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연숙 약력: 재한동포문인협회 회원. 시, 수필 다수 발표. 현재 울산 거주
 [서울=동북아신문]  쏠쏠한 "부업"(1)

오늘도 여전히 하루라는 선물을 덩그러니 받아 않았죠. 시작부터 차려진 것을 써버리느라 바빠집니다. 반은 일터에서 뭉청 끊겨 나가고요, 먹고 자는 데에 반의 반을 써버리는 거죠. 남은 꼬투리 시간마저 좀 먹듯이 이일 저 일이 갉아 부스러지죠. 인생도 이렇게 "착실하게" 써버려 허무하게 되겠죠? 남편이 매일 저보고 하는 소리가 있어요. "딴짓"하지 말고 정신을 차리라구요. 그건 권위적인 면도 살짝 코팅된 남편의 사랑인거죠. 저는 "딴짓"을 많이 합니다. 일찍 일어나면요 머리맡에 놓인 책을 뒤적거려요. 시간이 날 적마다 서점에서 대량으로 구입 한 거죠. 짬짬이 커피 끓이는 시간이나 밥을 하는 시간이나 화장실에서 볼일 보는 시간에도 다문 몇 줄이라도 더 보려다가 커피 주전자도 몇 번을 태워 골동품이 되여 버렸고요, 냄비도 몇 개나 태워 버렸죠. 또 출입문도 잠그지 않고 전기요의 코드도 뽑지 않고 출근하는 바람에 남편한테 사흘이 멀다하게 잔소리를 듣습니다. 남편이 정신을 차리라는 말도 그래서 하는 소리입니다. 책과 현실을 넘나드는 오락가락은 광적인 영혼의 왈츠인거죠. 이래 뵈도 저는요 아침에는 꼭 운동을 해요. 헬스장에서 런닝머신을 하는 동안에는 티비로 요리채널을 시청하죠. 짬짬이 배운 요리들을 시범하고 스스로 대견해하며 자아만족의 경지를 감상하는 특유의 취미도 있기 때문이지요. 운동이 끝나면 아래층의 사우나에서 피로를 말끔히 씻어내죠. 헬스장은 매주 수요일이 휴무예요. 그때는 자전거로 태화강변을 달려요. 태화강의 조류들은 어김없이 저의 카메라에 담기고 유유히 흐르는 강물은 조급한 저의 마음을 안정시키죠. 야외운동은 몸의 활력을 줌과 동시에 마음에도 생기를 불러일으키죠. 말 그대로 에너지 충전소입니다. 운동이 끝나면요 자전거로 출근합니다. 요골목 조골목 누비며 아침장사 시작하는 상인들의 따끈따끈한 생활을 감상하고요 길가의 꽃들이나 나무들, 또 하늘이 유난히 아름다울 때는 한컷 남기는 거죠. 요즘은 인터넷으로 우리 조선말방송이나 조선족잡지, 신문들에서 음악이나 시들을 이어폰으로 감상을 할 수 있어서 넘 좋아요. 빨라지는 요즘 생활 속에서 길에서도 여유로운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은 신선도 부러워하겠죠. 저는 식당아줌마예요. 아침 열시부터 밤 열시까지 식당에서 매일 보는 얼굴들만 보고요 매일 반복되는 일들만 해요. 그래서요 짬만 있으면 정원으로 나가 꽃을 보고 나무도 보고 하늘도 보고 해와 달, 별을 보죠. 그리고 바람도 느껴보고 비도 맞아봐요. 그러다가 떠오르는 감성을 따라 적고요 또 커피 한잔 하면서 문득 생각나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인사도 보내고 진심어린 답장을 받죠. 그 순간 설레는 기분은 종일 바쁜 손을 즐겁게 해줘요. 지루하고 단조로운 시간 속에서 구석구석 보석 같은 짬을 꼬집으면요 형용하기 어려운 행복들이 봇물처럼 터집니다.  저는 퇴근하면요. 혼자 앉아 술 마시기를 즐깁니다. 저 자신과 만나는 소중한 시간인거죠. 종일 썼던 가면을 벗어 던지고 가장 솔직해 지는 순간인거죠. 한잔, 두 잔의 술에 전 어느새 평화로운 색깔로 물들어 버려요. 그야말로 환상 이죠. 제가 술을 마시는 이유이고요 또 술을 끊지 못하는 이유인거죠. 술에 취하면 또라이가 될 때도 많지만……그래도 무조건 술에 환장한건 아니에요. 술 약속이 들어오면요 부득이 참석하지 않으면 안될 장소를 제외 하고는 정중히 거절하는 도도한 면도 있어요. 여러 사람들 하고 술 마시면 저의 시간을 뺏길 때가 더 많기 때문이죠. 고독을 즐기는 자칭 왕따입니다. 고독은 즐거운 외로움이라고 혼자 놀기를 좋아하는 거죠. 