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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신사임당과 허난설헌

기사승인 2014.08.27  07:5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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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한민족여성대회와 21세기 한국의 여성 지도자

   
▲ 재외동포신문 이형모 회장
[서울=동북아신문]신사임당과 허난설헌, 두 분은 조선 중기의 여성 시인, 작가, 화가로 쌍벽을 이루었고 지금까지 명성이 이어져 오고 있다. 강릉 태생으로 훌륭한 선비 가문에 태어나 어릴 적부터 재능을 인정받고 학문과 예술을 배운 공통점을 가졌다.

신사임당(1504년~1551년)은 본명이 인선으로 강릉에서 신명화의 5녀 중에 둘째로 태어났다. 기묘사화를 겪고 은거한 부친으로 부터 성리학 교육을 받았다. 처가살이 경험이 있는 신명화는 재능이 많은 둘째 딸을 위해, 사위에게 처가살이를 권했다. 남편 이원수는 19세의 신사임당과 결혼할 때 강릉 처갓집으로 장가들었다.

그 이후 신사임당은 친정아버지가 일찍 죽자 아들 없는 딸로서 파주 시댁과 강릉 친정집을 오가며 친정어머니를 극진히 모셨다. 학문과 재능이 뛰어난 부인을 존중해 주는 남편과의 사이에 5남 2녀를 두었다. 친정어머니가 돌아간 후에는 파주 시댁에서 시어머니를 모셨는데 고부 사이도 좋았다고 한다.

과거 시험에 실패한 남편 이원수는 ‘음서’로 벼슬에 나갔는데 이 일 때문에 부인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나이 들어 기방에 출입하고 축첩하는 계기가 되었다. 근엄한 부친을 기억하는 신사임당으로서는 참기 힘든 일이었다. 병으로 돌아가기 직전에는 남편에게 자기 사후에 자식들을 생각해서 재혼하지 말 것을 부탁하기도 했다.

사임당은 어릴 적부터 외조부로부터 성리학을 배웠다. 사임당의 학문과 예술은 안견의 산수화를 그림교재로 사 주었던 외조부 이사온과 어머니 이씨로 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녀는 학문뿐만 아니라 일찍이 그림과 글씨를 잘 써서 칭송을 받았는데, 어머니로부터 바느질과 부엌일도 배워 살림살이와 음식 솜씨도 있었다.

16세에 어머니를 여읜 이율곡이 당대의 대학자로서 서인의 종주이자 노론의 학문적 시조가 되면서 신사임당은 부덕의 상징, 현모양처의 모범으로 추숭되었다. 그녀의 뛰어난 학문과 예술, 그리고 자기 주도적 삶과 인간관계와는 다소 무관한 칭송이라 하겠다. 그러나 친정어머니로부터 배운 ‘자녀교육’으로 5남 2녀를 잘 길러 2남 이율곡에 더하여 5남 이우는 시, 서화로 유명하고 장녀 이매창 역시 시와 그림에 능하여 소사임당이라 불리기도 했다.

허난설헌(1563년~1589년)은 본명이 초희로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허엽의 셋째 딸로 강릉에서 태어났다. 재능을 알아 본 오빠들의 사랑과 후원으로, 큰 오빠의 친구 이달에게 시와 학문을 배워 일찍이 천재적 시재를 드러냈다. 15세에 안동 김씨 김성립에게 시집을 갔는데, 배려가 부족하고 평범한 남편의 몰이해와 외도가 허난설헌을 외롭게 했다.

시어머니와의 고부갈등도 허난설헌을 괴롭혔다. 남매를 두었으나 어린나이에 병사했고 나중에 다시 임신한 아이도 잃었다. 친정아버지 허엽이 여행 중에 객사하고 어머니마저 병사하자 마음 붙일 곳 없이 되어 삶에 뜻이 엷어졌다.

허난설헌이 27세에 세상을 떠난 후, 1608년(선조41년) 남동생 허균이 명나라에서 문집(난설헌집)을 출간하여 중국에 널리 알려졌고 격찬을 받았다. 1711년 일본에서도 문집이 간행되어 당대의 여류시인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게 되었다. 시 300여 수 중에 213수가 전한다. 서예, 그림도 좋다. 어의 허준이 11촌 숙부뻘이다.

조선 조 초기에는 결혼 풍습이 남자가 처갓집으로 ‘장가’가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태종실록에도 “혼인예법은 남자가 여자의 집으로 장가들어 아들과 손자를 낳아서 외가에서 자라게 합니다. 조선에서도 아직 옛 풍속을 따르고 있습니다”라고 예조가 보고한 내용이 있다.

그러다가 유교적 가부장제의 확립을 추구하는 정부의 정책으로 점차 여자가 ‘시집’으로 들어가는 것이 장려되었다. 신사임당과 허난설헌도 이러한 과도기에 살았는데 신사임당은 친정부모의 후원과 남편 이원수의 이해, 시가의 배려로 친정집에 머물 기회가 많았다. 그 덕에 그녀의 학문과 예술은 당대와 후대에 인정받았고 자녀교육도 뜻대로 애썼으며 자기 주도적 삶을 살 수 있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허난설헌은 시집가서 며느리 구실하느라 끝없는 가사노동에 시달렸다. 시어머니와의 불화, 남편의 몰이해와 외도로 천재시인이 아니라도 삶의 낙을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어린 남매마저 잃은 그녀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시를 쓰는 것이었는데 죽으면서 가지고 있던 모든 시와 그림을 불태웠다고 전한다. 그나마 누이의 시재를 사랑한 동생 허균이 챙겨둔 시들이 후일에 간행되어 그녀의 천재성을 세상에 널리 알렸다.

4백여 년이 지난 오늘, 21세기 여성들의 삶은 어떠한가? 개인에 따라 삶의 우여곡절과 어려움은 여전히 다양하지만, 시집살이의 질곡은 사라졌다. 여성이 학문을 하거나 전문성을 키우는 일은 장려된다. 취업하거나 사업하는 데에도 제약이 없다. 여성의 전문직, 고위직, 선출직 진출은 급속도로 확장되고 있다. 여성 기업인, 의사, 법관, 정치인, 여성대통령까지 나왔다.

그러나 겉보기와 달리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에서 남녀임금격차가 37.5%로 최하위이고, 여성 취업률도 60%로 남성보다 29% 낮다. 일하는 여성들은 여전히 자녀출산과 양육, 보육에 발목 잡혀 있다. ‘허난설헌의 질곡’이 지금껏 여성들을 짓누르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사회정책으로 여성들에게 평등한 기회를 부여해서 그들의 역량을 이끌어 낼 때이다.

21세기는 여성의 세기라고 한다. 세계 각국에서 많은 여성 지도자들이 역량을 발휘하고 있는 이때에, 우리나라에서도 21세기의 신사임당과 허난설헌들이 ‘진정한 리더십’을 보여줄 때가 가까이 오고 있다.

재외동포신문

[편집]본지 기자 pys04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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