는 어린 미당의 모습을 형상화 해 놓았는데 그 모습을 바라보니 어렵게 살아온 미당의 일생이 생각나면서 마음이 찡해났다. 생가 앞에 있는 작은 정자에 잠간 머물러 보았다. 정자 처마 밑에 서 있으니 처량한 풍경소리와 바람소리가 들려오는 듯싶다. 미당의 많은 시가 외할머니의 영향을 받았다는 외갓집까지 가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그곳까지는 가지 못했다. 미당은 후배 시인들로부터 시의 '정부' 또는 '신화'로 불리웠지만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의 호를 미당이라고 했다.

이 호에는 '아직 덜 된 사람'이라는 겸손한 마음과 '영원히 소년이고자 하는 마음'이 모두 담겨있어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한 그의 삶과 잘 어울린다. 비록 미당은 가고 없지만 대지를 노랗게 메우는 국화꽃 향연은 가을날의 밤하늘을 수놓는 별처럼 오래도록 반짝일 것이다. “동백꽃이나 피건 또 오시요.” 바람결에 들려오는 소리다. 서정주의 이 시비가 새겨진 선운사를 행해 성큼성큼 발길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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