정신없이 돌아쳐도요, 전 살림살이는 착실히 합니다. 모든 살림은 짬 시간에 해결하죠. 시간이 걸리는 김치나 청소는 음악이나 라디오방송과 함께 하고요 이불 빨래하는 날이면 옥상에서 올망졸망 주택들을 내려다보며 최고의 권위를 만끽하죠. 산에 오르는 거나 빨래 널려고 옥상에 올라가는 거나 거기서 거기인거죠. 옥상에서 저의 아마추어 시도 탄생합니다. 가무일은 내 가족의 편안하고 따뜻한 휴식터를 제공해주는 신성한 노동이죠. 그냥 일이라고 해버리면 그 신성한 일에 스트레스를 받는 거죠. 때문에 즐거움과 함께 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겠죠. 자신의 손끝에서 정결하고 아늑해지는 보금자리를 보노라면 자연스레 즐거움이 생겨요. 생각을 바꾸는 센스!  휴무날이면 종일 책속에 빠지거나 산이나 계곡이나 바다로 가거나 멍 때리는 시간을 많이 가져요. 무상무념의 멍 때리기는 그냥 바보행각으로 보면 실수입니다. 우리가 뻐근한 몸을 스트레칭 하듯이 멍 때리기도 정신을 스르레칭 해주죠. 한잠 자는 것 보다 멍 때리기가 정신을 더 맑아지게 하고 또 열심히 뛰었던 열정에게 잠간이라도 휴식처를 제공해 주는 아주 훌륭한 정신운동이죠. 또 산이나 바다 앞에서는 코대 높이던 내 자신이 하등 보잘 것 없는 존재임을 깨우치고요 겸손으로 정화시키려고 노력을 하죠. 돌아서면 오만해지는 고약함이 조금 있지만 책속의 앉아서의 여행은 저의 오만을 깊이 잠들게 하죠.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하루 24시간이죠. 하루를 48시간으로도 살수 있다는 글을 본적이 있어요. 그건 시간을 벌었다는 거겠죠. 저의 하루 수면시간을 궁금해 하는 친구들이 많아요. 사실 전 5시간이상 수면은 충분히 보장해요. 잠은 올 때만 자요. 그냥 누워서 뒹굴뒹굴하는 시간은 없죠. 저번에 친구가 저보고 충분한 수면이 장수 한다면서 잠을 희생시키지 말라며 조언을 주었죠. 친구의 말이 백번 맞는 말이죠. 사람은 열흘을 안 먹어도 살 수 있지만은 열흘을 자지 못하면 죽는다고 해요. 그만큼 수면이 우리의 건강과 수명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거죠. 그렇다고 수명만 연장 하는 것은 삶의 의미가 없잖아요. 한번밖에 오지 않는 인생을 내 삶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으며 시간을 내 시간으로 버는 것이겠죠. 너무 일에만 파묻히거나 남 눈치 보면서 다른 사람의 삶으로는 살지 말아야 겠죠. 시간을 번다는 것이 결국은 의미 있는 장수(長寿)가 아니겠어요? 저는 요즘에요 시간을 버는 "부업"에 빠졌어요. 시간을 보내려고 하지 않고요, 어떻게 벌어들일까 하고 머리를 굴리고 또 굴려요. 참말로 재미 쏠쏠합니다. 동업자가 생기면요 체인점을 꾸려 볼까 하고 연구 중입니다. 많은 참여 부탁합니다. 또 더 좋은 아이디어가 있다면 우리 서로 공유합시다.   [홍연숙 수필] 엄마니까(2)  "엄마" 라는 이름은 자연스레 희생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 엄마는 항상 희생의 대명사다. 우린 입버릇처럼 "엄마니까~"를 입가에 늘 붙이면서 엄마의 생활범위를 단순화시키고 속박시킨다. 엄마는 자식의 "천진난만"한 구속에서 눈치를 보며 조금만 그 틀을 벗어나면 남은 생을 속죄 속에서 보낸다. 엄마들도 의무감시원이 되어 또 다른 엄마의 "죄행"을 동네방네에 "혀의 배달"로 적극적으로 폭로시키며 엄마의 자아를 위축시키고 자존감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이것이 사회의 "문화"라는 이름으로 자연스럽게 우리의 삶에 스며들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영남 시인님의 시 "엄마는" 에서는 " 엄마는 다친 팔로도 기어이 밥 해주고 병원 가시던 엄마" 라며 가슴 아파하신다. 