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재연 프로필: 중국 길림성 반석현 출생 길림성 영길시 조선족고등학교 졸업. 교사, 자영업 종사. 현재 아모레 퍼시픽. 1989년 '도라지' 문학지에 수필(처녀작) <천국의 주인은 누구?> 발표. 그후 시 작품 다수 발표. 동북아신문 영업부장, 재한동포문인협회 사무국장
[서울=동북아신문]올해는 오랜만에 추석 연휴가 열흘이나 되다 보니 지방이든 해외든 며칠간 맘 놓고 여행을 떠나고 싶었다. 그러던 중 중국에서 물류 사업을 하는 둘째 오빠가 전화를 걸어왔다. 서로 바쁜 일상으로 오랫동안 보지 못했다면서 꼭 한번 오라고 거듭 부탁을 했다. 나는 화장품영업을 하다 보니 당장 떠나야 하는데도 아무런 준비를 할 시간이 없었다. 만남의 설렘도 느낄 사이 없이 여행길에 올랐다. 공항에서 우리를 반겨주는 둘째 오빠 내외의 얼굴은 주름이 몇 가닥 더 그어졌고 깊어진 것 같았다. 오빠의 앞머리는 유난히 서리가 내려앉은 것처럼 희끗희끗해져 있었다. 내 눈길은 수시로 오빠의 머리카락에 꽂혀서 마음이 착잡했다. 우리는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보따리들을 푸느라 자정을 넘겼다. 

  이튿날 나는“오빠도 이제는 새치가 진짜 많네. 이참에 내가 염색해줄게.”라고 하니 오빠는 기분이 좋은지 환하게 함박웃음을 지으며 염색약을 사 왔다. 나는 비닐로 오빠 머리를 씌우고 두 귀도 염색약이 묻지 않게 막았다. 정수리를 중심으로 해서 양옆으로 한 갈피씩 펴 바르기 시작했다. 한올한올 꼼꼼히 빗질하면서 옆 라인이 지워지지 않을까봐 조심 조심히 발랐다. 미장원을 자주 이용한 경험으로 미루어, 염색은 주로 뿌리 부분을 잘하면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는 오빠 머리의 온기를 느끼며 염색을 골고루 했다. 염색을 하면서 처음으로 성인이 되어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오빠의 따뜻한 체온과 체취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그동안 잊고 살았던 혈육의 따뜻함이 내 혈관을 타고 전신으로 흘러들었다. 눈물의 샘이 차고 넘쳐 끝내 오빠의 머리 위에 뚝~ 뚝 떨어졌다. 매일 욕심과 집착의 삶에 쫓겨 형제들 간의 우애를 나눌 시간도 없이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집에서 오빠의 별명은 짱구인데 지천명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앞뒤 머리는 여전히 탁구공처럼 툭툭 튀어나와 있었다. 옛날사람들은 이런 머리를 가진 사람들이 유달리 총명하거나 모험하기 좋아한다고들 했다. 하얗던 머리가 오분, 십 분이 지나자 차츰차츰 짙은 갈색으로 변해갔다. 한줄한줄 염색약을 바르면서 오빠와의 어릴 적 함께 성장하며 뛰놀던 순진한 옛날이 한 페이지씩 선명하게 떠올랐다. 나는 둘째 오빠랑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도란도란 추억의 꿀단지를 열기 시작했다. 