허창렬 시인의 시 "어머니"에서는 "애비 잃은 자식들을 홀로 키우시며", "한평생 변변한 음식, 변변한 옷 한 벌 없이 땀에 찌든 삼베적삼에 무명치마 입고 하늘나라 가신 " 어머니의 서러움을 노래하였다. 왜 엄마는 다친 팔로도 기어이 밥을 해주며 병원에 먼저 가지 않았는가? 우리의 머리 속에는 엄마는 밥모로 입력이 되어있다. 밥은 엄마가 해준 밥이 최고로 맛있다면서 굳이 엄마가 해주는 밥을 고집한다. 모든 가정들에서는 밥을 하지 않는 엄마는 엄마 자격이 없다고들 한다. 심지어 결혼하는 조건에는 밥상을 차려줘야 하는 여자의 "천직"이 정해져 있다. 세상이 준 "천직"을 사랑으로 승화시킨 엄마의 위대함이 아픈 팔을 치료하는 것 보다 밥상 차려주는 것을 먼저 선택했으리라. 왜 엄마는 홀로 자식들을 키우면서 그 수많은 외로운 밤들을 삭히며 청춘과부로 희생해야 했는가? 엄마들도 욕정이 있고 남자의 사랑이 필요하다. 하지만 시집을 가면 그 집의 귀신이 될 때까지 수절을 지켜야 한다는 사회문화의 강박성 때문에 남편이 돌아가셔도 재가할 엄두도 못내거니와 사랑이 없는 혼인도 끝가지 지키기 위해 남은 생의 행복을 포기한다. 또 엄마는 우리 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밥에서부터 소외당해왔다. 항상 식구들을 먼저 챙기고 맛있는 것은 당연히 남편과 자식이 우선이었다. 입는 옷도 언제나 입던 그 옷이다. 새 옷을 입으면 엄마를 알아보지도 못한다. 참으로 가여운 엄마의 인생이다. 물론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이전보다 엄마들의 자존감도 많이 높아졌지만은 아직도 그 옛 틀 속의 엄마를 그리워하는, 계속 엄마를 그런 틀 속에 가두려는 생각들이 엄마들을 힘들게 한다. 슬프도록 아프게 한다. 엄마는 엄마이기 전에 여자다. 우리 엄마는 지금 칠순이 넘었어도 웃을 때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는다. 소녀 같다. 저번에 시 "엄마" 를 올리면서 사전에 많은 고민도 했었었다. 시로 인해 엄마에게 어떤 오해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난 평생을 따라 다닌 엄마에 대한 편견을 깨고 싶었다. 엄마는 이혼과 재혼을 번갈아가면서 주위사람들의 입방아에서 편한 날이 없었다. 게다가 나까지도 엄마를 차갑게 대하면서 엄마의 마음에 아물지 못할 많은 상처들을 남겼다. 딸이 시집갈 때가 되고 보니 엄마에 대해 조금이 나마 이해하게 되였고 여태 엄마의 잘못만 탓해온 내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던지를 깊이 깨닫게 되였다. 나도 많은 시행착오를 가지면서 엄마로 성장해나가는 과정이 얼마나 힘들고 고달픔의 연속인지를 뒤늦게 깨우쳤다.  엄마의 실수는 잘못이 아니다. 엄마도 자식이 태어나면서부터 함께 엄마나이를 먹는다. 즉 엄마의 나이는 자식의 나이와 같다는 거다. 그리고 함께 크면서 함께 성장한다. 사람이 살면서 실수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완벽한 엄마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다. 누가 감히 누구 집 엄마를 뭐라고 할 권리가 있는가? 엄마도 자신의 행복을 위하여 이기(利己)도 가질 권리가 있다. 엄마의 삶도 소중하니까. 나는 엄마라는 이름으로 이 세상 살아가는 모든 엄마들이 당당하게 자신의 행복을 위하여 용기를 가지기를 바란다. 또 부디 행복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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