  우리 집은 삼 남매인데 위로 오빠 둘에 나는 막내이자 외동딸이었다. 둘째 오빠는 어릴 때부터 사교성이 뛰어나고 인정이 많아 어른들은 사막에 가서도 새우 얻어먹고 살 팔자라고 했다. 나는 반면에 수줍음이 많고 조용한 성격이라 지금도 어디 가면 아무개의 동생으로 통한다. 나는 늘 새로운 착상이 많은 오빠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가끔 오빠의 처사에 불만이 많았다. 한창 유행되는 겨울 신발을 우리는 엄두도 못 내는데 오빠는 그 신발을 사야 한다고 사흘을 부모님께 졸라댔다. 나중에는 땅바닥에서 울면서 나뒹굴고 학교도 가지 않는다고 떼질을 썼다. 나와 큰 오빠는 두손 두발을 다 들고 우린 겨울 신발을 사지 않아도 좋으니 둘째 오빠는 사주라고 했다. 오빠는 손재주가 많아 어릴 때부터 궁금한 것을 참지 못했다. 라디오나 자전거를 멀쩡한데도 싹 뜯었다가 다시 맞추곤 했다. 그러다가 어떤 때는 원상복귀가 되지 않아 아버지께 야단도 맞았다. 그래서 나와 큰오빠는 일단 신경이 둘째 오빠가 사고를 낼까봐 따라 다니며 지켰다. 사춘기를 지나면서 오빠는 조숙 되어 연애 대장이라고도 불렸다. 동생이라 오빠 성격을 잘 알고 있어 어떤 여자들이 오빠의 덫에 잘 걸리느냐고 멍청하다고도 했다. 오빠는 곳곳에 친구들이 널려 있었고 가끔씩 올곧은 성격 때문에 불의를 참지 못해 주먹 싸움을 해 사고를 치곤했다. 해마다 조용한가 싶으면 무역을 한다고 여기저기 다니다가 빈털터리가 되어 집에 올 때면 친구까지 데리고 왔다. 엄마는 매일 오빠를 강가에 내어놓은 아이처럼 집에 들어와서야 맘이 놓인다며 한탄을 했다. 

  몇 년 지나 오빠는 이 사업 저 사업을 해서 돈도 엄청나게 많이 벌었다. 집에 올 때마다 부모님을 위해 맛있는 걸 차로 실어오고 고급 옷에 신발에 씀씀이가 보통이 아니었다. 그때 오빠는 나의 자랑이었다. 그러다가 외국으로 사업하러 갔을 때 부모님이 차례로 다 돌아가시자 오빠는 많은 후회를 했다. 부모님께 돈 드리고 남부럽지 않게 해드리는 게 효도인 줄 알았다고 했다. 살아계실 때 곁에서 얘기를 들어 주고 마음을 즐겁게 해 드리는게 진정한 효도라는걸 늦게나마 깨달았다며, 철없을 때는 부모님께 너무 근심을 끼쳐드려 맘이 아프다며 술을 한 잔 마시고 넋두리를 했다.   

  오빠는 그곳에서 사업장을 운영하면서도 시골에 버려진 땅을 임대 내어서 집에서 시간 보내기가 어려워하시는 어르신들께 소일거리를 만들어 용돈도 장만할 수 있게 해드렸다. 오빠는 그분들의 자식마냥 식사하다가도 누가 부르기만 하면 수저를 놓고 뛰어다녔다. 오빠의 손재주가 좋은 덕에 고장 난 것들을 만지기만 하면 신통하게도 금방 수리가 되었다. 오빠는 그곳이 비록 작은 도시지만 따뜻한 인정미가 넘치고 사람들이 순박해서 좋다고 했다. 자식들이 먼 곳에 계시는 분들이 많아 돌봐 드려야 할 어른들이 계셔서 그곳을 떠날 수 없다고 했다. 앞으로 몇 년이 지나 실버타운을 아담하게 만들어 운영하는 게 꿈이라고 했다. 

  오빠는 염색을 마치고 갈색 머리를 드라이기에 말렸다. 내가 사준 옷에 신발까지 바꿔 신더니“이 오빠가 동생 덕에 신수가 훤해졌네”하면서 입꼬리가 올라가면서 행복을 감추지 못하였다. 첫날보다 다섯 살은 어린 것 같았다. 앞뒤 머리가 튀어나온 오빠의 짱구머리가 오히려 더 귀여워 보였다. 내 눈에는 요즘 인기 만점인 만화에서 나오는 짱구의 매력 못지않았다. 

 오빠는 흰머리가 많아져 세월을 못 이겨 늙어 가는 것이 아니었다. 고개를 들고 뽐내던 봄부터, 비바람과 삼복의 세례를 이겨내는 여름의 여정을 걸어온 것이었다. 드디어 노랗게 구워지는 시월의 가을 들판처럼 익어가는 것이었다. 열매도 농익어야만 제 맛을 볼 수 있듯이 사람도 세월의 아픔을 겪어야 인격적으로 성숙하는 것이다. 나는 가을 들판에 서서 인생의 풍년을 맞는 환한 오빠의 얼굴이 어렴풋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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